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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5.18 민주화운동 (90년 체제)|5.18 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90년 체제)|언론통폐합]], [[전두환 정부 (90년 체제)|전두환 정부]]의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부정부패 권력형 비리] 등 과거 군사 정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제5공화국 청문회 (90년 체제)|국회 청문회]]가 TV 생중계로 보도되면서 전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ref>당시 청문회에 출석한 군부 정권 인사들은 변명조로 일관하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TV 중계를 시청하던 국민들의 혈압을 올렸는데, 질문자로 나선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그저 호통만 치는 게 다여서 사람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하지만 풍부한 자료 조사와 구체적인 심문 전략을 준비해 온 몇몇 의원들은 예리한 질문으로 증인들을 숨도 못 쉬게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들은 바로 [[노무현 (90년 체제)|노무현]], [[이인제 (90년 체제)|이인제]], [[이해찬 (90년 체제)|이해찬]], [[박찬종 (90년 체제)|박찬종]], [[이상수 (90년 체제)|이상수]], [[김광일 (90년 체제)|김광일]], [[이철 (90년 체제)|이철]] 등으로, 이들은 청문회 후에도 활발한 의정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들 중 박찬종만 당시 기준으로 4선의 중진(이후 한 번 더 당선되어 5선 의원을 지냈다.)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초/재선이었지만 이때의 인기와 의정 활동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한국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ref> 곧바로 [[전두환 (90년 체제)|전두환]] 일가와 측근들의 비리에 대한 [[대한민국 검찰청 (90년 체제)|검찰]]의 수사로 전두환의 수하들 수십여 명이 구속되거나 정계에서 강제 퇴출됐으며 전두환은 [[백담사 (90년 체제)|백담사]]로 사실상 귀양을 떠나야 했다. 이와 함께 사회 각 분야에 민주화 분위기가 몰아치면서 국민 성금으로 [[한겨레 (90년 체제)|한겨레]]가 창간되었으며, [[KBS (90년 체제)|KBS]]와 [[MBC (90년 체제)|MBC]]는 그동안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땡전뉴스 독재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것을 반성하는 프로그램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뉴스비전 동서남북과 MBC 리포트 등 본격적인 시사 프로그램들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ref>전두환 정부 시절에 추적 60분과 레이다 11, MBC 리포트 같은 시사 프로그램이 있기는 했지만, 검열이 강했던 시절인지라 시시콜콜한(?) 사회 문제점을 다루거나 정권 계몽성 아이템을 다루는 수준이었고 정치나 경제 문제 같은 것은 감히 다룰 생각을 하지 못했다.</ref> | 여기에 [[5.18 민주화운동 (90년 체제)|5.18 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90년 체제)|언론통폐합]], [[전두환 정부 (90년 체제)|전두환 정부]]의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부정부패 권력형 비리] 등 과거 군사 정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제5공화국 청문회 (90년 체제)|국회 청문회]]가 TV 생중계로 보도되면서 전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ref>당시 청문회에 출석한 군부 정권 인사들은 변명조로 일관하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TV 중계를 시청하던 국민들의 혈압을 올렸는데, 질문자로 나선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그저 호통만 치는 게 다여서 사람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하지만 풍부한 자료 조사와 구체적인 심문 전략을 준비해 온 몇몇 의원들은 예리한 질문으로 증인들을 숨도 못 쉬게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들은 바로 [[노무현 (90년 체제)|노무현]], [[이인제 (90년 체제)|이인제]], [[이해찬 (90년 체제)|이해찬]], [[박찬종 (90년 체제)|박찬종]], [[이상수 (90년 체제)|이상수]], [[김광일 (90년 체제)|김광일]], [[이철 (90년 체제)|이철]] 등으로, 이들은 청문회 후에도 활발한 의정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들 중 박찬종만 당시 기준으로 4선의 중진(이후 한 번 더 당선되어 5선 의원을 지냈다.)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초/재선이었지만 이때의 인기와 의정 활동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한국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ref> 곧바로 [[전두환 (90년 체제)|전두환]] 일가와 측근들의 비리에 대한 [[대한민국 검찰청 (90년 체제)|검찰]]의 수사로 전두환의 수하들 수십여 명이 구속되거나 정계에서 강제 퇴출됐으며 전두환은 [[백담사 (90년 체제)|백담사]]로 사실상 귀양을 떠나야 했다. 이와 함께 사회 각 분야에 민주화 분위기가 몰아치면서 국민 성금으로 [[한겨레 (90년 체제)|한겨레]]가 창간되었으며, [[KBS (90년 체제)|KBS]]와 [[MBC (90년 체제)|MBC]]는 그동안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땡전뉴스 독재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것을 반성하는 프로그램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뉴스비전 동서남북과 MBC 리포트 등 본격적인 시사 프로그램들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ref>전두환 정부 시절에 추적 60분과 레이다 11, MBC 리포트 같은 시사 프로그램이 있기는 했지만, 검열이 강했던 시절인지라 시시콜콜한(?) 사회 문제점을 다루거나 정권 계몽성 아이템을 다루는 수준이었고 정치나 경제 문제 같은 것은 감히 다룰 생각을 하지 못했다.</ref> | ||
또 그동안 정권의 탄압 속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오던 노동자들이 1987년 6월 항쟁 직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 (90년 체제)|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점으로 봉기하여 경제 성장에 기여한 자신들의 대가를 요구하면서 전투적 노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맞물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90년 체제)|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수 노조 결성을 시도했으며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90년 체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약칭 경실련)이 등장하면서 시민 운동이 태동했다.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학생운동]권과 재야에선 그동안 금기시되던 [[남북통일 (90년 체제)|남북통일]] 논의에 불씨를 당기면서 [[1988년]]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이 벌어졌고, [[1989년]] 한 해에만 [[문익환 (90년 체제)|문익환]] 목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90년 체제)|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임수경 (90년 체제)|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90년 체제)|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90년 체제)|문규현]] 신부 등 여러 건의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방북 방북] 사건<ref>지금도 여전하지만 허락 없이 [[북한 (90년 체제)|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ref>이 일어났다. 즉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억압에 의해서 감춰졌던 열망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제히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 또 그동안 정권의 탄압 속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오던 노동자들이 1987년 6월 항쟁 직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 (90년 체제)|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점으로 봉기하여 경제 성장에 기여한 자신들의 대가를 요구하면서 전투적 노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맞물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90년 체제)|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수 노조 결성을 시도했으며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90년 체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약칭 경실련)이 등장하면서 시민 운동이 태동했다.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학생운동 학생운동]권과 재야에선 그동안 금기시되던 [[남북통일 (90년 체제)|남북통일]] 논의에 불씨를 당기면서 [[1988년]]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이 벌어졌고, [[1989년]] 한 해에만 [[문익환 (90년 체제)|문익환]] 목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90년 체제)|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임수경 (90년 체제)|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90년 체제)|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90년 체제)|문규현]] 신부 등 여러 건의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방북 방북] 사건<ref>지금도 여전하지만 허락 없이 [[북한 (90년 체제)|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ref>이 일어났다. 즉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억압에 의해서 감춰졌던 열망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제히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 ||
당연히 노태우 정부와 민주정의당, 검찰과 군부 등 국가 권력 기관들과 보수 언론 등의 기득권 세력들은 이런 상황을 매우 불안스럽게 보았다.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대통령중심제 권력의 정점에 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군대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모습에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여론을 살피고 야당과 타협하면서 정책을 펼치는 방식은 사뭇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쉬웠다. | 당연히 노태우 정부와 민주정의당, 검찰과 군부 등 국가 권력 기관들과 보수 언론 등의 기득권 세력들은 이런 상황을 매우 불안스럽게 보았다.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대통령중심제 권력의 정점에 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군대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모습에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여론을 살피고 야당과 타협하면서 정책을 펼치는 방식은 사뭇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쉬웠다. |
2025년 3월 9일 (일) 15:1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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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주당계·제3지대·보수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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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 민주정의당 (127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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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자유당 (278석)[1] | |
야당 | 평화민주당 (70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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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민주당 (59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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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공화당 (35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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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당 합당 四黨 合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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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22일, 4당 합당 발표 만찬 장면. 왼쪽부터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 (민주정의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 |
원인 | 제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정국 형성 10차 개헌 논쟁 |
결과 | 민주자유당 창당 10차 개헌 및 대한민국 제7공화국 출범 제13대 국회의 여대야소 정국 형성 대한민국의 일당우위제 형성 및 90년 체제의 성립 |
1.개요
당시 대한뉴스 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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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과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은 민주 발전과 국민 대화합, 민족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오로지 역사와 국민에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아무 조건 없이 정당법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정당으로 합당한다. 노태우 |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김영삼 |
그 분이 과연 민주화를 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을 가졌었는데 민주화를 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한 것으로 느꼈읍니다. 김대중 |
4당 합당(四黨 合黨)은 1990년 1월 22일 발표되어 그해 2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사건이다. 이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보유한 집권 여당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4당 합당의 여파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롯된 여소야대는 약 2년 만에 도로 여대야소가 되었고 합당에 반발하여 탈당한 일부 국회의원들이 창당한 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았으며 이전까지 호남 vs PK vs TK vs 충청 4자 구도로 이어져 왔던 지역정치 구도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대한민국에서 지역정치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2][3]
2.배경
2.1.당시 집권 세력의 정계 개편에 대한 동기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 치러진 동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양김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4] 때문에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애초부터 미약한 지지 기반 속에서 시작한 노태우 정부는 이듬해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례민주당 1석[5], 무소속 9석이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는 여소야대 국회를 불러오고 말았다.
1988년 5월 28일 원내 4대 정당 총재 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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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여소야대 상황과 강해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정치권에도 자연스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제도권 정치인 국회 운영에서도 항상 과반수를 차지하던 원내 제1당 위치의 집권 여당이 독식하던 국회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이때 처음 만들어졌고 모든 법률/예산 심사와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되었다. 4개 정당이 의석을 절묘하게 나눠가진 결과 어떤 정치 세력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여당의 날치기와 이를 막기 위한 야당의 국회 점거 농성, 일명 국회폭력이 일시적으로 없어졌던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각자의 원칙과 주장을 목청 높여 외치면서도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민주주의 정치 본연의 모습이 살아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여소야대 국면은 대한민국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도 많이 끼쳤다고 볼 수 있다.[6]
여기에 5.18 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전두환 정부의 권력형 비리 등 과거 군사 정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국회 청문회가 TV 생중계로 보도되면서 전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7] 곧바로 전두환 일가와 측근들의 비리에 대한 검찰의 수사로 전두환의 수하들 수십여 명이 구속되거나 정계에서 강제 퇴출됐으며 전두환은 백담사로 사실상 귀양을 떠나야 했다. 이와 함께 사회 각 분야에 민주화 분위기가 몰아치면서 국민 성금으로 한겨레가 창간되었으며, KBS와 MBC는 그동안 독재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것을 반성하는 프로그램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뉴스비전 동서남북과 MBC 리포트 등 본격적인 시사 프로그램들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8]
또 그동안 정권의 탄압 속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오던 노동자들이 1987년 6월 항쟁 직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점으로 봉기하여 경제 성장에 기여한 자신들의 대가를 요구하면서 전투적 노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맞물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수 노조 결성을 시도했으며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약칭 경실련)이 등장하면서 시민 운동이 태동했다. 학생운동권과 재야에선 그동안 금기시되던 남북통일 논의에 불씨를 당기면서 1988년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이 벌어졌고, 1989년 한 해에만 문익환 목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 여러 건의 방북 사건[9]이 일어났다. 즉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억압에 의해서 감춰졌던 열망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제히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노태우 정부와 민주정의당, 검찰과 군부 등 국가 권력 기관들과 보수 언론 등의 기득권 세력들은 이런 상황을 매우 불안스럽게 보았다. 권력의 정점에 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모습에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여론을 살피고 야당과 타협하면서 정책을 펼치는 방식은 사뭇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쉬웠다.
사회 곳곳에서 분출되는 다양한 목소리는 각 분야에서 군대식으로 조직되어 있던 기존 질서를 흔들기 시작했으며, 집권 세력은 이것을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내에 마땅한 차기 대권 주자가 없어서 정권 연장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상황이었다.[10] 여기에 노태우 대통령의 지지율도 제5공화국 비리 공개 및 1988년 서울 올림픽과 함께 들이닥친 부동산 가격 폭등과 물가 상승 등의 이유로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정부와 여당 입장에선 이만저만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위엄이 사라졌다", "정부가 사회 불만 세력에게 질질 끌려다닌다", "국회가 국가 경제를 발목을 잡고 있다", "공권력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등의 비판 보도가 나오면서 노태우는 물태우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에 노태우와 민주정의당은 이런 위기 상황을 한 방에 바꿀 만한 해결책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야당과의 합당을 통한 정계 대개편이었다.
2.2.야당들의 정계 개편에 대한 동기
사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여소야대로 끝난 후 1992년 차기 총선과 대선까지 지역 대립 구도에 기초한 4당 체제가 계속 갈 거라고 본 사람은 드물었다. 4당 체제에 만족하는 정치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독재에 익숙했던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은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모든 것을 야당과 협상해야 하는 여소야대 국면을 짜증스러워했다. 거기에 나머지 야 3당도 그렇게 상황이 순탄한 건 아니었다.
우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13대 총선에서 선전하면서 제1야당으로 부상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호남과 수도권내 호남 지역민 표 + 개혁적인 성향의 20~30대 친야권표[11]+비판적 지지의 진보표만으로는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한계점을 명확히 깨닫고 있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4자필승론이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했단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확고한 지지층을 지니고 있었지만 동시에 비토층도 적지 않아 확장성에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다.[12]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제2야당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고,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에게 뒤진 것이 온건하고 보수적인 이미지 때문에 고정 야당표를 놓쳐서라고 판단해 한동안 강경한 대여 선명 투쟁을 외쳤다. 실제로 제13대 대선에서 노태우는 올림픽 이후 국민 투표로 재신임을 묻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중간평가)을 내걸었는데,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은 즉각 실시를 끝까지 외쳤다. 그러나 민주정의당이 이에 대해 오락가락한 태도를 보여주던 가운데 오히려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중간평가에 반대해 투쟁에 큰 성과가 나지 못했다. 이에 김이 빠진 김영삼은 유신 본당이라 자처하던 김종필에게 접근해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의 합당 냄새를 피우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한편 상당 기간을 권력 핵심층[13]으로 살았던 김종필과 신민주공화당은 야당 생활이 달갑지 않았고, 박쥐 같다는 평을 많이 들어서 대중 호감도 역시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거기에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를 거치면서 의원내각제가 옳다는 신념을 가지게 돼 내각제를 외치고 있었지만 대중들의 확고부동한 대통령 직선제 지지 여론을 넘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온 지 불과 2~3년 정도 지난 시점이라 이때까지는 대통령 직선제가 곧 민주주의고, 의원내각제는 그들만의 야합이란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팽배했다.[14]
3.전개
4.여담
5.관련 문서
6.둘러보기
- ↑ 127+70+59+35=291석이지만 평화민주당의 김길곤, 김근태, 노승환, 박종태, 신기하, 이교성, 이찬구, 이해찬, 이철용, 장종태 전 국회의원과 통일민주당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이기택, 장석화 전 국회의원, 신민주공화당 김현 전 국회의원이 참여하지 않았고 무소속 유한열, 정몽준 전 국회의원이 입당하며 최종적으로 291-15+2=278석이 되었다.
- ↑ 하지만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을 대표로 한 영호남 지역갈등이 20년 간 뿌리깊게 박힌 터라 이 부분은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다.
- ↑ 수도권, 강원도, 제주도는 한 지역 정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약했고 특히 강원도와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큰 관심을 못 받고 있다.
- ↑ 둘은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김대중과 동교동계의 평화민주당과 김영삼과 상도동계의 통일민주당으로 나눠진다.
- ↑ 이것은 전라남도 신안군에 출마했던 평민당 한화갑 후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서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자 당선 후 평민당 입당을 조건으로 한겨레민주당의 박형오를 밀어준 결과였다. 박형오는 선거 이후 약속대로 평민당에 입당했다.
- ↑ 실제로 김대중은 훗날 자서전에서 4당 합당 이전까지의 국회 운영과 노태우 정부의 국정 운영을 협상과 타협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줬다며 굉장히 고평가했다.
- ↑ 당시 청문회에 출석한 군부 정권 인사들은 변명조로 일관하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TV 중계를 시청하던 국민들의 혈압을 올렸는데, 질문자로 나선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그저 호통만 치는 게 다여서 사람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하지만 풍부한 자료 조사와 구체적인 심문 전략을 준비해 온 몇몇 의원들은 예리한 질문으로 증인들을 숨도 못 쉬게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들은 바로 노무현, 이인제, 이해찬, 박찬종, 이상수, 김광일, 이철 등으로, 이들은 청문회 후에도 활발한 의정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들 중 박찬종만 당시 기준으로 4선의 중진(이후 한 번 더 당선되어 5선 의원을 지냈다.)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초/재선이었지만 이때의 인기와 의정 활동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한국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 ↑ 전두환 정부 시절에 추적 60분과 레이다 11, MBC 리포트 같은 시사 프로그램이 있기는 했지만, 검열이 강했던 시절인지라 시시콜콜한(?) 사회 문제점을 다루거나 정권 계몽성 아이템을 다루는 수준이었고 정치나 경제 문제 같은 것은 감히 다룰 생각을 하지 못했다.
- ↑ 지금도 여전하지만 허락 없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 ↑ 당시 차기 대권 주자 여론조사를 보면 야권의 김영삼과 김대중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던 상황이었다.
- ↑ 이 20~30대 친야 지지자들이 바로 2020년대의 86세대와 상당수 겹친다.
- ↑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민주화 세력의 표도 나눠가지게 되니 평민당 입장에선 다음 선거를 이대로 진행하기엔 불편한 상황이였다.
- ↑ 이미 35세에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권력의 실세가 되었고 최연소인 백두진 전 국무총리의 뒤를 이어 45세에 두 번째로 젊은 총리를 지냈으며, 국회의원도 역대 최다선인 9선을 했다.
- ↑ 5공 말 전두환의 셈법이 민주화 요구는 지방자치제로 달래고 본인은 의원내각제 하에서 집권당 총재와 국무총리로 실권을 쥐는 블라디미르 푸틴 2.5기식 장기 집권 방안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 의원내각제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나빴다. 현재 일본 자유민주당이 지지율이 높을 때마다 해산을 해서 계속 원내 다수당 자리를 유지하고 자민당 총재를 무한정 총리로 하는 방식으로 과거에 55년 체제가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깨질 때까지 38년 동안 지속되었고 아베 신조가 8년 간 장기 집권한 것을 보면 당시 국민들의 걱정과 반발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