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중추원의원 총선거 (빌레펠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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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장단 구성 ===
=== 의장단 구성 ===
[[제1대 중추원 (빌레펠트)|제1대 중추원]]의 의장단 구성에는 4달 가까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의장단 구성을 위한 표결에 앞서 의석배치부터가 난관에 부딪혔다. [[보국협회 (빌레펠트)|보국협회]]측에서는 자신들이 세력이 가장 크니 앞자리에 앉고 다른 정파들이 뒤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다른 정파들이 모두 반발하여 무산되었으며, [[독립협회 (빌레펠트)|독립협회]]계열 일부에서는 재산순으로 하거나 혹은 자리를 매표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소수의견에 그쳤다. [[광제동지회 (빌레펠트)|광제동지회]] 측에서는 제비를 뽑자는 의견을 냈으나 보국협회와 독립협회 양당이 반대하였으며, 이와중에 [[대성회 (빌레펠트)|대성회]]와 위정척사파, 근왕파 계열 의원들은 중추원을 궁궐에서 개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외에 양반이나 상류층 출신 의원들이 광제동지회 의원들과 한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집단퇴장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수도권 양반출신 의원들이 서북지방 양반출신 의원들을 차별하며 양측간에 고성이 오가다가 회의가 정지되는 일도 일어났다.

2025년 1월 25일 (토) 19:51 판

공지
| 빌레펠트 연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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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대 대한국 중추원

제1회 중추원의원 총선거
第一回中樞院議員總選擧
(최초 선거) 1897년 7월 8일
제1회 중추원선
1901년 모월 모일
제2회 중추원선
투표율 95.5%
선거 결과

보국 133석 (37.57%)
(33.05%) 117석 독립
정당 지역구 총합 비율
보국협회 133석 133석 37.57%
독립협회 117석 117석 33.05%
광제동지회 22석 22석 6.21%
평안정우회 21석 21석 5.93%
대성회 15석 15석 4.24%
무소속 46석 46석 12.99%

개요

배경

1896년 7월 17일 대한국 헌법이 반포됨에 따라 중추원이 입법기구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이후 선거법이 제정됨에 따라 중추원의원들을 새로이 선출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선거 당시 정부는 김홍집 정부였다.

제도

  • 선거구
    각 지방의 등급에 따라 선출의원수에 차등을 두는 방식의 중대선거구 제도를 채택하였다. 전국 228개 경·부·목·군·현을 각각의 선거구로 나누었으며, 5경(京)이 각각 5인씩 25인, 6부(府)가 각각 4인씩 24인, 17목(牧)이 각각 3인씩 51인, 54군(郡)이 각각 2인씩 108인, 146현(縣)이 각각 1인씩 146인 총 354인의 의원을 선출하였다. 당시 프랑스 조차지였던 강화도와 간도도독부로 관리받던 간도지역은 선거구가 설정되지 않았다.
  • 선거권 · 피선거권
    신민 중 '1년 이상 대한국 본토에 거주하고 75냥 이상의 직접국세를 내는 25세 이상 성인 남성'에게만 선거권이 인정되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투표에 참여도 할 수 없었고, 성인 남성이라도 중상류층 이하면 투표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다만 선거법 제정 당시 참고하였던 일본의 중의원의원선거법과 달리 해당 지역에 거주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아 유권자가 적은 지역에서는 위장전입 등을 이용한 부정선거가 일어나기도 했다. 피선거권 규정은 연령제한을 30세 이상으로 설정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선거권 규정과 동일하였다.
  • 임기
    현재와 마찬가지로 중추원 해산이 없는 이상 임기는 4년이었다.

선거 결과

정당 의석수 비율
보국협회 35석 9.89%
대동정회 12석 3.39%
대한농민회 11석 3.11%
관북신민회 9석 2.54%
개성구락부 9석 2.54%
독립협회 38석 10.73%
총상구락부 18석 5.08%
영남안민회 11석 3.11%
연정회 5석 1.41%
천도광제회 8석 2.26%
안민동우회 14석 3.95%
대성회 7석 1.98%
평안정우회 5석 1.41%
무소속 (군국파) 57석 16.1%
무소속 (헌정파) 26석 7.34%
무소속 (위정척사파) 23석 6.5%
무소속 (근왕파) 12석 3.39%
무소속 54석 15.25%
전체 354석

지역별 결과

경기

정당 의석수 비율 총합
보국협회 30석 69.77% 43석
독립협회 13석 30.23%

정부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수도권답게 정권을 차지하고 있는 보국협회독립협회를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 특히 거점지역기반의 거상(巨商)들을 지원해 독립협회의 보부상과의 유착관계에서 나오는 영향력을 견제한다는 정부의 기존 전략이 빛을 발해 송상(松商)들의 본거지인 북경개성부에선 전체 5석 중 4석을 얻고 주변지역의 의석까지 모두 보국협회 측이 승리를 거두는 결과를 얻었다. 한편 독립협회 측에서는 을해정난 이후 정부와 척을 진 민씨집안의 관향인 여주와 박영효의 고향인 수원 등 경기남부 일대에서 의석을 얻었다.

호서

정당 의석수 비율 총합
독립협회 17석 45.95% 37석
보국협회 10석 27.03%
광제동지회 8석 21.62%
대성회 2석 5.41%

전통적으로 경기지방과 교류가 많은 호서지방이지만 경기권에서 보국협회가 압승을 거둔것과 반대로 충청도에서는 독립협회김옥균의 고향인 공주와 보부상들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인 저산팔읍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권 의석을 휩쓸며 호서지방 전체 의석의 절반 가까운 17석의 의석을 얻으며 승리했다. 보국협회는 충주와 홍주 일대의 의석만을 얻는데 그쳤지만, 보국협회의 회장인 이상재가 저산팔읍에 소속된 험지인 서천에서 생환하는데 성공하며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외에 청주와 보은 일대에서는 동학교도들의 단체인 광제동지회가 승리를 거두며 손병희 등이 중추원에 입성하였으며, 제천과 단양에서는 유인석이 이끄는 위정척사파 세력 대성회가 의석을 얻었다.

호남

정당 의석수 비율 총합
보국협회 23석 39.66% 58석
독립협회 15석 25.86%
광제동지회 14석 24.14%
무소속 6석 10.34%

호남에서는 황실의 관향인 남경전주부의 의석과 갑신양전에서 수혜를 입은 부농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보국협회가 우세를 보였지만, 일본에 쌀을 팔아 이득을 본 농민들과 총상회의 영향을 받는 상인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립협회 또한 적지 않은 의석을 거두며 선전했다. 이외에 광제동지회 또한 동학을 믿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약진하였으며, 보수적인 성향의 지역 유지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기도 하는 등 보국협회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각 정파가 서로 비등비등한 양상을 보였다.

영남

정당 의석수 비율 총합
독립협회 41석 52.56% 78석
보국협회 15석 19.23%
대성회 12석 15.38%
무소속 10석 12.82%

78석이라는 거대한 의석이 걸린 중요한 승부처였던 영남권에서는 독립협회가 대일무역으로 인해 일본의 영향이 큰 동래부를 중심으로 남해안권부터 동경경주부와 포항 등 동해안권 일부 지역까지의 의석을 휩쓸며 크게 승리하였다. 대구와 상주 등 주요 내륙지방에서도 총상회의 연줄을 등에 업은 독립협회가 우세한 경향을 보였으며, 보국협회는 밀양과 영천 등 일부 내륙지방의 의석만 얻으며 부진한 결과를 얻었다. 이외에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권에서는 유림조직을 기반으로 대성회가 의석을 얻었으며, 경북권과 경남권을 가리지 않고 전체적으로 공식적으로 대성회에 소속되지 않은 유림들과 지역 유지들 또한 많이 당선되었다.

강원

정당 의석수 비율 총합
보국협회 14석 56% 25석
독립협회 1석 4%
대성회 1석 4%
무소속 9석 36%

관북

정당 의석수 비율 총합
보국협회 14석 35.9% 39석
독립협회 12석 30.77%
무소속 13석 33.33%

관서

정당 의석수 비율 총합
평안정우회 21석 42.86% 49석
보국협회 12석 24.49%
독립협회 8석 16.33%
무소속 8석 16.33%

해서

정당 의석수 비율 총합
보국협회 15석 60% 25석
독립협회 10석 40%

선거 후 상황

정파 결성

선거가 끝난 후 사실상 보국협회의 지회(支會)나 다름없었던 대동정회와 관북신민회, 개성구락부에 더해 호남기반의 부농조직인 대한농민회는 모두 보국협회와 연합해 정파를 구성하였으며, 독립협회는 지방의 상권단체들인 총상구락부와 영남안민회, 연정회와 정파를 구성하였다. 이외 동학 북접 계열의 천도광제회와 남접 계열의 안민동우회는 선거 직후 합당하여 광제동지회를 창당하였다.

무소속 의원들은 위정척사파의 경우 영남 북부권 의원 8명이 대성회에 입당하였으며, 관서지방에선 평안북도 서부지방의 의원 상당수가 평안정우회에 입당해 원내에서 광제동지회에 버금가는 21석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군국파의 경우 보국협회와 독립협회에 양분되었는데, 주로 집권세력에 편승해 적극적인 정치력 행사를 원했던 쪽은 보국협회에, 상권세력과 접촉해 군수사업 등의 이권을 노리고자 했던 쪽은 독립협회와 협력하였다. 헌정파의 경우 상당수가 지식인층이었던 관계로 관료중심의 보국협회와 협력하였으며, 근왕파의 경우 한인헌태왕을 지지하던 일부는 보국협회와 협력하였으나, 상당수는 전제군주제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정파 자체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무소속으로 남았다. 그외 지방 유지들로 구성된 기타 무소속 의원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보국협회나 독립협회와 협력하며 최종적으로 보국협회가 133석을 확보해 원내 1당의 지위를 얻었으며, 독립협회가 117석으로 2당, 그 다음으로 22석의 광제동지회와 21석의 평안정우회, 15석의 대성회로 총 5개의 정파가 구성되었다.

의장단 구성

제1대 중추원의 의장단 구성에는 4달 가까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의장단 구성을 위한 표결에 앞서 의석배치부터가 난관에 부딪혔다. 보국협회측에서는 자신들이 세력이 가장 크니 앞자리에 앉고 다른 정파들이 뒤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다른 정파들이 모두 반발하여 무산되었으며, 독립협회계열 일부에서는 재산순으로 하거나 혹은 자리를 매표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소수의견에 그쳤다. 광제동지회 측에서는 제비를 뽑자는 의견을 냈으나 보국협회와 독립협회 양당이 반대하였으며, 이와중에 대성회와 위정척사파, 근왕파 계열 의원들은 중추원을 궁궐에서 개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외에 양반이나 상류층 출신 의원들이 광제동지회 의원들과 한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집단퇴장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수도권 양반출신 의원들이 서북지방 양반출신 의원들을 차별하며 양측간에 고성이 오가다가 회의가 정지되는 일도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