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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7일 (목) 18:13 판
바르샤바 생화학 테러 Biochemischer Angriff in Warschau (바르샤바 생화학 테러, 독일어) דער אומגליק פון 11טן סעפטעמבער (9월 11일의 참사, 이디시어) Tragedia Warszawska (바르샤바의 비극, 폴란드어) | ||
발생 |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9분 | |
---|---|---|
폴란드 자치 공화국 바르샤바 | ||
가해자 | 러시아 해방 기구 | |
범행 동기 | 러시아 국수주의 및 반유대주의 | |
피해 | 사망 | 2,997명 |
부상 | 5,767명 | |
2차 피해 | 27,500명 ~ 90,000명 |
개요
러시아 해방 기구(ROO)를 필두로 한 러시아계 국수주의 조직이 폴란드 SAR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벌인 동시다발적인 생화학 테러를 의미한다. 라트 연방은 물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테러로 총 3,000여명이 넘는 시민이 사망했다.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라트 연방은 러시아 서부와 북부 일대를 자국에 병합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러시아인들이 추방되었고, 1946년-1949년 사이의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러시아인들이 추방된 자리를 유대인들이 채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주가 강제적이었지만 라트 연방 정부가 높은 자치와 경제적 혜택, 유대교 장려, 차별 금지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자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북서부로 이주해 점차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대는 유대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러시아 일대 곳곳에 정착촌을 세우고 러시아인들을 추방시키는 등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갔다. 러시아인 실향민들은 러시아 본국에서 지하조직인 백계 러시아 운동, 러시아 해방 기구 등을 설립하며 반유대주의 감정을 키워갔다.
또,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반감도 커졌다.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폴란드가 유대인들과 손잡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빼앗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폴란드의 최대도시이자 유대인들이 인구의 1/4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바르샤바가 테러의 타겟이 된 것이다.
전개
1998년 경, 러시아 해방 기구의 단원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서러시아 SAR의 한 집단농장에서 살충제 및 제초제를 만든다는 이유로 화학 물질 구입을 당국에 신청했다. 당국 측은 이를 별다른 의심 없이 허가했는데, 이는 독가스인 VX를 제조하기 위함이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총 3년간 러시아 해방 기구 단원들은 충분한 양의 VX를 제조, 이를 유대인 SAR이나 폴란드 SAR로 반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검문이 까다로운 유대인 SAR 국경을 넘기보다 폴란드 SAR을 넘는 것이 쉽다고 판단, 2001년 7월부터 8월까지 바르샤바 인근의 집단농장으로 제조한 VX 가스를 반입했다.
한편 슈타지는 2001년 8월 10일, 러시아 해방 기구가 바르샤바나 크라쿠프 등지에서 다수를 대상으로 한 테러를 저지를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지만, 이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지 않았다. 심지어 한 단원은 불법적인 흉기를 소지한 채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 풀려났다. 다만 해당 단원은 이 테러와 직접적 연관은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01년 9월 11일 8시 49분, 출근 시간대를 노려 ROO의 단원 8명이 바르샤바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4호선에서 동시에 XY 가스가 담긴 풍선을 터트렸다. 테러 장소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거주 구역에 인근한 1호선의 바르샤바 중앙역, 2호선의 시비엥토키스카역, 4호선의 다시엥스키에고역이었다. 출근시간대를 노리고 지하철에서 테러를 일으킨 것이다.
4호선 다시엥스키에고역에서 테러범은 시민들의 제지로 미수에 그쳤으나, 바르샤바 중앙역과 시비엥토키스카역에서는 피해가 컸다. 우선 바르샤바 중앙역사 내에서 터진 독가스로 인해 대합실에서만 1,500명이 넘는 시민이 상해를 입었다. 더 끔찍했던 것은 시비엥토키스카역에서의 테러였는데, 독가스로 인해 기관사가 중독되며 열차 통제권이 상실되어 전동차가 역 벽을 부딛혀 수천명에 달하는 탑승객과 열차를 기다리던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또, 시비엥토키스카역이 1호선과 2호선의 환승역이었다보니 피해는 더 컸다. 설상가상으로 기관사의 사망과 역무원들의 긴급 대피로 인해 시비엥토키스카역에 진입하던 1호선 전동차에 테러 사실이 고지되지 않아, 1호선에 탑승한 승객 300여명도 가스에 중독되었다.
이 외에도 테러범들은 바르샤바의 팔레스타인 대표부, 시 중앙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광장에서 테러를 시도했다. 팔레스타인 대표부에서의 테러는 미수에 그쳤다. 테러범들은 트럭을 광장에 돌진시켜 7명을 사망하게 한 후, 광장에서 가스를 터트려 최소한 300명에 달하는 시민에게 상해를 입혔다. 또, 바르샤바 시내 중심부의 시나고그 3곳에서 생화학 폭탄 테러가 일어나 2명의 성직자가 폭사하고, 7명의 신도와 3명의 성직자가 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다행히도 안식일이 아니었기에 시나고그에 상주하던 시민들은 적었으며 소방관들의 발빠른 대처로 폭탄 테러에 의한 피해는 적었다.
피해
테러 발생 3일 후, 라트 연방 내무부는 총 2,997명이 사망했고 5,000여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으며 최소한 2만명의 시민이 가스에 중독되었을 수 있기에 검진을 받을 것을 권고했다. 2,997명의 희생자 중 300여명은 화재 및 가스 확산 방지를 막기 위해 싸우다 순직한 경찰관이며, 그 외 민간 희생자 2,663명 중 절반 이상인 1,500여명 가량이 유대인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바르샤바 지하철은 가스 해독을 위하여 약 2달간 모든 운행이 중지되었으며, 2001년 11월부터 재개통하였다.
여파
테러로 인해 전국민적인 단결이 이루어졌고, 그레고어 기지 서기장과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크게 올랐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라트 연방의 각 구성국 정부가 테러 사실을 미리 알수 있었음에도 부실히 대응해 테러를 자초했음이 드러났다. 러시아 해방 기구의 단원들은 살충제를 제조하기에는 너무 많은 화학 재료를 구매하고자 하였는데도, 서러시아 SAR 농무부 측에서 딱히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인근 주민의 신고로 경찰관이 출동해 집단농장을 수사했음에도 독가스 제조의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과 서러시아 SAR 정부는 큰 비판을 받았으며, 서러시아 SAR의 치안국장과 농무부장관이 사임하는 일이 일어났다. 슈타지 역시 비판받았다. 테러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를 약 1년 전부터 접수받고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결국 2002년 5월, 아드 멜커르트 내무장관이 부실한 사전 대응에 책임을 지고 직위를 내려놓았다.
러시아인에 대한 유대인과 폴란드인의 반감은 매우 거세졌고, 러시아인을 상대로 한 린치까지 일어났다. 슈타지는 러시아 해방기구의 단원들을 암살하기 위한 "저주의 예언 작전"(נבואה פון קללה)을 진행했다. 총 11명의 테러 주동범을 암살하는 작전이었다. 2002년 5월부터 2007년 1월까지 약 5년간 진행되었고, 11명 중 9명을 암살했으나, 러시아 측에서 비밀 대원들이 자국 내에서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국민을 살해하는 것에 외교적으로 항의하였고 라련 내부에서도 불법적인 암살은 옳지 않은 보복이라는 여론이 대두되어 결국 도중 중단되었다. 다만 나머지 2명[1]은 각각 2009년 1월, 2011년 10월 아스타나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해되었는데 배후에 슈타지가 있다는 설이 있다.[2]
관련 미디어
- 『내 이름은 이반』 (2008) - 크라쿠프에서 이발소를 하던 한 평범한 러시아인 이민자 "이반"이 테러 이후 잠재적 테러리스트 취급을 당하며 겪는 어려움과 그에 대한 극복을 담은 영화이다.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 주연상을 받았다. 주연 배우인 드미트리 미르시우추코프는 우크라이나계-폴란드계 혼혈인데, 테러 이후 바르샤바에 거주하면서 실제로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이 여럿 있다고 한다.
- 『바르샤바』 (2011) - 2001년 바르샤바 테러 이후 슈타지가 벌인 테러범에 대한 보복 작전인 "저주의 예언 작전"을 다룬 작품이다. 가공의 유대계 슈타지 대원 "이츠하크 레빈슨"이 작전 수행 도중 벌이는 부정의한 보복에 대한 회한과 회의감을 담은 반전영화로, 슈타지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와 극좌 편향성, 반유대주의 논란으로 2011년 최대의 문제작이 되었다. 유대인 SAR에서는 영화가 반유대주의적이라는 이유로 개봉을 금지했다가, 정작 진보 성향 유대인들의 반발에 직면하여 2년 늦은 2013년 제한적으로 개봉했다.
- 『시비엥토키스카』 (2014) - 시비엥토키스카 역에서 생화학 테러를 진압하고 생존자를 구출하기 위한 40여명의 바르샤바 제2소방대원[3]들의 영웅적인 스토리를 담은 실화 기반의 영화이다. 노년층을 중심으로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평론가들에게는 지나치게 감정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평가가 좋지 못했다.
여담
테러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시비엥토키스카역에는 테러 기념관이 있다. 테러 10주기인 2011년 개관했으며, 매우 충격적인 전시물이 많아 출구를 여러 곳에 만들어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