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 장황제 이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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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5일 (목) 12:09 판

[ 소개 ]
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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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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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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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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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제26대
경조 고조
위패 존령 · 선원선계 · 왕세자 · 대군주 · 왕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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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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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조 장황제 | 高祖 章皇帝
이름 이엽(李㒯)
출생 1860년 12월 21일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
(現 황성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
붕어 1919년 9월 26일 (향년 58세)
황성 한성부 경복궁 태극전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862년 1월 9일 ~ 1873년 10월 30일
조선 제26대 대왕
1873년 10월 30일 ~ 1895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초대 황제
1895년 5월 14일 ~ 1919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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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황 경조 명황제 이희, 모후 철순명황후 임씨
형제자매 외아들
황후 정후 원순장황후
계후 원명장황후
자녀 외아들 열종 인황제 이청
학력 강학원 (졸업)
동궁시강어문소(東宮侍講御問所) (수료)
병역 대한제국군 육해공군 대원수
종교 유교 (성리학)
아명 재성(載星)
만강(晩岡)
묘호 고조(高祖)
존호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
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
(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
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
(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
시호 문헌무태인익정효장황제
(文憲武太仁翼貞文章皇帝)[1]
연호 연수(延壽, 1895~1919)

개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휘는 엽(㒯)이며, 연호는 연수(延壽),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장황제(章皇帝)이다.

14세(만 12세)에 보위에 올라 59세(만 58세)의 나이에 붕어하기까지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며 특히 전쟁에 대해서는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여 한국의 강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고조가 즉위할 당시 극동의 변방에 불과했던 조선은 고조의 치세를 거치면서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동아를 대표하는 열강인 대한제국으로 변모했다.

고조의 치세는 부국강병과 동시의 제도와 문화의 서구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고조는 조선의 전제군주로써 대한제국을 통치했지만 전제군주제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여 황제를 보조하며 견제할 기관으로 내각과 제국의회[2], 헌법, 서구식 정당 정치를 도입했으며, 경조의 치세부터 서서히 진행되던 궁중의 서구화는 고조때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루었다.

'연수'(然淑)라는 연호는 고조가 황제로 재위했을 때 사용한 연호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군(聖君)으로 꼽힌다. 한국사에서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복자이자, 한국사에서 증손자인 고조와 함께 유일하게 대제라는 칭호를 붙여 부르는 군주이며, 아예 고조대제(大帝), 연수대제, 연수성제(聖帝)라고도 부른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

1860년(경조 11년) 12월 21일, 경조와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만 12세) 때인 1873년(경조 24년) 9월에 아버지 경조를 잃었다. 아명은 '재성(載星)'이었다.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피휘를 위해 '엽(㒯)'으로 개명했다.

고조는 어릴 적부터 이미 될성부른 떡잎을 보였다. 한번 잡은 책은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이는 고조는 암송할 때까지 책을 지독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습관 덕에 고조는 단군 이래 최고의 독서광으로 널리 알려져, 10살의 나이에 경조의 앞에서 경서를 비롯하여 경조 시대부터 유입된 서양 서적과 군사서적까지 방대한 분야의 책을 달달 외워 경조가 신하들에게 고조를 자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특히 고조는 서양의 역사책 탐독을 좋아했는데 특히 아라사의 표토르 대제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에 깊이 매료되었고, 전쟁사의 탐독에 굉장한 흥미를 보이며 군사교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렇게만 보면 고조 또한 전형적인 선비처럼 보이지만,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를 익히는데 열중하였다. 단순히 익히는데 그치지 않고 실력 또한 매우 유능하였다고 하며 정조와 더불어 지덕체를 모두 갖춘 황제라고 한다.

즉위와 어일신

아버지 경조의 이른 사망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는데 당시 모후인 철순명황후와 조모인 조대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고조는 즉위하자마자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 왕조에서 숙종의 친정과 함께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정통성을 떠나, 고조의 총명함과 결단력이 왕가의 어른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모두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조는 즉위 교서에서부터 변함없는 경장을 선포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1873년, 고조는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단발령(斷髮令)을 반포하고 관복을 서양식 제복으로 교체한다. 그러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당대의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이 이어지고 지방에서는 단발에 호응하지 않자, 고조는 격분하여 군수삭발령이라는 새로운 규정을 공포하고 반발하는 선비들을 보부상을 동원하여 진압하는등 우악스럽게 단발령을 관철시키고 만다.

단발령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고조 즉위 초기 사회, 군사, 중앙행정기관의 개편과 함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1부6조제를 택한 조선의 행정관제를 개혁하여 고조가 3성 6부를 부활 시킨 이후 1874년 초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의 육상(六象)에 따라 직제를 나누었던 상서성의 6부를 개편하여 우리가 흔히 아는 이호예병형공 형태로 원복한 직후, 병부를 육군부와 해군부로 나누었다. 이후 1875년에는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 대내사성으로 개편하여 최종적으로 2성 7부의 형태로 정착시키는 행정개혁과, 독일 군사고문단 초빙, 프로이센식 내각 체제 도입,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양반중 일부를 공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새롭게 공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궁내부의 지배 아래로 두어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등이 있다. 다만, 이런 개혁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양반들과 농민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때문에 고조는 이를 막기 위해 기존의 포도청을 런던경시청을 모티브로 개편하며, 포도청에서 경시청으로 개칭하였다. 이들 경시청의 경찰관과 조선 팔도를 누비며 남다른 정보력을 갖춘 보부상들은 양반들과 농민들의 불만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이들의 활약 덕에 대한은 개화에 한발짝 더 진전하게 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이루어진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신시대 '연수'의 분위기가 양성되었다.

고조와 조정의 최대 목표는 구미 열강을 따라 잡는 것이기 때문에, 경조 시대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이 급선무로 여겨졌다. 그 때문에, 우선 국내정책의 측면에서 국민들이 가진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제거하기 위해 외국인에 대한 공격을 법령으로 금지시키고, 만국공법을 수용하였으며 외국인이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치, 유럽화 정책 등여러 정책을 시도했지만, 조약 개정 자체는 반세기에 미치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청과의 갈등

1884년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며 다시 한 번 청나라의 취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아라사, 불란서서, 미국 등이 중국과 그 주변의 나라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도 호시탐탐 청나라를 노리게 된다.

1888년 1월 1일을 기해 고조는 기존의 제후국 예법을 버린다. 이때 국왕의 명칭은 바꾸지 않았으나, 예법을 황제와 걸맞게[3] 바꾸었고 7월에는 동아시아 최초의 헌법인 대조선흠정헌법대강을 반포한다. [4] 이 헌법에서는 청나라의 연호인 광서가 아닌 개국기원 연호를 사용하여 청나라를 자극했다. 청나라는 격분하여 조선 내각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조선도 이에 항의하며 양국의 관계과 악화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상무위원(사실상 공사)으로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시도하나, 조선에서의 간첩행위로 적발되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추방되고 양국간의 관계는 병자호란 이래 최악을 맞이한다.

이렇듯 악화일로를 걷던 양국에 한 가지 폭탄이 떨어지게 된다. 1892년부터 청나라가 간도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에 대한 강경책을 펼치자 이에 저항하던 조선인들을 무참히 탄압하는 간도참변이 발생한다. 간도참변이 진행되던 1894년 조선 육군 1사단 2여단이 독단적으로 국경을 월경하여 길림장군 휘하의 청군을 궤멸시키고 간도의 정착촌을 해방시켰다.[5] 이른바 간도출병이었다. 고조는 간도출병으로 청나라의 군사력이 강하지 않고, 보불전쟁처럼 단기 결전으로는 할만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굳혔고, 강경 노선을 천명한다. 이에 청나라는 격분하여 책임자의 주살과 사죄사의 파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개정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만국공법에 따른 정당한 주권 행사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결국 청나라는 조선과 국왕인 고조의 죄상이 자명하다며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했고, 조선은 이에 맞서 국교를 단절하고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는 한편 자주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조선군과 청군과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에 조선군이 풍도 앞바다의 청나라 함대를 기습 공격하며 본격적인 전쟁으로 이어졌다.

한편 1894년 조선의 외무 대신 김옥균과 주청 전권 공사 유길준 등은 청과의 개전을 위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동시에 병력을 증원하였다. 이에 청나라도 위여귀가 이끄는 성군 6,000명과 마옥곤의 의군 2,000명을 국경에 각각 진출시켰다. 영국은 청나라의 부탁을 받기는 했으나 비밀 조약을 맺고 전쟁이 양쯔강 유역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약속받았다.

한청전쟁

7월 25일 황해 아산만 부근 풍도(현재 행정구역 상 경기도 단원구 풍도동)에서 조선 해군이 청 해군을 기습 선제공격한다. 이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7월 28일에는 국경에서 대기 중인 청군 3,500명을 조선 육군 4,000명이 공격하여 청군은 500명이 전사하고 묵던으로 퇴각하였다. 8월 1일에야 양국은 동시에 선전포고했으며 곧이어 묵던에서 격돌했다.

묵던에서의 격돌 이후 양국 해군은 황해에서 맞붙었고, 조선군은 황해 전투를 당당히 승리했다. 이후 북양함대가 위해위에 틀어박히면서 조선은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어지는 위해위 전투에서 북양함대를 궤멸시키는 데에 성공하면서 황해 해전은 조선군은 대승이 되었다. 이렇게 청군은 조선군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제1군은 의주,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단둥으로 진격해 요동 반도에 교두보를 구축했고, 한규설의 제2군은 화위안커우에 상륙하여 진저우, 다롄을 공격했고, 다시 여순(뤼순)을 점령했다. 뒤이어 개평과 잉커우까지 조선군이 점령하면서 요동 반도는 완전히 제압당했고, 조선군은 선양의 선양고궁을 점령하였다. 당시 고조와 군 수뇌부는 선양을 방문해 인묘와 효묘께 제사를 지내며 260여년만에 북벌을 완수함을 고했다.

청나라는 상군을 투입하였으나 전세는 기울어 상군도 패했고 결국 주화파 공친왕 혁흔이 총리가 되면서 화친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강화 협상을 진행하여 4월 17일 전문(全文) 11개 조항의 강화 조약, 각 3조항의 의정서(議政書) 및 별약(別約), 2조항의 추가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이 바로 제물포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하던 입장을 포기하고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했다. 또한 요동 반도, 간도, 대만과 그 부속 도서, 펑후 제도를 할양하였고 고평은 2억 냥을 7년 이내에 배상하기로 했다. 이를 당시 조선 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원으로 조선 정부 4년치 세입이다. 이 조약으로 조선 또한 서구 열강과 같은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아라사의 재무 장관 비테는 조선이 요동 반도를 점령하는 것은 아라사의 이익에 해를 끼치며 극동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불란서, 독일와 연합하여 조선에 삼국간섭을 벌이며 압력을 가했다. 당황한 조선은 영국과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반응이 없자 결국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그래도 요동 반도를 돌려주는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하이난도 할양을 요구하려다 너무 멀어서 대신 은 3천만 냥을 추가로 뜯어냈다. 그리고 아라사, 불란서, 독일는 요동 반도 반환에 대한 대가로 각종 이권을 차지하였다.

칭제건원

한청전쟁의 승리 이후 전국적으로 자주 여론과 칭제건원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었다. 이에 고조는 1895년 4월 말엽, 원수부가 설치되었던 평양 풍경궁에서 경복궁으로 환궁하였다. 또한 고조는 환궁 후 5월 14일에 정식으로 국호를 황제의 국가를 뜻하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연수(延壽)으로 고치며 원구단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독립된 자주국가임을 공식 선포하였다.

이때 고조는 제국의 예법에 걸맞게 4대조를 추존하고 왕실을 황실로 격상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대한의 사민들이 존경하는 정조 선황제의 본래 묘호도 정종이었으나, 고조에 의해 정조로 추존된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제후국 예법을 황제국에 걸맞게 변겅하는 과정에서 각종 난관에 봉착한다. 조선이 따르고자 했던 주명의 예법은 이미 200년 전에 명이 멸망했기에 고조와 대신들은 역대 중국 왕조의 예법과 대한역사속의 독자적 예법을 결합하여 정리하고 이를 서구식 법률 체계로 공식화한 황실예전을 공포하여 황실의 예법을 재정비한다.

권비(拳匪)의 난

청나라는 아편전쟁의 패배와 연이은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동치 연간의 양무운동의 전개로 이러한 내리막길은 일시적으로 저지되었으나 한청전쟁에서 대한제국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어 다시 몰락을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세력이 바로 권비(의화단)였다. 이들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세우면서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와 공사관에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이에 서구열강은 청 조정에 권비의 진압을 요청했다. 그러나 청 조정은 이들을 진압할 여력조차 없었으며, 단군왕 등 일부 황족 세력은 오히려 이들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결국 청나라의 태도와 권비의 만행을 보다못한 열강들은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권비를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군을 동원해 이들이 북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청의 조정에서는 회의 끝에 서양과 강화하자는 광서제의 의견을 묵살하고 서태후가 권비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청나라 조정은 1900년 6월 21일 서양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광서제는 북경에 있는 외국인 지역을 포위한 후 이미 권비의 대규모 무장폭동이 일어난 텐진에서 안전을 위해 24시간 이내에 떠나라고 권고했다. 이때 독일 제국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와 대한제국 공사관의 조중응 서기도 권비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에 열강은 연합군을 편성, 북경으로 진격했다. 이때 고조는 일부만 차지한 만주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였다. 마찬가지로 아라사도 만주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는 등 세력 확장의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영국 등 다른 열강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특히 아라사에 팽창에 맞서 '그레이트 게임'을 치르던 영국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연합군을 상대하게된 청군과 권비는 무장이나 조직력이 형편없었고 계속해서 패배했다. 권비의 실체는 깡패와 도적, 사회하류층이 섞여있는 폭도에 불과했고, 청군은 청나라 기득권층의 방해로 제대로된 개혁을 이룩하지 못해 전근대적인 군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선진화된 전술과 신식 무기를 가지고 전세계에서 정복활동을 해오던 서구열강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선전포고한지 2개월도 채 넘기기 전인 8월 14일에 북경은 연합군에게 함락당했다. 이는 제2차 아편전쟁 이후 두 번째 함락이었다.

8개국 연합군은 대승을 거뒀지만 내부에서는 잡음이 있었다. 이전부터 아라사의 계속된 세력 확장은 영국 등 다른 나라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전쟁 동안에도 이러한 문제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아라사군은 이 시기 만주에 출병하여 북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100,000명이 넘는 병력을 배치해 대한제국에 불안감을 심어줬다. 신축조약의 청나라측 전권대사 이홍장과 청황실이 아라사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아라사군의 북만주 주둔을 사실상 묵인했다. 이에 대한제국측도 아라사의 철군 이전까지 요동에서의 철군은 없다며, 사실상 요동 주둔을 장기화 했고, 요동도독부를 설치하여 남만주에 대한 병합 야욕을 들어냈다. 이 당시 한국의 강짜와 실력을 눈여겨 본 영국는 1901년 공식적으로 동맹을 체결하여 극동의 헌병, 제2의 식민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노전쟁

3.1 폭동과 천붕

평가

여담

가계

대중 매체에서

어록

막중한 황제의 책무를 잘 완수하거라. 백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강명한 황제 뿐이다.
황태자에게 남긴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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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전한 시호는 고조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장황제(高祖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太仁翼貞文章皇帝)이다.
  2. 다만 고조 시기 도입된 의회제는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보기엔 그 한계가 존재한다. 당초 고조와 중신들은 양란과 당쟁, 세도정치를 통해 무력화된 왕 - 의정부(대신) - 삼사(대간)로 대표되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를 대체하기 위하여, 군주 - 내각 - 제국의회로 대표되는 새로운 통치구조를 도입하여 새로운 통치 체제를 형성하고자 했다.
  3. 이때 '주상 전하'는 '성상 폐하'로, '왕대비 전하'는 '왕태후 폐하'로, '왕비 전하'는 '왕후 폐하'로, '왕세자 저하'는 '왕태자 전하'로, '왕세자빈 저하'는 '왕태자비 전하'로, '전문(箋文)'은 '표문(表文)'으로 바뀌었다. 또 국왕의 자칭인 '과인(寡人)'은 '짐(朕)'으로 바꾸고, 대왕의 명령은 제후의 '교(敎/教)'가 아니라 황제와 마찬가지로 '칙(勅/敕)'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4.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조선흠정헌법대강은 예비헌법으로, 입헌방침을 채택한 상황에서 완전한 입헌주의로 나가기 전에 우선 헌법상 기본적인 내용들을 미리 선언한 것이었기에 법문 끝에 대강이라는 말이 붙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대한제국 헌법이 시행되기 까지 과도기적인 헌법으로써 기능했기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는 이를 동아시아에서 최초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통틀어서도 최초의 헌법으로 본다.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1895년에 반포된 대한제국 헌법을 동아시아 최초의 헌법이라고 본다. 다만 헌법의 내용이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아 해당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편.
  5. 일설에 따르면 2여단의 출병은 이미 원수부에 통지되었고, 고조는 이를 청군의 전투력과 조선군의 성장을 확인할 기회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하며,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책임을 질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