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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부 [[혜종 순황제 이준|혜종 순황제]], 친모 [[경신순황후 (설중매)|경신순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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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대한제국 (설중매)|대한제국]]의 제3대 [[대한제국 대황제 (설중매)|황제]]. 휘는 준(鎨)이며, 연호는 태시(太始), 묘호는 혜종(使宗), 시호는 순황제(純皇帝)이다.


== 생애 ==
== 생애 ==
=== 유년기 ===
[[선종 효황제 이청|선종 효황제]]의 유일한 적장자로 선종의 나이가 당시로써는 고령인 33세에 1915년 8월 3일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아버지 선종을 빼닮아 학문에 능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5살때 황태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부황 선종이 1923년 귀족원 개회사를 위해 마차를 타고 귀족원으로 향하던 도중 만주족 테러리스트의 폭탄 테러로 사망하여 7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유년기 명석한 모습을 보여주어 백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나이를 먹어가며 정치와 치국에 대한 흥미를 거두고, 예술과 주색잡기에만 전념하였다.
=== 무기력한 황제 ===
혜종은 기존의 황제였던 조부 성조와 아버지 선종과 달리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국사는 전적으로 귀족원의 추인을 받은 내각에 의하여 처리되었다. 이러한 혜종의 치세 초반기는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러웠으나, 경제적으로는 1차 대전 전후의 경제적 호황으로 인한 태평성세가 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고 그 바람이 미국을 건너 대한제국으로 건너오자 경제는 순식간에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 무기력한 혜종은 선대 황제들처럼 주도적으로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를 내각에 일임한 체 고서의 수집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내각으로써도 이 전례 없는 경제적 광풍을 해결할 묘책이 딱히 존재하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결국 이를 타개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여럿 발생한다. 극소수 공산주의자들의 암살이나 폭동, 민권론자들의 시위가 대표적이었으나 군부의 일부 소장파 장교들도 이러한 시도에 관심이 다분했다. 1931년 몽강사변을 시작으로 1932년의 2.15 사건과 같은 군부의 지휘 체계 무시나, 쿠데타 음모가 여럿 적발되었다. 그러나 이때마다 경시청과 특무대의 빠른 대처로 사건을 무마하였으나 이는 단지 임시 조치에 불과하여 1933년의 5.16 사건을 막지는 못했다.
=== 전쟁과 평화 ===
5.16 사건으로 내각을 해산시키고 혜종의 암묵적인 추인하에 권력을 잡은 김좌진은 대한제국을 하나의 병영으로 탈바꿈 시켰다. 김좌진은 서백리 출병 당시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붉은 군대가 철저한 규율과 감투 정신을 가지고 있음에 놀라, 소련이 산업화를 진행하기 전에 빨리 시베리아를 정복해야 한다는 대소주전론자가 되었고 1939년 지속적으로 벌어지던 한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은 결국 양국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한소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나 김좌진의 환상과 다르게 전황은 흘러간다. 해전에서는 제국 해군이 큰 우위를 점했지만 지상전에서는 제국 육군이 소련군에게 대적하기 어려웠다. 결국 개전 이후 빠르게 소련군을 타격하고 시베리아를 정복한다는 김좌진의 계획과 달리 개전 초기부터 제국군은 소련 육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어 연해주와 몽강을 빼앗기고 한반도 마저 위험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몰렸다. 그러나 [[환친왕 (설중매)|환친왕]]이 패닉에 빠진 김좌진을 대신하여 본토 주둔 대한제국군과 패잔병, 경찰과 후비군을 총동원하여 압록강 방어선을 수호하고,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던 소련의 필요성에 의해 양국은 요동과 연해주, 화태를 소련에 할양하는 종전 협상을 채결한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이 수탈하던 물적-인적 자원도 급감해 한국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혜종은 한소전쟁의 패전으로 인한 책임을 김좌진에게 돌렸다. 김좌진을 내란죄로 사형시키고 믿음직한 숙부인 환친왕을 총리로 기용하여 소련의 혹시 모를 침공에 대비하여 1945년까지 환친왕 중심의 총력전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환친왕은 어린 시절부터 기존의 대한제국식 입헌군주제로는 전제황권의 유지는 군주제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 생각했고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침공 가능성이 사라지자 혜종을 설득하여 계엄령을 거두고 의회제를 정비하는 한편 정치적 담론을 개방하였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의 형성을 예견한 환친왕은 소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고 베를린 봉쇄가 해소되던 1949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채결하여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을 기초를 다졌다. 또한 독자적 핵개발에 착수, "오얏꽃이 피었습니다" 계획으로 1960년 대한제국은 5번째 핵보유국이 된다. 이러한 환친왕의 개혁으로 대한제국의 민심은 안정되었고, 혜종 또한 민권주의를 대한제국에 "하사해주신" 영명한 군주라는 평가를 얻는다.
== 말년 ==
== 가족관계 ==
== 가족관계 ==
== 어록 ==
== 어록 ==

2024년 2월 17일 (토) 01:45 판

[ 소개 ]
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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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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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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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3대 대황제
혜종 순황제| 惠宗 順皇帝
이름 이준(李鎨)
출생 1915년 8월 3일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붕어 1967년 11월 27일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향년 51세)
즉위 1923년 2월 27일
황성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자
1920년 9월 19일 ~ 1923년 2월 27일
대한제국 제4대 황제
1920년 9월 19일 ~ 1967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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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친부 혜종 순황제, 친모 경신순황후
부모 부황 선종 효황제, 모후 공정효황후
형제자매 동생 선경공주
황후 경신순황후
학력 강학원 유치원 (수료)
강학원 초등과 (졸업)
강학원 중등과 (졸업)
강학원 고등과 (졸업)
종교 유교 (성리학)
묘호 헤종(惠宗)
존호 문정익원경순후양환수순후안흥비철
(文貞翼元景純厚襄桓修純厚安興比哲)
용정제막각철청달장혜상정화흠승렬
(容靖齊幕恪哲淸達莊惠商貞和欽勝烈)
혜막직렬사밀현선
(慧幕直烈思密賢宣)
시호 도정무문돈견광양순황제
(悼正武文敦堅光襄純皇帝)[1]
연호 희승(熙承, 1921~1967)
계급 대한제국군 육해공군 대원수


개요

대한제국의 제3대 황제. 휘는 준(鎨)이며, 연호는 태시(太始), 묘호는 혜종(使宗), 시호는 순황제(純皇帝)이다.

생애

유년기

선종 효황제의 유일한 적장자로 선종의 나이가 당시로써는 고령인 33세에 1915년 8월 3일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아버지 선종을 빼닮아 학문에 능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5살때 황태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부황 선종이 1923년 귀족원 개회사를 위해 마차를 타고 귀족원으로 향하던 도중 만주족 테러리스트의 폭탄 테러로 사망하여 7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유년기 명석한 모습을 보여주어 백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나이를 먹어가며 정치와 치국에 대한 흥미를 거두고, 예술과 주색잡기에만 전념하였다.

무기력한 황제

혜종은 기존의 황제였던 조부 성조와 아버지 선종과 달리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국사는 전적으로 귀족원의 추인을 받은 내각에 의하여 처리되었다. 이러한 혜종의 치세 초반기는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러웠으나, 경제적으로는 1차 대전 전후의 경제적 호황으로 인한 태평성세가 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고 그 바람이 미국을 건너 대한제국으로 건너오자 경제는 순식간에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 무기력한 혜종은 선대 황제들처럼 주도적으로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를 내각에 일임한 체 고서의 수집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내각으로써도 이 전례 없는 경제적 광풍을 해결할 묘책이 딱히 존재하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결국 이를 타개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여럿 발생한다. 극소수 공산주의자들의 암살이나 폭동, 민권론자들의 시위가 대표적이었으나 군부의 일부 소장파 장교들도 이러한 시도에 관심이 다분했다. 1931년 몽강사변을 시작으로 1932년의 2.15 사건과 같은 군부의 지휘 체계 무시나, 쿠데타 음모가 여럿 적발되었다. 그러나 이때마다 경시청과 특무대의 빠른 대처로 사건을 무마하였으나 이는 단지 임시 조치에 불과하여 1933년의 5.16 사건을 막지는 못했다.

전쟁과 평화

5.16 사건으로 내각을 해산시키고 혜종의 암묵적인 추인하에 권력을 잡은 김좌진은 대한제국을 하나의 병영으로 탈바꿈 시켰다. 김좌진은 서백리 출병 당시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붉은 군대가 철저한 규율과 감투 정신을 가지고 있음에 놀라, 소련이 산업화를 진행하기 전에 빨리 시베리아를 정복해야 한다는 대소주전론자가 되었고 1939년 지속적으로 벌어지던 한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은 결국 양국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한소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나 김좌진의 환상과 다르게 전황은 흘러간다. 해전에서는 제국 해군이 큰 우위를 점했지만 지상전에서는 제국 육군이 소련군에게 대적하기 어려웠다. 결국 개전 이후 빠르게 소련군을 타격하고 시베리아를 정복한다는 김좌진의 계획과 달리 개전 초기부터 제국군은 소련 육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어 연해주와 몽강을 빼앗기고 한반도 마저 위험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몰렸다. 그러나 환친왕이 패닉에 빠진 김좌진을 대신하여 본토 주둔 대한제국군과 패잔병, 경찰과 후비군을 총동원하여 압록강 방어선을 수호하고,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던 소련의 필요성에 의해 양국은 요동과 연해주, 화태를 소련에 할양하는 종전 협상을 채결한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이 수탈하던 물적-인적 자원도 급감해 한국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혜종은 한소전쟁의 패전으로 인한 책임을 김좌진에게 돌렸다. 김좌진을 내란죄로 사형시키고 믿음직한 숙부인 환친왕을 총리로 기용하여 소련의 혹시 모를 침공에 대비하여 1945년까지 환친왕 중심의 총력전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환친왕은 어린 시절부터 기존의 대한제국식 입헌군주제로는 전제황권의 유지는 군주제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 생각했고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침공 가능성이 사라지자 혜종을 설득하여 계엄령을 거두고 의회제를 정비하는 한편 정치적 담론을 개방하였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의 형성을 예견한 환친왕은 소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고 베를린 봉쇄가 해소되던 1949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채결하여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을 기초를 다졌다. 또한 독자적 핵개발에 착수, "오얏꽃이 피었습니다" 계획으로 1960년 대한제국은 5번째 핵보유국이 된다. 이러한 환친왕의 개혁으로 대한제국의 민심은 안정되었고, 혜종 또한 민권주의를 대한제국에 "하사해주신" 영명한 군주라는 평가를 얻는다.

말년

가족관계

어록

대중 매체에서

기타

상훈(賞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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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전한 시호는 혜종문정익원경순후양환수순후안흥비철용정제막각철청달장혜상정화흠승렬혜막직렬사밀현선도정무문돈견광양순황제(惠宗文貞翼元景純厚襄桓修純厚安興比哲容靖齊幕恪哲淸達莊惠商貞和欽勝烈慧幕直烈思密賢宣悼正武文敦堅光襄純皇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