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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7일 (목) 00:35 기준 최신판
녹우크라이나의 1급 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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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의 직할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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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불러오는 중... | |||||
하위 행정구역 | 16 자치구 | ||||
면적 | 521㎢ | ||||
인구 | 255만 명 | ||||
인구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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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8.6명/㎢ | ||||
시장 | 국민당 | 세르히 크라우추크 (초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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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회의원 | [ 펼치기 · 접기 ] | ||||
자치구청장 | [ 펼치기 · 접기 ] | ||||
상징 | 슬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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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강이 만나는 도시 | |||
시화 | 장미 | ||||
시목 | 가문비나무 | ||||
시수 | 곰, 호랑이 | ||||
지역번호 | 002 | ||||
행정구역코드 | GU-002 | ||||
IATA 도시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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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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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하바리우스크(Хабарiвськ)는 녹우크라이나 중부에 위치한 직할시로, 녹우크라이나의 수도인 볼로디스히드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녹우크라이나의 16개 1급 행정구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역사
성립과 1공화국
하바리우스크는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이 만나는 외만주의 귀퉁이에 위치해 오랜 시간동안 문명과 거리가 먼 지역이었다. 오랜 시간 이 지역은 여진족, 청나라의 땅이었으나 17세기 러시아 제국 소속 코자크계 탐험대가 도착하면서 양국 간의 영토 분쟁이 시적되었다. 한편, 코자크계 탐험대의 대장은 예로페이 하바로우라는 이름을 가진 이였고, 그의 이름을 따 훗날 하바롭스크, 하바리우스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시베리아 전쟁 당시의 하바리우스크 |
1689년에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으나 청나라가 쇠퇴하고 1858년 아이훈 조역이 맺어지면서 러시아 제국령이 되었다. 이후 많은 슬라브계 이주민들이 새 희망을 품고 하바리우스크 등 극동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우크라이나계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1910년대 후반, 러시아 내전과 시베리아 전쟁을 거치며 이 지역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이 한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국가인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 이칭 녹우크라이나를 건국하면서 하바리우스크는 녹우크라이나의 영토에 속하게 됐다.
볼로디스히드에 이은 녹우크라이나 2위의 대도시가 된 하바리우스크는 공업이 크게 발달하여 인구가 폭증했고, 1926년에는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또 공장의 증가로 노동자들의 숫자도 같이 폭증하며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수많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산업 역시 발달했다.
3차 극동전과 인민공화국
1940년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하자 구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후 앵커리지 조약으로 녹우크라이나가 극동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극동 SSR)이라는 이름으로 구소련에 완전히 합병당하면서 구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1945년에는 구소련 스탈린 정권의 탈우크라이나화 정책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어 명칭인 하바리우스크 대신 러시아어 명칭인 하바롭스크로 개칭되었고, 곧 하바롭스크라는 명칭의 사용이 강제되었다. 1947년부터는 볼로디보스토크를 대신해 극동 SSR의 수도로 지정되어 극동 SSR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우크라이나와 깊은 연관이 있는 흐루쇼프가 구소련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하자 우크라이나계가 다수인 극동 SSR은 여러 혜택을 입었고, 특히나 극동 SSR의 중심지였던 하바리우스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은 혜택을 받았다. 러시아어 사용 강재 정책 및 우크라이나어 탄압 정책이 거의 폐지되었고 시내에서 우크라이나어로 쓰인 간판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또 국가적인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며 영화관, 수영장, 공원 등 시민들을 위한 여러 문화시설, 휴양시설이 건설되었다. 다만 종교 탄압은 스탈린 시절보다 강화되어 도시에 있는 여러 교회가 당국이 의해 폐쇄당했고, 살아남은 교회들은 지하화되어 명맥을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1980년대 하바리우스크 거리 |
1964년 구소련의 최고권력자 자리에서 흐루쇼프가 축출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후의 하바리우스크는 큰 변화도 위기도 없이 무난무난한 시기를 보냈다. 1970년대까지 이어진 이른바 "회색의 시대"에서, 하바리우스크는 구소련 치하 50년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했고 사회는 안정되었다. 또 자유진영에 우호적인 중립국인 만주와 인접한 덕분에, 젊은 여성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거리를 돌아다녀도 이상해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해 사회 분위기가 자유로웠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소련 경제의 비효율성이 드러나고 구소련 최고권력자의 잇다른 사망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가중되자 하바리우스크는 침체되고 경직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사회 혼란이 생겨나며 1940년대 이래로 구소련 당국의 탄압에 의해 오랜 시간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시민들 사이에서 다시 싹트기 시작했다. 1984년 기준 하바리우스크 시민의 약 40%가 한국 정부와 녹우크라이나 망명정부가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인 라디오 스보보다를 청취했으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정당이자 망명정부의 여당인 우크라이나 국민당의 지하조직이 하바리우스크에 생겨났다. 이런 상황에서 1985년 개혁파 고르바초프의 집권과 함께 사회 자유화 정책이 펼쳐지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민족주의 운동이 폭발했다.
결국 1991년 실시된 독립 찬반투표에서 하바리우스크는 독립 59%, 잔류 41%를 기록했다. 극동 SSR 전체로는 독립이 68%를 기록하면서 극동 SSR은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 이칭 녹우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독립했고, 하바리우스크 역시 녹우크라이나에 속하게 되었다.
제2공화국
한국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에 힘입어 많은 양의 한국 자본이 유입돼 급성장한 수도 볼로디스히드와는 달리, 하바리우스크는 독립 이후 가공할 만한 속도의 성장을 경험하지 못했다. 2000년대 초반 성정시에 접어들었으나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큰 피해를 입었고, 2010년대 중반에 다시 살만해지나 싶었으나 코로나 사태로 또다시 직격탄을 맞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상당한 수의 시민들이 볼로디스히드와 하바리우스크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고, 이는 2010년대 후반 세르히 푸르할의 당선과 극우 정당인 파스치의 약진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지리·기후
하바리우스크는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의 합류점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시 서쪽에 접해있는 아무르강은 교량 건설이 아주 힘들 정도로 강폭이 넓기로 유명하다. 만주 국경과는 약 30km 떨어져 있어 국경 도시로도 분류되며, 수도인 볼로디보스토크와는 약 800km 떨어져 있다.
대륙성기후를 띄어 한국 못지않은 무시무시한 수준의 연교차를 보여준다. 한여름에는 낮기온이 30도에 육박하기도 하지만 겨울에는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이 흔하고 심하면 영하 40도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가히 지옥의 기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대신 연평균 강수량이 700mm에 불과해 건조한 편이라 여름이라고 해서 기분 나쁘게 후덥지근한 느낌은 없고 오히려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다고 한다. 그 대신 겨울에는 얼어죽을 정도로 춥다. 눈은 10월부터 4월까지 연평균 약 70일 가량 내리며, 비는 4월부터 10월까지 연평균 100일 가량 내린다. 평균적으로 이틀에 하루 꼴로 비나 눈이 오는 것이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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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리우스크 시청 |
하바리우스크는 전통적으로 좌파 정당 강세 지역으로 여겨졌다. 1공화국 시기에서부터 좌파 정당이 우세를 점했는데, 수많은 공장이 위치해있어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회당 등의 주류 좌파 세력이 줄곧 모든 선거에서 승리했다.
구소련 치하의 극동 SSR 시절에는, 구소련 당국이 의도적으로 볼로디스히드의 행정기능을 하바리우스크로 이전했기에[1] 소련 당국으로부터 극동 SSR 치고는 좋은 대접을 받았다. 이로 인해 1991년 구소련 독립투표에서 연방 잔류 득표율이 40%에 육박하는 등 친소 감정이 상대적으로 강한 지역이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과거에 비해 친소 분위기가 많이 희석된 편이다.
볼로디보스토크의 경우 2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1공화국 시절과는 달리 우파 세력이 강세를 보이지만, 하바리우스크는 여전히 좌파 세력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와 대규모 공단이 위치한 영향이다. 독립 이후 20년 넘는 기간동안 줄곧 좌파 정당에서 시장을 배출했으나 2017년 지방선거에서 보수주의 우익 정당인 국민당 소속의 세르히 푸르할이 시장에 당선되는 이변이 펼쳐졌다. 이후 보수 정당들이 약우세를 점하며 2021년에도 국민당 소속의 세르히 크라우추크가 당선되었지만 2022년 총선에서 중도좌파 성향의 국민노동당이 국민당보다 많은 최고의회의원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다시 국민노동당 쪽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좌우 구분과 별개로, 전통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분류된다. 구소련 시절의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상당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자유주의 정당인 우크라이나 민주연합과 인민의 종이 힘을 못 쓴다. 또한 공장 노동자들이 많은 관계로 노동주의 성향이 강한데, 이를 기반으로 국민노동당이 높은 지지를 누렸었으나, 푸르할의 당선으로 정치 구도가 흔들린 2010년대 말에 들어서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한 극우정당 파스치가 약진했다.
경제
교통
코스트 안드루셴코 국제공항 |
하바리우스크에 바로 인접한 하바리우스크 주 트란스하바리우스크 시에 코스트 안드루셴코 국제공항이 위치해 있으며, 인천국제공항 등 한국의 주요 국제공항들과 연결된 직항선이 취항되어있는 상태다. 2023년 제2터미널이 완공되면서 수송능력이 두 배로 늘어났다.[2] 공항까지 연결되는 공항버스를 하바리우스크 시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탈 수 있다.
시내 대중교통으로는 버스와 지하철이 있다. 지하철은 4개 노선과 74개 역이 있으며, 설비에 신경써 탑승하기 편하고 쾌적하다고 한다. 소련 시절에는 지하철이 없었으나 독립 후 2000년대에 2개 노선을 건설했다. 이후 금융위기로 노선 추가 건설이 미뤄지다가 2010년대 후반에 추가로 착공, 현재와 같은 체계가 만들어졌다. 버스의 경우 한국산 중고 버스를 주로 이용한다. 구소련 시절에는 노면전차가 운행했고 독립 후로도 한동안 운용되었지만 지하철 노선이 계속해서 증가, 확장되면서 2010년대에 모습을 감췄다. 다만 관광용 상품 으로 쓸 목적으로 극히 일부 지역에 한해 노면전차 운행을 유지하였고, 하바리우스크 관광 명물이 되었다.
길거리에서는 한국산 중고차가 자가용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다.
시외로 향하는 교통에는 철도와 고속도로가 있다. 하바리우스크 기차역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경유역이며, 동북쪽 추미한스카 자치도의 추미한 시로 향하는 하바리우스크-추미한 철도와 만주 하얼빈으로 향하는 극동철도 3번선이 하바리우스크 기차역에서 출발한다. 제이스카 주에서 볼로디스히드를 거쳐 한국으로 연결되는 녹우크라 1번 고속국도(극동 하이웨이 1)와 스보보디우 자치시로 연결되는 3번 고속국도 역시 하바리우스크를 지난다. 하바리우스크 버스 터미널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가는 고속버스 외에도 공항으로 향하는 공항버스나 만주를 왕복하는 국제버스도 있다.
아무르 강의 단 두 개 뿐인 교량[3] 중 하나가 하바리우스크 북쪽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놓여있다. 다리를 통해 아무르강 서안으로 건너갈 수 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이 다리를 지나 서북쪽으로 뻗어간다.
타 도시와의 관계
자매결연 도시
볼로디스히드와의 관계
수도이자 제1도시인 볼로디스히드와의 지역감정으로 유명하다. 구소련 극동 SSR 시절 구소련 당국의 차별대우와 독립 이후의 발전 속도 차이 등으로 인해 두 도시 간의 감정은 썩 좋지 못하다. 하바리우스크 시민들은 전반적으로 볼로디스히드에 시기심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은 경우가 많다. 다소 과장을 섞자면, 하바리우스크 시민 앞에서는 볼로디스히드 칭찬은 하지 않는 일신의 안전에 이롭다. 볼로디스히드 시민들은 하바리우스크에 딱히 관심도 없다 카더라.
이러한 지역감정은 스포츠 경기에서도 드러난다. 녹우크라이나 프로축구에서 볼로디스히드 FC와 하바리우스크 FC가 경기를 벌이면, 그 경기장이 어디에 있든 항상 하바리우스크 FC 팬들로 가득 차 마치 하바리우스크 팀의 홈그라운드처럼 변한다고 한다.
기타
- 녹우크라이나의 3대 대학교 중 하나인 하바리우스크 대학교가 위치해 있다.
관련 문서
- 하바리우스크 조약: 시베리아 전쟁을 마무리한 하바리우스크 조약이 하바리우스크 시청레서 체결됐다.
- 코스트 안드루셴코 국제공항: 다만 엄밀한 위치는 하바리우스크 직할시가 아닌 그에 인접한 하바리우스카 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