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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의원 선거 (개화)|1918년 제헌의회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야코벤코는 강경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녹우크라이나 국민혁명동맹 (개화)|국민혁명동맹]]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총선에서 그의 홈그라운드인 제야에 출마하였다. 투표에서 야코벤코는 무난하게 당선되었고 [[이반 모졸레우스키 (개화)|모졸레우스키]]의 양보(?)로 최고의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ref>총선이 끝난 후 국민혁명동맹이 속한 국민전선은 부의장 자리를 몫으로 받았다. 국민전선 몫의 부의장으로는 [[극동 우크라이나 국민대회 (개화)|국민대회]] 의장을 맡았던 [[이반 모졸레우스키 (개화)|이반 모졸레우스키]]가 유력했지만 모졸레우스키는 [[제1회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개화)|대통령 선거]]에 나갈 생각이었던지라 자리를 고사했다. 이로 인해 야코벤코가 얼떨결에 부의장이 됐다.</ref> 부의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제야에 계속 출마해 도합 네 번 연속 제야 최고의회의원이 되었고, 모졸레우스키 정부 전반기에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 [[제1대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의원 선거 (개화)|1918년 제헌의회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야코벤코는 강경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녹우크라이나 국민혁명동맹 (개화)|국민혁명동맹]]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총선에서 그의 홈그라운드인 제야에 출마하였다. 투표에서 야코벤코는 무난하게 당선되었고 [[이반 모졸레우스키 (개화)|모졸레우스키]]의 양보(?)로 최고의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ref>총선이 끝난 후 국민혁명동맹이 속한 국민전선은 부의장 자리를 몫으로 받았다. 국민전선 몫의 부의장으로는 [[극동 우크라이나 국민대회 (개화)|국민대회]] 의장을 맡았던 [[이반 모졸레우스키 (개화)|이반 모졸레우스키]]가 유력했지만 모졸레우스키는 [[제1회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개화)|대통령 선거]]에 나갈 생각이었던지라 자리를 고사했다. 이로 인해 야코벤코가 얼떨결에 부의장이 됐다.</ref> 부의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제야에 계속 출마해 도합 네 번 연속 제야 최고의회의원이 되었고, 모졸레우스키 정부 전반기에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 ||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모졸레우스키 정부 (개화)|모졸레우스키 정부]]의 지지율이 폭락하자 중앙 정계에 남아있다가는 모졸레우스키와 함께 정치적으로 순장당할 것이 분명함을 직감한 야코벤코는 중앙 정계를 잠시 떠났고 1931년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제이스카 주 (개화)|제이스카]] 주지사에 출마해 당선된다. 이후 1935년에도 당선되어 연임에 성공했다. 마침 멜라쉬치의 차기 총리를 물색하던 대통령 [[보리스 흐레샤티츠키 (개화)|흐레샤티츠키]]의 눈에 야코벤코가 띄었다. 중앙 정계에 남아있던 동료 대부분이 모졸레우스키 정부와 함께 정치적 생명이 끝난 것과는 달리 야코벤코는 지방으로 내려가 확실한 기반을 만들어둔 상태로 살아남았고, 덕분에 멜라쉬치의 반대<ref>중도 성향이었던 멜라쉬치는 국민전선의 우경화를 |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모졸레우스키 정부 (개화)|모졸레우스키 정부]]의 지지율이 폭락하자 중앙 정계에 남아있다가는 모졸레우스키와 함께 정치적으로 순장당할 것이 분명함을 직감한 야코벤코는 중앙 정계를 잠시 떠났고 1931년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제이스카 주 (개화)|제이스카]] 주지사에 출마해 당선된다. 이후 1935년에도 당선되어 연임에 성공했다. 마침 멜라쉬치의 차기 총리를 물색하던 대통령 [[보리스 흐레샤티츠키 (개화)|흐레샤티츠키]]의 눈에 야코벤코가 띄었다. 중앙 정계에 남아있던 동료 대부분이 모졸레우스키 정부와 함께 정치적 생명이 끝난 것과는 달리 야코벤코는 지방으로 내려가 확실한 기반을 만들어둔 상태로 살아남았고, 덕분에 멜라쉬치의 반대<ref>중도 성향이었던 멜라쉬치는 국민전선의 우경화를 우려경계.</ref>에도 불구하고 총리에 임명되었다. 총리가 된 야코벤코는 흐레샤티츠키와 함께 대소 강경책을 추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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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0일 (화) 20:56 판
녹우크라이나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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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야코벤코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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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녹우크라이나 총리 베네딕트 야코벤코 Венедикт Яковенко | |||||||||||||||
출생 | 1882년 5월 29일 | ||||||||||||||
러시아 제국 체르니히우 현 탈룰라이우카 | |||||||||||||||
국적 | 러시아 제국 → 녹우크라이나 | ||||||||||||||
사망 | 1937년 5월 14일 (향년 54세) | ||||||||||||||
녹우크라이나 볼로디스히드 마제파 자치구 최고의회청사 거리 | |||||||||||||||
임기 | 제9대 녹우크라이나 총리 | ||||||||||||||
1936년 11월 12일 ~ 1937년 5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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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녹우크라이나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인. 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 의장과 제9대 녹우크라이나 총리를 역임했다. 유일하게 임기 중 사망한 총리다.
생애
정계 입문 전
야코벤코는 바이칼 지방의 우크라이나 개척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장학금을 받아 성 블라디미르 대학교(현 키예프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미하일로 르루셰우스키의 문하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역사학 준석사와 준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준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제야로 이사를 가 정착했다. 야코벤코는 제야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일하며 스승인 흐루셰우스키의 민족주의 역사학 자료를 몰래 인쇄해 지역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배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소소한 ‘반역 행위’가 발각되었고 그는 이 일로 러시아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약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녹우크라이나의 정치인
베네딕트 야코벤코[1] |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고 한국군이 시베리아에 개입하자 극동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극동에 우크라이나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해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대회를 설립했다. 대회는 헌법 제정을 위해 제헌위원회를 구성했고, 위원회 의장에 야코벤코가 선출되었다. 야코벤코는 위원회 의장으로서 이반 하자만이 작성한 녹우크라이나 민족자치헌법 초안을 검토하고 완성본을 제작하였다.
1918년 제헌의회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야코벤코는 강경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국민혁명동맹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총선에서 그의 홈그라운드인 제야에 출마하였다. 투표에서 야코벤코는 무난하게 당선되었고 모졸레우스키의 양보(?)로 최고의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2] 부의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제야에 계속 출마해 도합 네 번 연속 제야 최고의회의원이 되었고, 모졸레우스키 정부 전반기에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모졸레우스키 정부의 지지율이 폭락하자 중앙 정계에 남아있다가는 모졸레우스키와 함께 정치적으로 순장당할 것이 분명함을 직감한 야코벤코는 중앙 정계를 잠시 떠났고 1931년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제이스카 주지사에 출마해 당선된다. 이후 1935년에도 당선되어 연임에 성공했다. 마침 멜라쉬치의 차기 총리를 물색하던 대통령 흐레샤티츠키의 눈에 야코벤코가 띄었다. 중앙 정계에 남아있던 동료 대부분이 모졸레우스키 정부와 함께 정치적 생명이 끝난 것과는 달리 야코벤코는 지방으로 내려가 확실한 기반을 만들어둔 상태로 살아남았고, 덕분에 멜라쉬치의 반대[3]에도 불구하고 총리에 임명되었다. 총리가 된 야코벤코는 흐레샤티츠키와 함께 대소 강경책을 추진했다.
사망
1937년 5월 12일 오전, 야코벤코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받은 방탄 관용차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고장났다. 이 관용차는 야코벤코가 평소 자주 들르던 자동차 정비소에서 수리를 받고 다음날인 13일 오후에 다시 야코벤코에게 인도되었다.
이튿날인 1937년 5월 14일 아침, 야코벤코는 수리된 관용차를 타고 비서와 운전사와 함께 최고의회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차가 최고의회 건물 앞에 멈추자 커다란 굉음과 함께 차가 완전히 폭발하였다. 야코벤코 등 탑승자 세 명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차량 정밀 조사 결과 야코벤코의 관용차 밑 바닥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다. 경찰과 정보국은 즉시 차를 수리했던 정비소로 달려갔지만 그의 차를 고친 엔지니어는 이미 직을 그만두고 나간 상태였다. 녹우크라이나 합동수사본부는 이 사건이 구소련의 정보기관인 NKVD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NKVD가 모종의 방법으로 야코벤코의 차를 고장내고 정비소에 차를 맡기게 유도하여, 정비소에 위장취직한 공작원이 그의 차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것이었다. 구소련은 외교 당국의 논평을 통해 암살 연루 의혹을 부인했다.
야코벤코의 죽음으로 녹우크라이나 전국에 사흘의 애도기간이 선포되었다. 장례식에는 흐레샤티츠키, 멜라쉬치, 모힐라 등 녹우크라이나의 저명 정치인들과 우방국들의 외교관들이 참석했다.
소속 정당
소속 정당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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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31 | 입당 | |
1931-1937 | 합당 사망 |
소속 정당연합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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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1931 | - |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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