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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일종의 족벌정치를 지향하던 장쉐량은, 1970년대에 이르러 점차 자신의 가족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며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장쉐밍 (개화)|장쉐밍]], [[장쉐쓰 (개화)|장쉐쓰]] 등 장쉐량의 형제들 중 유능한 이들이 정부와 군부의 고위직을 영임했는데, 장쉐쓰는 장쉐량과는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장쉐량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장쉐쓰는 자신과 의견을 공유하는 여러 [[만주군 (개화)|만주군]] 고위군관들을 포섭하였고, 사회 혼란이 심화되는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마침 한국 정부 역시 장쉐량이 더이상 만주의 지도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장쉐쓰 일파의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도 묵인하였다. 마침내 1977년 10월 26일, 장쉐쓰는 '''[[봉천정변 (개화)|봉천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장쉐량은 쿠데타군의 압박에 굴복해 반강제로 대총통직에서 하야했고, 곧 대흥안령의 대총통 여름별장에 연금되었다. 당시 [[부총통 (개화)|부총통]]이었던 [[양이천 (개화)|양이천]]이 [[대총통 (개화)|대총통직]]을 승계하여 취임했으나 그는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다. 실질 권력은 장쉐쓰와 정변 주도자들이 주축이 된 [[국가재건최고회의 (개화)|국가재건최고회의]]에게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주석은 장쉐쓰였으므로, 장쉐쓰가 만주의 최고권력자가 된 것이었다. 장쉐쓰는 장쉐량이 6년으로 연장한 대총통 임기를 5년으로 줄이는 헌법개정을 단행하였고, 양이천의 임기 종료를 앞두고 치러진 [[제6회 만주 대총통 선거 (개화)|제6회 대총통 선거]]에 무소속으로 단독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 이전에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일종의 족벌정치를 지향하던 장쉐량은, 1970년대에 이르러 점차 자신의 가족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며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장쉐밍 (개화)|장쉐밍]], [[장쉐쓰 (개화)|장쉐쓰]] 등 장쉐량의 형제들 중 유능한 이들이 정부와 군부의 고위직을 영임했는데, 장쉐쓰는 장쉐량과는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장쉐량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장쉐쓰는 자신과 의견을 공유하는 여러 [[만주군 (개화)|만주군]] 고위군관들을 포섭하였고, 사회 혼란이 심화되는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마침 한국 정부 역시 장쉐량이 더이상 만주의 지도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장쉐쓰 일파의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도 묵인하였다. 마침내 1977년 10월 26일, 장쉐쓰는 '''[[봉천정변 (개화)|봉천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장쉐량은 쿠데타군의 압박에 굴복해 반강제로 대총통직에서 하야했고, 곧 대흥안령의 대총통 여름별장에 연금되었다. 당시 [[부총통 (개화)|부총통]]이었던 [[양이천 (개화)|양이천]]이 [[대총통 (개화)|대총통직]]을 승계하여 취임했으나 그는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다. 실질 권력은 장쉐쓰와 정변 주도자들이 주축이 된 [[국가재건최고회의 (개화)|국가재건최고회의]]에게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주석은 장쉐쓰였으므로, 장쉐쓰가 만주의 최고권력자가 된 것이었다. 장쉐쓰는 장쉐량이 6년으로 연장한 대총통 임기를 5년으로 줄이는 헌법개정을 단행하였고, 양이천의 임기 종료를 앞두고 치러진 [[제6회 만주 대총통 선거 (개화)|제6회 대총통 선거]]에 무소속으로 단독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 ||
대총통직에 당선된 장쉐쓰는 정치개혁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세력을 뒷받침할 정당인 협화당을 창당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온건 성향의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반정부매체에 대한 탄압적 조치를 완화하거나 취소하는 등, | 대총통직에 당선된 장쉐쓰는 정치개혁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세력을 뒷받침할 정당인 협화당을 창당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온건 성향의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반정부매체에 대한 탄압적 조치를 완화하거나 취소하는 등, 그동안 장쉐량 정권 하에서 탄압받던 재야 민주세력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억눌료있었던 민주화에 대한 논의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일각에서는 중화민족주의에 입각한 중국통일론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장쉐쓰는 통일론은 끈질기게 탄압하면서도 단순 자유화만에 대한 논의는 허용하면서 정국의 흐름을 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로 향하게끔 유도하였다. 1980년에는 최초의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외국 참관단의 감시 하에 민주적인 방식으로 실시되었고, 1984년에는 야당의 창당이 하용되어 여러 민주정당이 태어났다. | ||
수년간 이어진 장쉐쓰의 개혁 방향은 명료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이에 보수파들은 장쉐쓰의 자유화정책에 반발하며 그를 축출하려고도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축출당하는 결과를 맞았다. 이는 민심이 명백히 장쉐쓰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침체기에 있었던 만주 경제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고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물가상승률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는 국제유가의 하락 등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동시에 장쉐쓰 정부의 유연한 경제정책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경재적 불황이 해소되자 사회 역시 점차 안정되었고, 국민들은 장쉐쓰에게 '일단은'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국민의 지지는 장쉐쓰가 자신감을 가지고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 마침내 1987년에는 민주화세력과 정부 및 여당의 협상 끝에 국회 양원과 대총통에 대한 민주적 선거가 합의되었고, 이듬해인 1988년에는 '''[[민정개헌 (개화)|민정개헌]]'''이 단행되어 만주는 역사상 최초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가지게 되었다. 장쉐쓰는 차기 대총통 선거에 불출마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박수받으며 떠나는 대총통이자 국가원로가 되었다. 이러한 장쉐쓰의 정치개혁은 혁명에 버금가는 위업을 조용하고 차근차근 달성했다 하여 '''영정혁명'''(寧靜革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수년간 이어진 장쉐쓰의 개혁 방향은 명료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이에 보수파들은 장쉐쓰의 자유화정책에 반발하며 그를 축출하려고도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축출당하는 결과를 맞았다. 이는 민심이 명백히 장쉐쓰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침체기에 있었던 만주 경제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고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물가상승률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는 국제유가의 하락 등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동시에 장쉐쓰 정부의 유연한 경제정책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경재적 불황이 해소되자 사회 역시 점차 안정되었고, 국민들은 장쉐쓰에게 '일단은'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국민의 지지는 장쉐쓰가 자신감을 가지고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 마침내 1987년에는 민주화세력과 정부 및 여당의 협상 끝에 국회 양원과 대총통에 대한 민주적 선거가 합의되었고, 이듬해인 1988년에는 '''[[민정개헌 (개화)|민정개헌]]'''이 단행되어 만주는 역사상 최초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가지게 되었다. 장쉐쓰는 차기 대총통 선거에 불출마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박수받으며 떠나는 대총통이자 국가원로가 되었다. 이러한 장쉐쓰의 정치개혁은 혁명에 버금가는 위업을 조용하고 차근차근 달성했다 하여 '''영정혁명'''(寧靜革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
2025년 2월 18일 (화) 17:3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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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满洲 | Manchuria 중화민국 中華民國 | Republic of Chin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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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族共和 오족공화 | |||||||||||
| 국가 | 대동가 | ||||||||||
| 국화 | 모란 | ||||||||||
| 국조 | 화충 |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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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코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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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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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주(满洲, Manchuria)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민주공화국이다.
명목상 영토는 중국 본토 전체와 몽골 및 투바 그리고 파미르 고원 등을 포함하지만, 몽골은 1991년 헌법 해석 변경으로 영유권 주장이 철회되었으며, 1928년 양부천봉 이래로 실질적 지배 토는 내만주 중북부에 한정되어있다.
과거에는 봉천군벌 장씨 일가의 개발독재 하에 있던 국가였지만 1980년대의 점진적인 민주화를 거쳐 현재는 아시아에서 네 번째로 민주적인 국가가 되었다.[6]
상징
국호
만주는 이 문서의 표제어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는 만주라고 불리지만 역사적,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굉장히 다양한 국호들을 가지고 있다.
만주는 명목상으로는 1927년 중국국민당의 2차 북벌로 인해 베이징에서 봉천으로 퇴각한 북양정부를 자처하여 중국 유일의 정통정부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에,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 / Republic of China)이다. 이는 흔히 말하는 '중국'의 국호와 정확히 일치하는데, 이로 인해 중국은 만주를 동북정부로, 만주는 중국을 (명목상으로나마) 남경정부라고 부른다.[7] 하지만 양국 모두가 스스로를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이라고 부르고 있는데다가 일반적으로 국제사회는 국력도 훨씬 강하고 정통성도 더 높은[8] 남경정부를 진짜 중국으로 인정하기에, 만주 측은 대외적으로는 보통 만주중화민국(Manchurian Republic of China)이라는 국호를 사용한다. 한편 만주 측은 내부 공문에서는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외교적 문제와는 달리, 만주 국민들은 보통 간단하게 만주라고만 부른다. 특히 연령이 낮아질수록 만주라는 명칭에 대한 사용 빈도가 더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만주의 정치인들이나 외교관들도 중화민국보다는 만주라는 명칭을 더 친숙히, 많이 사용한다.[9] 이는 제3국 사람들도 마찬가지라 외신이나 제3국 커뮤니티에서는 만주를 가르킬 때 'Manchuria'라고만 지칭한다. 반면 중국인들은 만주라는 명칭을 분리주의적인 한간 용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만주보다는 동북(둥베이)이라는 명칭을 더 선호한다. 친중 성향의 국가들도 만주를 지칭할 때는 공식적으로는 'Manchuria'가 아닌 'Dongbei'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편 만주 내 만주독립진영에서는 만주(Manchuria), 만주국(State of Manchuria), 만주공화국(Republic of Manchuria) 등의 국호를 지지한다.
인터넷 상에서 국가나 지역을 선택할 때 만주를 가르키는 용어가 사이트마다 'Manchuria', 'Chinese Manchuria', 'Manchuria, Republic of China', 'Manchurian Republic of China', 'Dongbei, China' 등으로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만주 누리꾼들이 국가 선택창에서 만주를 찾느라 뒷목을 잡게 만들기도 한다.
국기
| 오색기 五色旗 | Five-colored Flag | |||
| 지위 | 만주의 국기 | ||
| 채택일 | 1912년 1월[10] / 1950년 11월 30일[11] | ||
| 설계자 | 쑹자오런 | ||
| 근거법령 | 만주 헌법 | ||
| 비율 | 5:8 | ||
국장
| 십이장국휘 十二章國徽 | Twelve Symbols National Emblem | |||
| 지위 | 만주의 국장 | ||
| 채택일 | 1913년 2월[10] / 1950년 11월 30일[11] | ||
| 설계자 | 루쉰[12] 외 2명 | ||
| 근거법령 | 만주 헌법 | ||
| 사용처 | 외교공문, 정부공관, 여권 표지 등 | ||
국가
| 대동가 大同歌 | Dàtónggē | |||
| 지위 | 만주의 국가 | ||
| 채택일 | 1951년 2월 30일 | ||
| 작사자 | 김리오 | ||
| 작곡자 | 김리오 | ||
| 근거법령 | 만주 헌법 | ||
| 대동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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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만주와 동북왕 장쭤린
만주는 예로부터 여러 유목민 및 반농반목 민족들의 근거지로, 오랜 기간동안 중국 본토와는 독립적인 지역으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15세기에 만주를 기반으로 한 여진족(만주족)이 중국 본토의 한족 국가인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우면서 만주와 중원은 하나의 국가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만주족 청 황실은 봉금령을 내려 한족의 만주 이주를 금지했고, 이로 인해 만주는 1800년대까지도 상당부분이 인구가 희박한 미개발지였다.
시간이 흘러, 청나라가 쇠약해지자 여러 열강들과 신흥국가들이 청나라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이 중국에 진출해 조계와 조차지, 그리고 시장통제력을 가져갔고, 한국과 일본 등 오랫동안 중국이 '변방 오랑캐'라고 여겼던 국가들이 서구 문명을 흡수하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특히 한국과 러시아가 만주 지역을 집어삼키려 하자 청나라는 부랴부랴 봉금령을 해제하고 만주에 한족들을 이주시켜 만주 땅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만주는 인구증가와 더불어 중국화를 겪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의 군주정이었던 청나라가 멸망하고 한족이 주도하는 공화정인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혁명파와의 타협으로 정식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선포,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나 몇 달 안 돼 제정은 붕괴하고 중국은 각지에서 군벌이 할거하는 또다른 전국시대에 돌입한다. 정치적 대혼란이 벌어지자 전국 각지에서는 도적단이 들끓었고, 만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주에 있던 수많은 마적단 중 하나를 이끌던 장쭤린이라는 미천한 신분의 사나이는 그만의 리더십으로 인망을 얻어 차츰 만주의 세력자가 되었고, 여러 경쟁자들을 패배시킨 끝에 마침내 만주의 지배자가 된다.
만주를 쥐락펴락하던 봉천군벌 |
마적단에서 출발한, 보잘것없던 그의 세력을 봉천군벌이라는 거대세력으로 성장시키고 동북왕으로 불리게 된 장쭤린은 동삼성은행을 설립해 화폐제도를 정비하는가 하면 동북대학을 설립하고 산업발전과 신기술 도입에 투자하는 등 마적단 두목 출신이자 군벌 수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준수한 통치술을 보여주었다. 장쭤린의 적극적인 개발적책 덕에, 원래는 변방 지역의 한낱 깡촌에 불과하던 만주는 초보적인 수준의 산업화 단계에 접어들 수 있었다. 한편 만주 봉천군벌은 외교적으로는 한국 측과 직접 교섭하여 여러 협정을 맺으며 하나의 비공식적 외교주체로 인정받았는데, 이 때 장쭤린이 한국과 맺은 조약 중에는 양강 지역에서 항한운동을 전개하다가 그의 영지로 피신한 한족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해 한국에 송환하는 우백협정[13]도 있었다. 이는 그가 동북복치 이후 중국인들로부터 '애비 한간'이라고 극렬히 비판받는 이유가 되었다.[14]
장쭤린은 만주의 최고권력자가 되었지만, 그는 만주를 넘어 중국 전토를 다스리는 중국의 통치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장쭤린은 당시로써는 신무기인 전차와 비행기를 중국 최초로 도입하고 세 척의 방호순양함 등으로 이뤄진 당대 중국 기준으로는 강력한 함대를 조직하는가 하면 당대 중국 최대의 무기공장인 동삼성병공창을 건립하는 등 군사력 증대에 노력했다. 이후 장쭤린의 봉천군벌은 안직전쟁과 직봉전쟁, 직봉풍전쟁 등을 거치며 관내[15]로 진출,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준이 되었다. 이후 장쭤린이 중국의 중앙정부였던 베이징 북양정부의 국가원수인 육해군대원수에 취임하여 북양정부를 장악하자 봉천군은 남진하여 1925년에는 중국 화북지방과 중국의 경제중심지인 상하이까지 지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봉천군벌의 좋은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혁명세력인 중국국민당[17]의 긍지높은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선포해 광둥에서부터 중국 전역을 평정하면서 북진하자, 대의도 없고 사기도 낮은 장쭤린의 봉천군벌군은 국민혁명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만주에 상당한 이권을 가진 한국과 일본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만주까지 진격해 만주 이권을 회수할 것을 우려해 국민당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장쭤림은 관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베이징의 각종 보물과 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는 북양정부의 내각을 대동해 그의 근거지인 만주로 퇴각했다. 이를 양부천봉(洋府遷奉)[18]이라 부른다. 베이징에 입성한 국민혁명군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만주로 진입하지 않았고[19], 장쭤린은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원래 영지인 만주를 계속 다스릴 수 있었다. 또한 장쭤린이 북양정부의 국가원수였다는 점과 북양정부 내각의 대부분이 물리적으로 봉천으로 이동했다는 점은 현대 만주 정부가 북양정부의 후신을 자처하는 명분이 되었다.
비록 베이징에서 천하를 호령하던 과거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장쭤린에게는 아직 많은 것이 있었다. 그가 개발한 영지이자 그의 본거지인 만주가 남아있었고, 그가 손수 키워낸 군대가 남아있었으며, 어찌 되었든 그의 뒤를 봐주며 그를 원조하는 한국이라는 지원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베이징에서 가져온 온갖 보물과 문화재도. 강철같이 단단한 멘탈의 서유자얐던 장쭤린은 와신상담하며 다시 정력적으로 만주를 통치하였다. 하지만 정력이 다소 지나쳤던 것인지, 양부천봉 5개월 후인 1928년 11월, 여섯째 부인과의 관계 도중 복상사로 사망했다.
청천백일의 깃발 아래
장쭤린이 죽자 그의 부인들과 부하들은 장쭤린의 호화로운 침실에서 그의 자필로 적힌 유서를 발견했다. 유서에는 그의 아들인 장쉐량을 후계자로 삼아 유고시 그에게 자신의 권력을 상속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에 봉천군 육군대장 장쉐량이 봉천성독판 겸 동삼성보안총사령에 취임하면서 만주는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만 봉천군벌의 원로들과 고위관리들은 우려섞인 모습으로 장쉐량을 보았는데, 이는 플레이보이이자 한때 아편까지 했던 장쉐량이 그의 부친만큼의 지도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했기 때문이다.
한편 장제스가 주도하여 북벌을 완수한 중국국민당은 초짜 '동북왕' 장쉐량에게 회유와 압박을 번갈아 사용하며 중국국민당 주도의 국민정부에 복속하여, 북양정부의 깃발인 오색기를 국민정부의 깃발인 청천백일만지홍기로 바꾸어 달 것(역치, 易幟)을 요구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른바 '혁명외교'를 표방하며 반제국주의 노선을 걷던 중국국민당이 만주에까지 손을 뻗게 되면, 두 번의 극동전쟁으로 확보한 만주 이권이 상실할 것을 우려해 장쉐량의 역치에 반대했다. 장쉐량은 영리하게도 한일의 역치에 대한 반대를 국민정부와의 협상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했다. 장쉐량은 장제스와의 협상에서 자신의 만주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보장받아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데에 성공했으며, 한국과 일본에게도 역치가 발생해도 만주의 실질적 지배자는 자신이라고 설명하며 안심시켰다. 결과적으로 1929년 장쉐량의 봉천군벌은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게양하고 국민정부에 복종을 선언함으로써 동북역치가 발생하였으나, 장쉐량은 외교술로 중국 국민정부와 한일 사이에서 만주의 자치권을 지켜내는 데에 성공했다.[20]
봉천 시내 (1933) |
하지만 남은 전간기 10여년은 장쉐량과 봉천군벌에게도, 만주 민중에게도 그닥 유쾌한 시간은 아니었다. 대공황의 여파가 만주에 불어닥치면서, 근근히 산업화를 진행해나가던 만주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무역량의 감소로 만주의 산업생산량은 감소하였고, 회사들이 문을 닫거나 직원들을 해고하면서 실업률이 폭증했다. 실업자들은 일용직 노동자나 부랑자, 심할 경우 도적이 되며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이로 인해 북양정부를 가장한 봉천군벌는 경제 침체로 세수는 감소하는데 마적단의 창궐과 범죄 폭증으로 인해 치안유지비가 증가하며 재정 적자에 빠져들었다. 더군다나 봉천군벌의 물주인 한국마저 대공황에 허덕이고 있는데다가 사회당 집권으로 군부의 쿠데타 계획에 대한 소문이 무성한 등 도저히 봉천군벌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봉천군벌은 뾰족한 방책 없이 1930년대 후반을 맞이하게 된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봉천군벌은 소련의 위협을 체감하고 있었다. 원래 봉천군벌은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세력권을 넓히려 만몽국경에서 몽골인민군을 도발했는데, 이에 소련-몽골 동맹군에게 할힌골에서 크게 깨지면서 소련의 군사력을 몸소 체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제가 침체에 접어들고 재정적자가 누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봉천군벌이 소련군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군비확장에 나서는 것은 무리였다. 이후 소련의 침공으로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군은 한국-봉천-녹오 연합군을 격파하며 만소국경을 넘어왔다. 더군다나 연합군의 주력인 한국은 일본의 기습 선전포고와 남도 상륙으로 인해 봉천군을 적극 지원하지도 못했다. 나름 잘 무장되었던 봉천군벌 중앙군은 소련군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는 데 성공했지만 지방군은 말그대로 와해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만주 제2의 도시인 하얼빈에서까지 전투가 벌어짛 정도로 전선이 뒤로 밀렸고, 장쉐량은 봉천을 버리고 한국으로 망명하는 것까지 고려할 지경이 되었다. 봉천에게는 다행히도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은 앵커리지 조약으로 전쟁에서 이탈, 봉천군벌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봉천군벌은 일본군과 싸우는 한국군을 지원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
만주왕 장쉐량
봉천군벌은 국민당의 2차 북벌, 세계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등 숱한 고난과 역경을 버텨내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봉천군벌에게는 마지막 역경이 남아있었으니 바로 장제스의 국민정부였다. 반장전쟁으로 축출되었던 장제스는 십수 년 만에 화려하게 복귀, 여전히 군벌이 난립하던 중국 본토를 완전히 통일했다. 중국계 군벌들 중 장제스에게 완전히 복속되지 읺은 세력은 만주의 봉천군벌이 유일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장제스는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에게도 원한이 있었다. 동북역치 때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만주의 통치권을 인정해줬지만 반장전쟁 당시 장제스가 청한 지원요청을 장쉐량이 거부했기 때뮨이다. 장제스는 중국 본토를 통일한 직후부터 봉천군벌을 향해 군벌을 해체하고 국민정부에 복속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봉천군벌은 이미 1929년의 동북역치로 만주는 국민정부의 통치를 받는 땅이 됐다고 항변했지만, 국민정부는 봉천의 말장난을 받아줄 이유가 없었고 무력사용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며 봉천을 압박했다.
봉천군벌이 계속해서 국민정부의 압박을 말장난으로 무마하려 하자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장제스는 곧 그가 초봉작전이라고 이름붙인 침공을 개시할 것을 선언하고 전쟁준비에 착수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봉천정부는 각국에 장제스의 침공계획을 외교적으로 저지해줄 것을 호소했으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이에 봉천군벌은 동북역치 당시 스스로 해산한 북양정부를 부활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정부임을 자처했으나 이미 절대다수의 국가가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중국 유일의 정부로 인정한 상황에서 봉천군벌의 외교전은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나마 봉천군벌의 물주인 한국과 그 맹우인 녹오가 북양정부를 승인할 뜻을 밝혔지만 양국 모두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상태라 국가 재건에 여념이 없었고, 지친 국민들도 더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아 한국과 녹오의 지원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봉작전 개시를 몇 주 남겨두고 장제스가 급사하면서 국민정부의 초봉작전은 취소되었고, 봉천군벌은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만주에서 명맥을 유지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북양정부의 부활과 함께 대총통에 취임한 된 장쉐량은 명실상부한 '만주왕'이 되었다. 하지만 장쉐량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는 그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밖에서는 장제스 사후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장징궈의 중국 남경정부가 중국통일의 마지막 단추인 만주를 합병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안에서는 낙후된 경제, 국민당, 중화민족주의자들의 체제 위협에 맞서싸워야만 했다. 이에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능력만큼은 비상한 장쉐량은 두 가지 카드를 꺼내들었으니, 하나는 경제개발이며 다른 하나는 북양사상이다. 장쉐량의 국가주도 경제개발의 경우, 민중이 등 따숩고 배부르면 구태여 위험을 감수해서 반정부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 하에 결정된 것이었다. 북양정부는 경제개발정책을 총감독할 기관인 국가경제위원회를 조직하고 국가자본주의적 개발정책을 밀어붙였다. 한편 북양사상은 동북 지역주의, 연성자치론, 보경안민론 등을 조합한 사상으로, 각종 논리와 근거로 화려하게 포장되었으나 요약하자면 동북은 중국 본토와 분리되어 있어야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북양정부는 학교와 군대에서 북양사상을 교육함으로써 민중을 친정부적 사상으로 무장시키고 중국국민당의 반북양, 중화통일 공작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장쉐량과 북양정부에게는 다행히도, 그 두 정책은 상당히 좋은 효과를 보여주었다. 수출중심경제를 건설하기로 계획한 만주는 농산물과 광물을 수출해 확보한 여유자금과 한국으로부터 제공받는 거액의 차관을 토대로 경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고, 만주에서 생산된 경공업 제품들은 한국을 통해 국제시장에 수출되어 만주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또한 내부 통제에도 어느 정도 성공하여서,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중화민족주의 지하조직들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성과들 덕에 1960년대 만주는 나름 번영의 시간을 보냈고, 이 시대를 장쉐량의 호를 따 의암성세(毅庵盛世)라고 부른다.[21] 장쉐량은 이 시기 만주의 발전상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북양정부가 남경정부와의 경쟁에서 승리했거나 최소한 호각임을 확신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뒤이은 10년 남짓은 장쉐량에게도, 만주의 민중에게도 아름답지 못한 시간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며 기존의 경공업 중심 투자의 성과가 점차 감소하면서 경제성장이 조금씩 둔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 비중을 높여 경제성장률을 다시 끌어올리고자 하였는데, 하필이면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발생했다. 중화학공업은 경공업보다 훨씬 많은 석유를 필요로 했고, 유가의 폭등은 경제 둔화와 심각한 물가상승 그리고 정부의 재정적자를 유발했다. 이를 틈타 친국민당 지하조직들이 또다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고, 관공서와 국가요인들을 상대로 사보타주와 테러 공작을 벌이면서 치안마저 악화되었다. 이렇듯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한 침체기를 맞은 1970년대를, 또다시 장쉐량의 호를 따 의암난세(毅庵亂世)라고 부른다.
장쉐쓰의 영정혁명
이전에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일종의 족벌정치를 지향하던 장쉐량은, 1970년대에 이르러 점차 자신의 가족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며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장쉐밍, 장쉐쓰 등 장쉐량의 형제들 중 유능한 이들이 정부와 군부의 고위직을 영임했는데, 장쉐쓰는 장쉐량과는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장쉐량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장쉐쓰는 자신과 의견을 공유하는 여러 만주군 고위군관들을 포섭하였고, 사회 혼란이 심화되는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마침 한국 정부 역시 장쉐량이 더이상 만주의 지도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장쉐쓰 일파의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도 묵인하였다. 마침내 1977년 10월 26일, 장쉐쓰는 봉천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장쉐량은 쿠데타군의 압박에 굴복해 반강제로 대총통직에서 하야했고, 곧 대흥안령의 대총통 여름별장에 연금되었다. 당시 부총통이었던 양이천이 대총통직을 승계하여 취임했으나 그는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다. 실질 권력은 장쉐쓰와 정변 주도자들이 주축이 된 국가재건최고회의에게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주석은 장쉐쓰였으므로, 장쉐쓰가 만주의 최고권력자가 된 것이었다. 장쉐쓰는 장쉐량이 6년으로 연장한 대총통 임기를 5년으로 줄이는 헌법개정을 단행하였고, 양이천의 임기 종료를 앞두고 치러진 제6회 대총통 선거에 무소속으로 단독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대총통직에 당선된 장쉐쓰는 정치개혁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세력을 뒷받침할 정당인 협화당을 창당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온건 성향의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반정부매체에 대한 탄압적 조치를 완화하거나 취소하는 등, 그동안 장쉐량 정권 하에서 탄압받던 재야 민주세력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억눌료있었던 민주화에 대한 논의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일각에서는 중화민족주의에 입각한 중국통일론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장쉐쓰는 통일론은 끈질기게 탄압하면서도 단순 자유화만에 대한 논의는 허용하면서 정국의 흐름을 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로 향하게끔 유도하였다. 1980년에는 최초의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외국 참관단의 감시 하에 민주적인 방식으로 실시되었고, 1984년에는 야당의 창당이 하용되어 여러 민주정당이 태어났다.
수년간 이어진 장쉐쓰의 개혁 방향은 명료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이에 보수파들은 장쉐쓰의 자유화정책에 반발하며 그를 축출하려고도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축출당하는 결과를 맞았다. 이는 민심이 명백히 장쉐쓰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침체기에 있었던 만주 경제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고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물가상승률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는 국제유가의 하락 등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동시에 장쉐쓰 정부의 유연한 경제정책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경재적 불황이 해소되자 사회 역시 점차 안정되었고, 국민들은 장쉐쓰에게 '일단은'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국민의 지지는 장쉐쓰가 자신감을 가지고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 마침내 1987년에는 민주화세력과 정부 및 여당의 협상 끝에 국회 양원과 대총통에 대한 민주적 선거가 합의되었고, 이듬해인 1988년에는 민정개헌이 단행되어 만주는 역사상 최초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가지게 되었다. 장쉐쓰는 차기 대총통 선거에 불출마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박수받으며 떠나는 대총통이자 국가원로가 되었다. 이러한 장쉐쓰의 정치개혁은 혁명에 버금가는 위업을 조용하고 차근차근 달성했다 하여 영정혁명(寧靜革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경제
산업 구조
무역
주요 기업
- 한만 그룹 : 만주 최대 규모의 기업집단. 1928년 한국 정부가 신생 독립국인 만주의 경제를 개발하기 위해 국가 자본으로 설립한 기업집단이다. 현재도 한국 자본이 회사를 지배하고 있다. 식품, 철강, 유통, 교통, 금융 등의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있다.
만주 냥
| 현용 은행권 4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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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화폐 단위는 냥(兩, liang, ᠯᡳᠠᠩ)이다. 어감이 귀엽다. 사극에서 나오는 전통적인 화폐 단위인 바로 그 "냥"이다. 만주중앙은행에서 냥화 표기 화폐를 전량 발행한다. 주화에는 10냥, 50냥, 100냥 이렇게 3종의 동전이 있으며, 은행권에는 500냥, 1,000냥, 5,00냥, 10,000냥 이렇게 4종의 지폐가 있다. 지폐 모델은 500냥부터 차례대로 빙지, 잉찬리, 사오홍, 구웨이쥔이다. 만주는 1950년까지는 중국 위안을 썼지만 1950년의 동북복치로 대총통애 취임함 장쉐량은 동삼성은행을 만주중앙은행으로 개칭해 중앙은행으로 삼고 화폐개혁을 단행, 중국 위안을 북양정부 냥(만주 냥)으로 교체했다.
과거에는 냥의 하위 단위로 문과 전이 있었으나 지속적인 인플레로 인해 쓰이지 않는 단위가 되었고 각각 1996년과 1961년에 폐지되었다. 1문은 1/100냥, 전은 1/10,000냥에 해당했다.
경제위기론
정치
| 만주의 기본 정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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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자유지수 | 79점 | 자유로움 |
| 언론자유지수 | 73.64점 | 결함 있음 |
| 민주주의지수 | 7.47점 | 결함 있는 민주주의 |
만주는 민주주의지수에서 7.47점을 기록하여, 한국, 남일본, 이스라엘에 이어 어시아에서 네 번째로 민주적인 국가로 평가받는다.
만주는 민주적 공화국이며, 이원집정부제와 양원제를 채택중이다. 대총통이 국가원수를, 국무총리가 행정수반을 맡아 행정권력을 분점하며, 국회는 상원인 참의원과 하원인 중의원으로 나뉘어 입법권을 분점한다. 행정부에서는 대총통이 국무총리에 비래 약간의 우위를 아지고 있는, 의원내각제보다는 대통령제에 조금 더 가까운 이원집정부제라고 볼 수 있다.
헌법
만주 헌법(满洲宪法)
대총통
제N대 만주 대총통 비징취안 |
| ' 만주 헌법 제조 (제장 대총통) |
입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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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국회의사당 |
사법부
행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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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 10부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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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국무원 중앙청사 |
국무원(國務院, State Administrative Board)은 만주의 헌법기관이자 행정부다. 국무원의 밑에는 12개 부와 여러 직속기구들이 폄제되어 있다. 국무원의 장은 국무총리이며 부의 장은 총장이다.
조직도와 부서 명칭에서 알 수 있듯 한국과 일본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
내각
국무총리
만주 국무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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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대 만주 국무총리 류궈중 |
| ' 만주 헌법 제64조 (제5장 행정부) |
| ' 만주 헌법 제65조 (제5장 행정부) |
국무총리는 국무원의 장으로, 만주의 내각수반이다. 국무총리는 국무원 각부를 통할하며 국가행정에 대한 책임을 진다. 국무총리의 중임에는 제한이 없으나 재임기간의 총합이 10년을 넘어서는 않된다. 국무총리는 대총통애 의해 지명되어, 국회 양원의 표결을 거쳐 임명된다. 국무총리는 국회에 대해 책임을 지며, 국회에 의해 내각불신임을 당했을 때 내각총사퇴로 직에서 사임해야 한다.
현임 국무총리는 보수정당인 협화당 소속의 류궈중이다. 제32대 총리로, 2022년부터 재임중에 있다.
정당
- ■ 협화당: 만주의 우익 보수정당이자 집권여당. 제2대 대총통 장쉐쓰가 패권정당을 건설할 요령으로 만든 정당이다. 민주화 후에도 튼튼한 조직력
과 야권의 분열덕에 장기집권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보수주의 성향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온건한 중도 성향이다. 또한 만주의 독립과 중국과의 통일 양쪽 모두에 반대하는 양독 성향이다. 주 지지층은 중산층과 소시민 계층이다. - ■ 신흥당: 만주의 리버럴 정당이자 최대 규모의 야당. 자유주의 빅텐트 성향을 띤다고 평가받는다. 사회민주당, 민본당과 만주신당 탈당파가 창당했다. 잠시 집권에도 성공했으나 협화당에 밀려 실권했고 만성적으로 저조한 지지율과 수권 경험 부족, 빈약한 지역조직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인 접근으로 나름 우호적인 편이지만 구성원에 따라 다르다.
- ■ 만주독립당: 만주의 만독 성향 진보주의 정당이자 현재 제2야당. 진보주의 정당으로 노동의제와 소스자 인권에 관심이 많으며, 만주의 독립 선포를 주장하는 만독 진영의 대표주자다. 주 지지층은 도시민, 청년층 그리고 외국의 화교다.
- ■ 중화민족일심회: 만주의 중화민족주의 급진우파 정당이자 현재 제3야당. 중국국민당의 자매정당으로, 중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매우 중시하며 만주 친중 진영을 실질족으로 이끈다. 사회적으로 매우 보수적이며 국가자본주의, 국가협동조합주의적 경제성향을 띤다.
- ■ 만주신당: 만독 보수주의 정당이자 현재 제4야당. 사회적으로 강한 보수주의 성향이지만, 진보정당인 만주독립당과 마찬가지로 만주 독립진영에 속해있다.
- ■ 인민역량: 중도좌파 성향의 정당이자 제5야당. 소련의 지원을 받던 사회주의 지하정당인 만주인민혁명당의 직접적인 후계정당이다. 지금은 쩌리가 되었으나 여러 노조의 지지로 지역기반은 꽤 튼튼한 편이다. 협화당과 마찬가지로 양독 성향이다.
- ■ 몽민권익연합: 몽골계 소수민족 정당. 몽골계 만주인의 권리를 옹호하며 몽골족의 이익을 지지한다면 그 어떤 정당과도 손을 잡는다. 주 활동무대는 몽골인들이 많이 사는 만주 서부 내몽골 지역이다.
- ■ 실정원탁: 자유보수주의 중도정당. 제3의 길을 표방하며, 중국과 한국의 대립과 무관한 탈이념적 민생우선을 내세운다. 다만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
헌법재판부
헌법재판위원회는 만주국의 헌법에 따는 여러 업무를 맡는다. 총리대신과 대법관 등의 고위공직자 탄핵권, 위헌정당 해산권, 위한법률 심사권 등을 권한으로 가지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헌법재판위원회는 총 9인의 헌법재판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ㅇㅇㅇㅇ 헌법재판관의 임기는 5년이며 중임은 불가능하다.
황제
제4대 만주국 황제 아이신기오로 사인 |
| 만주국은 지고하오시고 존귀하오신 황제 폐하의 다스림을 받는 입헌군주국이다.[22] 만주국 헌법 제1조 1항 (제1장 총강) |
| 1. 만주국 황제는 국가의 원수이자 모든 신민의 통치자이다. 2. 만주국 황제는 불가침이며 모독당하지 않는다. 3. 만주국 황제는 만주국 국군을 통수한다. 만주국 헌법 제8조 (제2장 황제) |
황실
황궁
| 아만황궁 |
황제 직속 기관
참의부
만주국 참의부(滿州國參議府, ᠪᠣᠣ ᡤᡳᠰᡠᡵᡝᡵᡝ ᠶᠠᠮᡠᠨ[23] , Privy Council of Manchuria)은 만주 황제를 보좌하는 기관으로, 사회 각계각층의 명망있는 유력자와 원로 중 에 임명된다. 정원은 100명이며 전원 황제가 임명한다. 추밀원 의원의 임기는 10년이며 중임이 가능하다. 추밀원은 헌법재판관 후보를 선출하고, 입법원이 제정한 총리선출안을 황제에게 주청할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이 문서에서는 황제의 하위 항목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정치기관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참의부가 타국의 상원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보기도 하지만 참의부는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자문기관일뿐 의회나 그에 상응하는 기관이 아니다.
금위대
군주제 폐지 운동
사회
민족 구성
교육
치안
기념일
문화
언어
요리
음악
영화
스포츠
군사
환경
춥다. 특히 겨울엔 더럽게 춥다.
겁나 춥다!!
외교
만주는 중화민국의 정통정부를 자처하지만, 1928년 봉천군벌의 북양정부가 봉천으로 파천한 북부천봉 이후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중화민국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람에 북부천봉 이후로는 대부분의 국가와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이후 1929년 동북역치로 북양정부가 해산되고 만주가 국민정부에 명목상으로 복속하면서 봉천군벌의 외교 부분이 완전히 폐지되었다.[24]
1950년 동북복치로 만주의 봉천군벌은 북양정부의 부활을 선포해 다시 북양정부가 중국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천명했지만, 동북복치 저체가 장제스의 만주 침공에 대응하려는 일종의 발악이었으며 이미 남경정부와 만주 북양정부의 국력 격차가 현저히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런 국면에서 중국 남겅정부와 척을 지면서까지 북양정부를 중국의 정통정부로 승인한 국가는 배화정책을 펼치던 한국과 그 맹방인 녹오, 그리고 바티칸의 교황청 이렇게 3개국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에 들어서 한중관계가 개선되면서 한국은 중국 남경정부와 수교, 만주 북양정부와 단교를 선언했고, 녹오도 곧 그 뒤를 이었다. 이후 만주는 바티칸 1개국과의 수교만을 유지하다가 21세기 들어서 똑같은 미승인국 처지인 소말릴란드와 상호수교함으로써 수교국이 2개국으로 늘었다.
다만 수교국이 2개국이라고 해서 만주에 외국 외교공관이 그 2개국의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미국, 신소련 등 총 58개국이 대표부 등의 이름으로 63개소의 비공식 외교공관을 설치해 만주와 비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만주 역시 전세계 70개 국가에 대표사무소를 개설하 비공식 외교사무를 처리한다.
한만관계
만오관계
만중관계
만소관계
각주
- ↑ 사실상의 중국어 동북방언
- ↑ 청톈, [[하얼빈 (개화)|]], [[창춘 (개화)|]]
- ↑ 소말릴란드도 만주와 비슷한 처지의 미승인국이다. 소말릴란드 역시 수교국이 만주와 에티오피아로 2개국 뿐이다.
- ↑ 대한민국과 중화민국남경정부와의 수교로 단교. 다만 하술하듯이 한국과의 비공식적 외교공관은 상호 수립되어있다.
- ↑ mc인 모나코는 mn을, mn인 몽골은 mg를 쓴다
- ↑ 1, 2, 3위는 각각 한국, 남일본, 이스라엘
- ↑ 다만 북양정부라는 명칭도 남경정부라는 명칭도, 그렇게 불리는 양측 스스로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명칭은 아니다.
- ↑ 만주 측은 동북역치로 북양정뷰를 자진해산하고 국민정부 밑에 복속된 적이 있다.
- ↑ 다만 이는 개개인이나 정당의 정치적인 경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 ↑ 10.0 10.1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국기로 채택
1929년 동북역치로 폐지 - ↑ 11.0 11.1 동북복치로 재채택
- ↑ 중국의 대문호인 그 루쉰이 맞다.
- ↑ 협정에 조인한 한국측 대표가 당시 양강관리사이자 훗날 전시총리가 되는 김창암이다. 우백협정이라는 명칭도 장쭤린의 호인 우정과 김창암의 호인 백범의 앞자를 따서 지어졌다.
- ↑ 한편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은 '새끼 한간' 별명을 얻게 된다.
- ↑ 산해관의 안쪽이라는 말로, 중국 본토를 의미한다.
- ↑ 좌우의 두 아이는 각각 그의 다섯째 아들인 장쉐썬과 야섯째 아들인 장쉐준이다. 사진 촬용 장소는 베이징 중난하이의 대총통부다.
- ↑ 지금이야 중국국민당이 철권통치를 행하는 수구 독재정당이 되었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국민당은 반제국주의 성향의 혁명정당이었다.
- ↑ 북양정부를 봉천으로 옮긴다는 뜻이다.
- ↑ 자세한 내용은 양부천봉 문서 참조
- ↑ 장쉐량의 마인드 자체는 전군대 봉건영주의 그것이라도 그가 통념과는 달리 영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륙의 선조 - ↑ 의암성세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는 노래로는 진력동북이 있다.
- ↑ 헌법의 나머지 부분과는 달리, 헌법 전문과 1장 총강에서는 황제에 대해 극존칭을 사용한다.
- ↑ 발음 : 보오 기수러러 야문 (boo gisurere yamun)
- ↑ 다만 하얼빈의 소련 영사관, 봉천의 한국 영사관 등 외교공관 등이 봉천군벌 영내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