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열황제 이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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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적 평가 ===
=== 부정적 평가 ===
== 여담 ==
== 여담 ==
* 외모가 준수하고 유머 감각과 언변이 좋으며 사교성이 활발하여 유년기부터 황실의 아이돌로 불렸고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재학 시절 고등문관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명실상부한 황실의 스타로 거듭났었다. 이러한 인기에 걸맞게 한성제국대학 재학 시절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받았으나 오직 훗날의 황후인 최씨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재학 시절부터 열조와 순의덕황후는 대학을 대표하는 컴퍼스 커플로 유명했고 금슬이 좋았다.
* 외모가 준수하고 유머 감각과 언변이 좋으며 사교성이 활발하여 유년기부터 황실의 아이돌로 불렸고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재학 시절 고등문관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명실상부한 황실의 스타로 거듭났었다. 이러한 인기에 걸맞게 강학원대학 재학 시절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받았으나 오직 훗날의 황후인 최씨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재학 시절부터 열조와 순의덕황후는 대학을 대표하는 컴퍼스 커플로 유명했고 금슬이 좋았다.


* '''최초로 평민과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최초의 황족'''이다. 이에 혜종과 황족들이 이를 윤허하지 않자 "지희<ref>현인성황후의 휘</ref>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이에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고 현인성황후는 주변의 엄청난 직ㆍ간접적 압력에 부담을 느껴 열조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에 한경군은 손을 붙잡고 "내 일생을 널 지키는데 쓰겠다"라며 청혼했다. 마침 한성제국대학을 취재하던 KBS가 이를 촬영하여 그날 저녁 뉴스에 대서특필 되었다.<ref>이 당시 황실은 KBS가 황족의 사생활을 유출했다며 격분했지만, 한경군의 간곡한 설득을 받은 혜종이 선처를 베풀었다.</ref> 결국 당시 한경군의 고집에 혜종이 결혼을 윤허하였다. 이러한 결혼 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은 젊은 미남 황족과 아름다운 평민 여성이 우연히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다.
* '''최초로 평민과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최초의 황족'''이다. 이에 혜종과 황족들이 이를 윤허하지 않자 "지희<ref>현인성황후의 휘</ref>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이에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고 현인성황후는 주변의 엄청난 직ㆍ간접적 압력에 부담을 느껴 열조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에 한경군은 손을 붙잡고 "내 일생을 널 지키는데 쓰겠다"라며 청혼했다. 마침 강학원대학을 취재하던 KBS가 이를 촬영하여 그날 저녁 뉴스에 대서특필 되었다.<ref>이 당시 황실은 KBS가 황족의 사생활을 유출했다며 격분했지만, 한경군의 간곡한 설득을 받은 혜종이 선처를 베풀었다.</ref> 결국 당시 한경군의 고집에 혜종이 결혼을 윤허하였다. 이러한 결혼 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은 젊은 미남 황족과 아름다운 평민 여성이 우연히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다.


* 열조가 즉위 이후 혜종의 은혜를 기리는 발언을 수시로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열조와 혜종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혜종은 열조의 자유분방함을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여기며 총애했고, 황실 내의 반대 여론에도 열조를 종친사환금지법의 예외로 인정하여 열조가 권력에 다가서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열조 또한 혜종을 몹시 따르며 ''''강녕전께서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교태전과 경근당에는 냉담함만이 있다''''라고 발언하거나 정보사로써 참석한 첫 어전회의에서 혜종을 보고 “그 말투며 태도며 실로 경복하기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 열조가 즉위 이후 혜종의 은혜를 기리는 발언을 수시로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열조와 혜종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혜종은 열조의 자유분방함을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여기며 총애했고, 황실 내의 반대 여론에도 열조를 종친사환금지법의 예외로 인정하여 열조가 권력에 다가서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열조 또한 혜종을 몹시 따르며 ''''강녕전께서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교태전과 경근당에는 냉담함만이 있다''''라고 발언하거나 정보사로써 참석한 첫 어전회의에서 혜종을 보고 “그 말투며 태도며 실로 경복하기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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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황후가 가장 보수적인 황실에서 여성의 사회 생활은 엄격히 금지되며 단순히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요구받으며 황후가 했던 단순한 행동<ref>외국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함 그 자체인 인터뷰 등이 오만한 것으로 지적받기까지 할 정도였다.</ref>까지 지적 받고 많은 황실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자 "한번만 더 황후를 욕보이면 대역죄로 단죄하겠다"며 황후를 몸소 보호했다.  
*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황후가 가장 보수적인 황실에서 여성의 사회 생활은 엄격히 금지되며 단순히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요구받으며 황후가 했던 단순한 행동<ref>외국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함 그 자체인 인터뷰 등이 오만한 것으로 지적받기까지 할 정도였다.</ref>까지 지적 받고 많은 황실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자 "한번만 더 황후를 욕보이면 대역죄로 단죄하겠다"며 황후를 몸소 보호했다.  


* 자식들과 손주들에게도 좋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다. 열조의 장남인 [[연조 덕황제 이숭|인영태자]]의 성격은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게 온화했고 착했다고 하는데 그런 아들의 성격을 질책하기보다는 아들의 성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었다. 손자인 이연이 인영태자를 닮아 착하고 똑부러지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으며, 이연이 한성제국대학 대신 돈명대학에 진학하자 이를 존중하며 이연을 감쌌다.
* 자식들과 손주들에게도 좋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다. 열조의 장남인 [[연조 덕황제 이숭|인영태자]]의 성격은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게 온화했고 착했다고 하는데 그런 아들의 성격을 질책하기보다는 아들의 성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었다. 손자인 이연이 인영태자를 닮아 착하고 똑부러지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으며, 이연이 강학원대학 대신 돈명대학에 진학하자 이를 존중하며 이연을 감쌌다.


* 9.18 사건을 통해 황위에 올랐지만 아들을 잃는 불행을 당했다. 인영태자가 29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요절하자 열조는 국사도 제치고 황실병원에 무작정 달려가 한참을 오열했고 너무 슬퍼서 끼니를 거르자 대신들과 주치의들이 겨우 뜯어말렸다. 열조는 태자의 요절을 매우 비통해하며 직접 글을 지어 태자를 애도했다. 또한 며느리가 되는 인영태자의 비인 순의덕황후 한씨를 안타깝게 여겨 남편을 일찍 여읜 한씨에게 궁궐에 머무르게 했고, 며느리가 착하고 효성이 깊다고 자주 칭찬했다. 그리고 훗날 손자 이연이 태자가 되자 본인이 직접 주도하여 인영태자를 연조 덕황제(衍祖 德皇帝)로 추존하고 장명승덕태흠이인돈역(章明勝德太欽彛仁敦易)이라는 시호를 내려 태자를 위로했다.
* 9.18 사건을 통해 황위에 올랐지만 아들을 잃는 불행을 당했다. 인영태자가 29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요절하자 열조는 국사도 제치고 황실병원에 무작정 달려가 한참을 오열했고 너무 슬퍼서 끼니를 거르자 대신들과 주치의들이 겨우 뜯어말렸다. 열조는 태자의 요절을 매우 비통해하며 직접 글을 지어 태자를 애도했다. 또한 며느리가 되는 인영태자의 비인 순의덕황후 한씨를 안타깝게 여겨 남편을 일찍 여읜 한씨에게 궁궐에 머무르게 했고, 며느리가 착하고 효성이 깊다고 자주 칭찬했다. 그리고 훗날 손자 이연이 태자가 되자 본인이 직접 주도하여 인영태자를 연조 덕황제(衍祖 德皇帝)로 추존하고 장명승덕태흠이인돈효(章明勝德太欽彛仁敦孝)라는 시호를 내려 태자를 위로했다.


* 군 시절부터 황실의 고루한 관습에 불만이 많았고, 즉위 이후 황실의 관습을 현대적으로 개량하거나 철폐하였다. 직접 황족들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실에 적응하지 못하던 황후를 위해 황실의 악폐습을 과감하게 철폐하여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황족을 대표하여 강은군이 반대하자 격분하여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렸다고 열조실록에 적혀있다.
* 군 시절부터 황실의 고루한 관습에 불만이 많았고, 즉위 이후 황실의 관습을 현대적으로 개량하거나 철폐하였다. 직접 황족들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실에 적응하지 못하던 황후를 위해 황실의 악폐습을 과감하게 철폐하여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황족을 대표하여 강은군이 반대하자 격분하여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렸다고 열조실록에 적혀있다.

2024년 3월 27일 (수) 04:38 판

[ 소개 ]
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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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5대 황제
열조 성황제 | 烈祖 聖皇帝
이름 이면(李矏)
안천(安天)
출생 1938년 1월 19일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붕어 2016년 4월 13일
황성 한성부 덕수궁 석조전 (향년 77세)
즉위 1972년 11월 27일
황성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속
1972년 9월 19일 ~ 1972년 11월 27일
대한제국 제5대 황제
1972년 11월 27일 ~ 2013년 11월 27일
대한제국 태상황
2013년 11월 27일 ~ 2016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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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친부 승경대원왕, 친모 단온대원비

양부 창순군, 양모 창순군부인
형제자매 2남 1녀 중 차남
황후 현인성황후
자녀 장녀 강효공주
장남 연조 덕황제
차남 강친왕
학력 강학원 유치원 (수료)
강학원 초등과 (졸업)
강학원 중등과 (졸업)
강학원 고등과 (졸업)
한성제국대학 법학부 (법학 / 문학사)
종교 유교 (성리학) → 불교
신장 178cm
봉호 한경군(漢景君)
묘호 숙조(肅祖) → 열조(烈祖)
존호 선덕수공이민온은장우태고철용어위
(宣德修恭夷敏溫隱莊友太高哲勇御魏)
확렬정례열각도량무공양류예결성막
(確烈掉禮易恪掉良武共襄類譽潔成幕)
흠절신목대통청흥태고광무신성요순소열
(欽節神穆戴通淸興太高光武神聖堯舜昭烈)
시호 성현사덕기상신효성황제
(聖商思德祈商神孝聖皇帝)[1]
연호 성녕(成寧, 1973~2013)
계급 대한제국군 육해공군 대원수

개요

열조 성황제 이면(烈祖 聖皇帝 李矏)은 대한제국의 제5대 황제이며 승경선절대원왕의 차남이다.

9.18 사건을 계기로 즉위하여

생애

유년기

1938년(희승 18년) 1월 19일, 승경군과 단온부대부인 유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8년 4월 17일 창순군 이재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창순군이 죽은 이튿날에 양자로 입적하여 한경군(漢景君)에 봉해졌다.

열조는 유년기부터 남다른 리더십과 능력를 보였다. 유치원에서는 혜종이 있는 경복궁을 향해 궁성요배를 주도하기도 했고, 강학원 중등과에서는 무리를 이끌고 패싸움을 벌여 세간의 이슈가 되기도 했다. 강학원 고등과에서는 학생들을 이끌고 고등과의 악습을 뿌리뿝고, 교내의 수구적인 교칙을 고치기 위해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황실의 골칫덩이가 되기도 했다.

전후 최초의 황족 관료

열조는 관례적으로 황족들이 무조건 진학하는 강학원대학 대신, 대한제국 최고의 대학인 한성제국대학의 정점인 법학과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법학과 합격 이후에도 열조는 파격적인 길을 걸었다. 종친사환금지법[2]의 제약을 받지 않는 군관이 되는 대신, 종친사환금지법의 제한을 받는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달라 청하여 또 한번 장안의 화재가 된다. 당시 황실에서는 한경군의 행동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으나 혜종의 윤허를 받아 한성제국대학 재학 시절인 22살의 나이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열조는 고시 합격자들의 선망인 경찰청 커리어에 지원하여 최우선적으로 선발되었고, 경시청 고등경찰과[3]의 특별고등경찰로 임용되어 정보계통 분야에서 주로 근무했다. 경찰 시절 숙조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근황주의자로써 비 제도권 극우, 극좌 세력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혜종의 총애를 받아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1965년부터는 고등경찰과의 수장인 고등경찰과장으로 임명되어 경찰의 정보계통을 장악했으며, 1968년에는 경찰을 떠나 귀족원의 황족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정계 입문 이후에는 황실의 개혁과 자유권의 확대를 외치며 귀족원의 보수파와 대립했으며, 귀족원의 리버럴 파벌의 중진이 되었다. 이후 1970년에는 혜종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정보를 총괄하는 정보대의 수장인 정보사가 되었다.

9.18 사건과 즉위

정보사 재임 시절 열조는 9.18 총격 사건을 통해 조카 뻘 나이의 6촌 친척인 소황제를 압박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4] 이후 열조는 대신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황속[5]에 봉해졌고,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다시금 승경대원왕의 아들로 입적 되었다.[6][7] 3개월 후 두려움에 떨던 소황제가 자신이 앓고 있던 병을 명분으로 황속에게 양위 하였고, 황속이었던 이면이 연호를 성녕(咸寧)으로 하여 대한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재위 초기

즉위 초의 모습

열조는 즉위 이후 기존의 기득권을 견제하기 위해 황제 중심의 정치를 강화하고 함흥부와 전주부를 각각 상경 함흥부, 남경 전주부로 승격시켰다. 또한 3S정책과 범죄와의 전쟁 선포를 통해 민심을 얻었고, 나토를 모티브로 동북아시아의 친미 국가들의 군사동맹기구인 NEATO[8]를 창설하고, ECSC와 코메콘을 모방한 아세아경제발전공동체(AEDC)를 창설하여 대한제국을 동아시아의 안보와 경제의 중심으로 성장시켰다.

재위 중반

즉위 중반의 모습

재위 말기

퇴위와 태상황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

열조는 고령을 이유로 2013년 손자 이연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황으로 물러났다. 이는 대한의 황제들 중 유일하게 자의로 퇴위한 황제[9]이기도 한데 열조가 존경하는 증조부 성조의 43년 치세라는 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2013년 정확하게 재위 41년만에 퇴위하여 상황(上皇)이 되었고, 태손 이연이 다음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식 당시 태손인 이연이 아직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태손의 계급인 원수 계급장[10]이 부착된 제복을 착용했는데, 열조가 자신이 입은 제복의 대원수 견장을 손수 떼어 태손의 견장 자리에 달아주고 자신이 쓰던 원수봉을 태손의 손에 들려준 후에 "황상, 이 대한을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절하니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과 장성이 열조의 손주 사랑에 감동하였지만, 이연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체통을 지키기 위해 울음을 꾹 참는 모습이 생중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열조는 이연이 황제가 된 이후로도 군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었고 일부 분야에 대해서도 대리청정을 하였다. 또한 열조는 중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적극적으로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네아토 구성국과의 결속을 위해 여러번 순방을 다니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또한 즉위 1개월 뒤 이연은 상황이라는 칭호로는 열조의 공적을 기릴 수 없다며 태상황으로 격상시켰다. 이렇게 열조는 태상황이 되어서도 대한제국의 안정과 손자 이연의 황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계절에 따라 황성과 서경, 남경과 동경을 오가며 당구와 사냥을 즐기는 등 즐겁게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이연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순방 도중 일본의 내대신 도쿠가와 이에히로가 이연을 극찬하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

붕어

이렇듯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퇴위 2년차부터 갑자기 몸이 안좋아지더니 퇴위 3년 만인 2016년 4월 27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붕어했다. 사후 묘호는 시법에서 강직하고 덕스러워 앞으로 나감을 일컫는 '숙(肅)'에다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군주라는 이유에서 조(祖)를 붙여 숙조(肅祖)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나, 황제인 이연이 이에 불만을 가지고 묘호인 숙조가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며 열조(烈祖)를 제안했다.

대신들은 과거 인묘의 묘호를 정할 때 남당의 왕 서지고가 열조라는 묘호를 사용하여 국운(國運)을 재촉했기 때문에 인조의 묘호를 열조가 아닌 인조로 결정하였다는 전례를 들었으나, 이연은 “계한 소열황제의 묘호도 열조였소. 고금의 전례를 볼때 소열황제처럼 성군에게 합당한 묘호가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남당의 서지고와 같은 자들에게 어울리지 않은 묘호가 붙은 전례도 있소. 그런다고 해서 서지고가 열조라는 묘호를 썼다 하여 소열황제의 공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하물며 대행께서 쌓아올리신 찬란한 공적은 소열황제 뿐만 아니라 옛 문왕과 무왕에 비해서도 비해서도 비해서도 뒤지지 않소.“라며 숙조의 묘호를 열조로 교체하는데 성공한다.

"열조"는 시법(詩法)에서 모두 3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연이 해석한 것은 "덕(德)을 지켜 업(業)을 높였다"이다. 계한 소열황제의 사례를 봤을 때 열조란 묘호가 대행 황제의 공덕(恭德)에 부합된다고 적었다. 여기서 유비가 한나라의 명맥을 이은 '계한'의 창시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소열황제가 한을 이은 계한의 창건자이자 중시조로 대우받은 것 처럼 이연은 황실 직계와 6촌이라는 머나먼 방계 출신의 열조의 후손들이 황위를 이어 받는 이 상황이 마치 인조 이후 인조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인조가 조선의 중시조로 대우 받을 것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계한 소열황제의 묘호인 열조를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열조 또한 소열황제처럼 조선 왕조의 정당한 계승자로 대우 받을 것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여담

  • 외모가 준수하고 유머 감각과 언변이 좋으며 사교성이 활발하여 유년기부터 황실의 아이돌로 불렸고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재학 시절 고등문관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명실상부한 황실의 스타로 거듭났었다. 이러한 인기에 걸맞게 강학원대학 재학 시절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받았으나 오직 훗날의 황후인 최씨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재학 시절부터 열조와 순의덕황후는 대학을 대표하는 컴퍼스 커플로 유명했고 금슬이 좋았다.
  • 최초로 평민과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최초의 황족이다. 이에 혜종과 황족들이 이를 윤허하지 않자 "지희[11]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이에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고 현인성황후는 주변의 엄청난 직ㆍ간접적 압력에 부담을 느껴 열조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에 한경군은 손을 붙잡고 "내 일생을 널 지키는데 쓰겠다"라며 청혼했다. 마침 강학원대학을 취재하던 KBS가 이를 촬영하여 그날 저녁 뉴스에 대서특필 되었다.[12] 결국 당시 한경군의 고집에 혜종이 결혼을 윤허하였다. 이러한 결혼 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은 젊은 미남 황족과 아름다운 평민 여성이 우연히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다.
  • 열조가 즉위 이후 혜종의 은혜를 기리는 발언을 수시로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열조와 혜종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혜종은 열조의 자유분방함을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여기며 총애했고, 황실 내의 반대 여론에도 열조를 종친사환금지법의 예외로 인정하여 열조가 권력에 다가서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열조 또한 혜종을 몹시 따르며 '강녕전께서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교태전과 경근당에는 냉담함만이 있다'라고 발언하거나 정보사로써 참석한 첫 어전회의에서 혜종을 보고 “그 말투며 태도며 실로 경복하기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 앞서 '강녕전께서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교태전과 경근당에는 냉담함만이 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당시 황후였던 경신순황후와 황실의 대다수 종친들과의 관계는 냉담했다. 보수적인 황실의 이단아였던 열조와 폐습에 찌든 황족들과 종친들과의 관계는 당연히 좋지 않았고, 심지어는 방계 종친들과 주먹다짐까지 벌여 열조가 이들을 전부 때려눕히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열조를 감싼이들은 삼촌뻘인 환명군과 형 예친왕이 전부였다. 하지만 열조가 황위에 오르자 상황이 역전되어 경신순황후는 평생을 별궁에 갇혀지냈고, 황족들의 특권과 재산은 열조에 의해 엄청나게 축소되었다.
  • 대단한 애처가였다. 현인성황후와 금실이 매우 좋았고 여색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하길 원하던 황실의 관례를 깨고 외출 할 때도 항상 황후와 대동했고 국정에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현인성황후의 정치적 식견도 훌륭해서 어전회의에서 황후의 의견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애처가를 넘어서 후궁 제도에 매우 부정적이라 즉위 이후 친히 후궁 제도를 아에 폐지하기도 했다.
  •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황후가 가장 보수적인 황실에서 여성의 사회 생활은 엄격히 금지되며 단순히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요구받으며 황후가 했던 단순한 행동[13]까지 지적 받고 많은 황실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자 "한번만 더 황후를 욕보이면 대역죄로 단죄하겠다"며 황후를 몸소 보호했다.
  • 자식들과 손주들에게도 좋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다. 열조의 장남인 인영태자의 성격은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게 온화했고 착했다고 하는데 그런 아들의 성격을 질책하기보다는 아들의 성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었다. 손자인 이연이 인영태자를 닮아 착하고 똑부러지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으며, 이연이 강학원대학 대신 돈명대학에 진학하자 이를 존중하며 이연을 감쌌다.
  • 9.18 사건을 통해 황위에 올랐지만 아들을 잃는 불행을 당했다. 인영태자가 29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요절하자 열조는 국사도 제치고 황실병원에 무작정 달려가 한참을 오열했고 너무 슬퍼서 끼니를 거르자 대신들과 주치의들이 겨우 뜯어말렸다. 열조는 태자의 요절을 매우 비통해하며 직접 글을 지어 태자를 애도했다. 또한 며느리가 되는 인영태자의 비인 순의덕황후 한씨를 안타깝게 여겨 남편을 일찍 여읜 한씨에게 궁궐에 머무르게 했고, 며느리가 착하고 효성이 깊다고 자주 칭찬했다. 그리고 훗날 손자 이연이 태자가 되자 본인이 직접 주도하여 인영태자를 연조 덕황제(衍祖 德皇帝)로 추존하고 장명승덕태흠이인돈효(章明勝德太欽彛仁敦孝)라는 시호를 내려 태자를 위로했다.
  • 군 시절부터 황실의 고루한 관습에 불만이 많았고, 즉위 이후 황실의 관습을 현대적으로 개량하거나 철폐하였다. 직접 황족들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실에 적응하지 못하던 황후를 위해 황실의 악폐습을 과감하게 철폐하여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황족을 대표하여 강은군이 반대하자 격분하여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렸다고 열조실록에 적혀있다.
  • 즉위 초기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30대에 흰머리가 되었다. 본래도 부친인 승경대원왕의 유전으로 새치가 많았고 30대가 넘어가자 아에 머리카락이 전부 흰머리가 되었다. 이로 인해 자신도 흰 머리를 여러 번 흑발로 염색했지만 흰머리가 너무 빨리 자라기도 하고 황후가 흰머리를 좋아해 황위에 오른 이후 염색을 포기했다. 그러나 70대가 넘어 흑발이 나자 신이 나서 대신들을 접견 할 때 이를 여러 번 자랑하기도 했다.
  • 엄청난 애연가였다고 한다. 공식 석상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은 당시 사진이나 방송영상에서 꽤 많이 보여왔고, 9.18 사건의 그날에는 사령부를 차린 을2호벙커 안에서 줄담배를 피울 정도였다. 당시 전매청(현 KT&G)에서 열조가 피는 담배는 최고급 연초만을 엄선해서 납품했다고 한다. 처음 담배를 피울때는 형 예친왕의 화랑 담배를 몰래 가져다 피웠고, 1958년부터는 아리랑을, 1969년부터는 당시 최초의 고급 담배였던 청자를 피웠고, 1982년 이후로는 장미를 피웠지만 2001년 인영태자가 훙서한 이후 나이도 많고 해서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다.
  • 유교 국가인 대한제국에서 불교를 믿은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군주이다. 재위 말기 인영태자가 요절한 뒤 실의에 빠진 열조와 현인성황후는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명복을 빌었다. 그러다 아내 현인성황후마저 죽으면서 생애 종반에는 아예 불교로 개종했다. 대한제국의 국시는 성리학이었지만 열조의 권위가 하늘을 찔렀으며 대한제국에서 신도가 제일 많은 종교가 불교이기에 호의적인 반응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고 한다. 다만 소수의 유학자들의 반발이 존재했지만, 그런 소수의 부류는 폐하를 비판했다며 극우파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가계

어록

내 일생을 널 지키는데 쓰겠다.
훗날의 현인성황후에게 청혼하며
이 개새끼들아! 세상이 안 무섭지? 너희가 망하는 것 똑똑히 볼 거야, 내가!
종친들의 전횡에 항의하며 종친들을 때려눕히면서, 이후 열조가 집권하자 이때 열조와 주먹다짐을 벌인 종친들은 응보의 단죄를 받게 된다.
성즉군왕 패즉역적(成則君王敗則逆賊)이라 했습니다.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 아니겠습니까?
9.18 사건을 계획하며
짐은 이 대한을 고쳐 종사의 만년 대계를 꾀하겠소. 폐습을 고치고 타국의 좋은 제도를 받아들이겠소. 이로써 황제가 황제의 책무를 다하고 대신이 대신의 책무를 다하여 억조창생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겠소. 이곳이 바로 짐이 바라는 대한의 모습이오. 그리고 만약, 이 과업을 완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엄히 다스릴 것이오. 이를 가슴에 새기고, 잘 따라주길 바라오.
즉위칙서를 반포한 후 열조의 선언
우리는 자유 민주 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 민주 제도처럼 취약한 제도도 또한 없는 것이다.
신 헌법 공포에 관한 칙유 中 (1973.10.17.)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하오. 오늘 나와 경이 그리고 만백성이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후손 앞에 물려주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하고자 하는 것이오.
한성제국대학 총장에게 보내는 친서 中 (1976.3.16.)
이 새끼 너 건방져!
황실의 악폐습을 철폐하려 하던 당시 돈녕원경이던 강은군의 반대에 재떨이를 강은군에게 던지며.
역사적 사실과 유적은 영광스러운 것이든 굴욕적인 것이든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사민들은 영광스러운 사적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얻고, 굴욕적인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유적은 어떤 것이든 소멸시켜서는 안 된다. 사민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도록 병자호란 때 인묘께서 청장(淸將)에게 항복했던 장소인 삼전도를 훌륭하게 복원하라.
1981년 4월 삼전도비 일대 재정비를 지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농민들이다.
삼남순행중 남경 전주부 인근의 농지를 시찰하며
우리 일본대사[14] 어디 갔어? 일본대사 축배 안 드나?
1981년 서경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고 경복궁 태극전에서 열린 환영만찬회 축사를 하며
토지가 백성이라면, 황제란 비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종자(種子)는 만백성의 이상이다.
1988년 신년사
나는 물론 인간인 이상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소. 그러나 나는 당대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후세 사가(史家)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해 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도 다른 나라 부럽지 않게 당당하게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난 일이 없네.
생전 퇴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과의 환담 中 (2013년 봄)
황상, 이 대한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연의 즉위식에서 자신의 대원수 견장과 원수봉을 태손의 손에 쥐어준 후 절하며
연이가 문왕과 무왕처럼 똑부러지고 잘하는데 내가 뭘 걱정하고 아쉬해
이연의 나이가 어려 우려하는 순정군에게 이연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만족해하며
잘 해가라. 그럼 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이연에게 남긴 마지막

대중 매체에서

  • 1984년 MBC 드라마 《대한왕조 육백년》 - 대원군에서는 배우 이정길이 연기했다.
  • 2019년 KBS 드라마 《열조대제》 에서는 배우 000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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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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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전한 시호는 열조선덕수공이민온은장우태고철용어위확렬정례열각도량무공양류예결성막흠절신목대통청흥태고광무신성요순소열성현사덕기상신효성황제(烈祖宣德修恭夷敏溫隱莊友太高哲勇御魏確烈掉禮易恪掉良武共襄類譽潔成幕欽節神穆戴通淸興太高光武神聖堯舜昭烈聖商思德祈商神孝聖皇帝)이다.
  2. 이 법은 경조 시대 사라진 법이었으나, 한소전쟁 이후 환친왕의 의지로 부활하였다. 옛 법에서는 5촌 이내의 종친의 정치, 관직 참여를 금하는 법이었지만 신 종친사환금지법은 환친왕의 강력한 의지로, 8촌 이내의 종친의 관직 진출 범위를 황족회의 위원과 추밀고문, 귀족원 황실의원, 그외의 명예직과 무관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 제한한 법이었지만 1975년 열조의 즉위 이후 폐지된다.
  3. 열조 즉위 이후 개편되어 일부는 내부 공안조사청으로 분리되었고, 다른 부분은 경시청 공안과로 분리되었다.
  4. 현재까지도 황실과 대한제국 정부는 9.18 총격 사건이 제경군과 연관된 정치자금 수사를 위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충돌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외에서는 당시 황실 여론상 황위 계승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던 열조가 9월 19일에 공포하기로한 (사실상 제경군으로 결정된) 황속(皇續) 책봉 공포를 무산시키고 황위를 차지할 목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제경군과 경신순황후등 자신과 정적 관계에 있었던 반대파들을 제거한 뒤 소황제를 반강제로 퇴위시킨 일종의 친위 쿠데타로 간주한다.
  5. 황속(皇續)은 황실예전에 따른 황위 계승자를 뜻하는 칭호이다.
  6. 본래 열조는 창순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황속으로써 황위를 계승할 경우 향렬과 촌수 문제가 열조의 발목을 잡았다. 사실 열조는 국가와 군대를 완벽하게 장악했기에 이러한 문제를 무시해도 그만 이었지만 사실상 황위 찬탈의 형식으로 황위를 계승하였기에 정통성에 민감했고, 이러한 재 입적까지 단행한 것 이었다.
  7. 이에 따라 은언궁가의 봉사손으로는 숙부인 (이광과 열조는 1살 터울로 유년기부터 사실상 형제처럼 지내 친분이 돈독했다.) 이광이 낙점되었고, 창순군의 아들로 이광이 입적되어 이광의 후손들이 은언궁가를 계승하고 있다.
  8. 공식 명칭은 동북아시아 조약 기구, (Nor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로 영어 발음은 네아토가 된다.
  9. 생전 퇴위한 황제는 소황제와 열조가 있지만, 소황제가 사실상 반강제로 퇴위한 점을 감안하면 자의로 퇴위한 황제는 숙조가 유일하다.
  10. 원래 태손의 계급은 현역 무관이 올라갈 수 있는 계급인 부원수이지만, 이연이 16세가 되던 해 열조에 의해 이연이 원수로 진급하였기에 태손의 계급도 원수가 되었다.
  11. 현인성황후의 휘
  12. 이 당시 황실은 KBS가 황족의 사생활을 유출했다며 격분했지만, 한경군의 간곡한 설득을 받은 혜종이 선처를 베풀었다.
  13. 외국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함 그 자체인 인터뷰 등이 오만한 것으로 지적받기까지 할 정도였다.
  14. 당시 주한일본대사는 마에다 토시카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