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탈리아 (필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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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탈리아는 41년간의 역사 동안 입헌군주제와 형식적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왕권과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1983년까지는 사실상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했다. 이후 1985년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1986년 국체 전환하며 왕정을 폐지했고, 1987년 연방 헌법 개정을 통하여 북이탈리아에 흡수통일되어 멸망하였다.
남이탈리아는 41년간의 역사 동안 입헌군주제와 형식적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왕권과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1983년까지는 사실상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했다. 이후 1985년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1986년 국체 전환하며 왕정을 폐지했고, 1987년 연방 헌법 개정을 통하여 북이탈리아에 흡수통일되어 멸망하였다.
== 역사 ==
=== 초기 (1946~1957) ===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이탈리아 반도는 연합국의 점령 하에 놓였다. 1946년 초,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이탈리아 반도 역시 분할 점령의 대상이 되었다. 3월에 체결된 [[얄타 협정]]에 따라 이탈리아는 로마 북쪽 3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북부는 소련과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의 영향 하에 [[북이탈리아 (필연)|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남부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왕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1946년 6월 12일,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을 계승하는 남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었다. 초대 국왕에는 사보이아 왕가의 움베르토 2세가 즉위했으며, 수도는 로마로 정해졌다. 초대 총리에는 전쟁 중 반파시스트 활동을 벌였던 가톨릭 정치인 [[프란체스코 데 갈로]]가 임명되어 기독교민주인민연합 정부를 이끌었다. 건국과 동시에 실시된 1946년 제헌의회 선거는 남이탈리아의 정치 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거였다. 총 5개 정당이 경쟁한 이 선거에서 데 갈로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인민연합이 77석(44.8%)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단독 과반에는 실패하여 이탈리아 사회민주당(23석, 13.4%)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 남이탈리아 지부]]가 55석(32.0%)을 획득하여 강력한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이는 전후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 속에서 좌파 이념에 대한 상당한 지지가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공화당(11석)과 시칠리아 인민당(6석)은 각각 반왕정 세력과 지역주의 세력을 대변했다. 이에 따라 데 갈로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경제-정치적 안정을 요구하는 '반공 친서방 노선'을 명확히 했다. 1947년 체결된 [[이탈리아-미국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군의 나폴리, 타란토 기지 주둔을 허용하고, 경제적으로는 마셜 플랜의 수혜국이 되어 전후 복구에 박차를 가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 남이탈리아 지부]]를 견제하기 위해 '국가안보법'을 제정했고, 교육 정책에서는 가톨릭 교육을 강화하여 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경제 정책에서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되, 주요 기간산업은 국가가 관리하는 혼합경제 모델을 채택했다.
=== [[페루자 위기]](1948)와 [[로마 노동자 항쟁]](1949) ===
남이탈리아 건국 초기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1948년 3월의 [[페루자 위기]]였다. 북부 공산 정권이 로마 라인 경계 지역인 페루자에 대해 기습적인 군사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이탈리아 인민군|북부군]]은 소련제 주피터 미사일로 4일간 페루자를 포격했고, 이에 남이탈리아 왕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양측 합계 262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민간인 43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비록 남이탈리아가 영토 방어에 성공했지만, 분단 체제의 군사적 대립이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양측은 '[[페루자 협정]]'을 체결하여 군사분계선을 공식화하고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핫라인을 설치했다.
뒤이은 1949년 9월에 발생한 [[로마 노동자 항쟁]]은 남이탈리아 초기 사회의 계급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국영철강공사 노동자 마르코 로시의 산업재해 사망을 계기로 시작된 이 폭동은 5일간 계속되었고, 15만 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다. 항쟁 과정에서 정부군과 시위대 간의 무력 충돌로 47명이 사망하고 234명이 부상했다. 데 갈로 정부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했지만, 실제로는 전후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가 폭발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남이탈리아 사회의 깊은 계급 갈등을 보여주었고, 이후 정부의 노동 정책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
=== 재무장과 반공 정권의 공고화 ===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남이탈리아 재무장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의 압박으로 데 갈로 정부는 '[[왕국 방위력 강화법]]'을 제정하여 국방비 3배 증액, 의무복무 기간 연장, 3개 기갑사단 신설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코민테른을 비롯한 좌파 세력과 평화주의자들이 격렬히 반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대 총선과 3대 총선에서 공산당이 참패하고 기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반공 정권의 공고화를 위한 토대로 비추어졌다.
1955년 4월 17일 [[1955년 남이탈리아 총선|제3대 총선]]은 [[데 갈로 내각]] 9년의 성과에 대한 국민적 평가였다. 선거 결과는 모든 예상을 뒤엎고 기독교민주인민연합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기민당은 106석(61.6%)을 획득하여 남이탈리아 건국 이래 최초로 단독 과반을 확보했다. 반면 [[남이탈리아 사회민주당|사민당]]은 43석에서 32석으로, 공산당은 31석에서 19석으로 크게 후퇴했다. 이는 '안정과 번영을 통한 공산주의 위협 극복'이라는 데 갈로의 메시지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특히 페루자 포격전에서의 성공적 방어와 [[마셜 플랜]]을 통한 경제 회복이 기민당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 정권의 위기와 산타마리아 체제(1957) ===
1955년 압승의 여세를 몰던 데 갈로 정부는 1956년 마치니 내무장관 부패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었다. [[알베르토 마치니]] 내무장관이 나폴리 항만 운송업체들과 결탁하여 정부 계약을 특혜 배정하고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야당 지도자인 [[조반니 에스포지토]] 사민당 당수도 같은 업체들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에스포지토는 구속되었고, 사민당은 [[루치아 비안코]]를 새 당수로 선출하여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이 사건은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높였고,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켰다.
마치니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에 처한 데 갈로 총리는 [[1957년 남이탈리아 총선|1957년 조기 총선]]을 단행했다. 1957년 3월 24일 제4대 총선에서 기민당은 85석으로 의석을 잃었지만 여전히 제1당을 유지했다. 선거 후 기민당 내에서는 새로운 지도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마르코 산타마리아]]가 새로운 당수이자 총리로 선출되었다. 산타마리아는 데 갈로와 달리 "경험과 안정의 정치"를 내세우며 더욱 보수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시칠리아 인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92석의 안정적 과반을 확보했다.

2025년 8월 26일 (화) 00:06 판

틀:역사의 필연

이탈리아 왕국
Regno d'Italia
(1946~1986)
남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Repubblica Socialista dell'Italia Meridionale
(1986~1987)
국기 (1946~1986) 국장 (1946~1986)
남이탈리아_(필연)
국기 (1986~1987) 국장 (1986~1987)
F.E.R.T.
사보이 왕가의 표어 (1946~1986)
Pace, Lavoro, Socialismo, Democrazia
평화, 노동, 사회주의, 민주주의 (1986~1987)
상징
국가 왕의 행진곡 #
(Marcia Reale d'Ordinanza, 1946~1986)
국제가 #
(L'Internazionale, 1986~1987)
국화 데이지
역사
이탈리아 통일 1861년 3월 17일
생제르맹 조약 1920년 7월 16일
남이탈리아 왕국 성립 1946년 6월 12일
초봄의 혁명 1986년 3월 15일
북이탈리아와의 통일, 멸망 1987년 9월 2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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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로마 (Roma)
북위 41°53′36″ 동경 12°28′58″
최대 도시
면적 132,073km2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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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968만 3,945명 (1946년)
1,803만 6,332명 (1986년)[1]
기대수명 69.6세 (1976년)
공용어 이탈리아어
종교 국교 로마 가톨릭 (1946~1986)
국가 무신론 (1986~1987)
구성 가톨릭교 94.3%, 무종교 및 기타 5.7% (1946)
가톨릭교 63.2%, 무종교 33.3% (1976)
가톨릭교 45.3%, 무종교 51.5% (통일 직전)
군대 이탈리아 왕국군 → 기능 정지[2]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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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부르주아 독재, 의회민주제, 다당제 (1946~1970, 1983~1986)
전제군주제, 파시즘, 형식적 다당제 (1970~1983)[3]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민주집중제, 직접민주제 (1986~1987)
국성 사보이아 (Savoia) → 군주제 폐지
역대 국왕 움베르토 2세 (1946~1983)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4세 (1983~1986)
역대 대통령 오스카 슈나이더 (1986~1987)
역대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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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 펼치기 · 접기 ]
경제 체제 자본주의시장경제사회주의 경제
총 GDP $576억 (1976)
1인당 GDP $3,200 (1976)[4]
통화 이탈리아 리라
ccTLD
.si
국제 전화 코드
+39
국가 코드
IT, SIT, RIT, 380

개요

남이탈리아(이탈리아어: Italia Meridionale)는 1946년부터 1987년까지 41년 간 존재했던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국가이다. 정식 국명은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어: Regno d'Italia)이었으며, 1986년 남이탈리아 국체전환 국민투표를 통해 남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이탈리아어: Repubblica Socialista dell'Italia Meridionale)으로 체제를 전환한 후 1987년 북이탈리아와 통일되어 현재의 이탈리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흡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이탈리아 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탄생한 국가로, 수도는 로마였다. 북 이탈리아의 경우 반빨치산 파르티잔,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의 중심으로 수립된 공화국인 반면 남 이탈리아는 파시즘 정권인 이탈리아 왕정을 계승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였다. 북쪽으로는 북위 37도선을 경계로 북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마주했으며, 영토는 라치오, 아브루초, 캄파니아, 풀리아, 바실리카타,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8개 주로 구성되었다.

남이탈리아는 41년간의 역사 동안 입헌군주제와 형식적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왕권과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1983년까지는 사실상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했다. 이후 1985년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1986년 국체 전환하며 왕정을 폐지했고, 1987년 연방 헌법 개정을 통하여 북이탈리아에 흡수통일되어 멸망하였다.

역사

초기 (1946~1957)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이탈리아 반도는 연합국의 점령 하에 놓였다. 1946년 초,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이탈리아 반도 역시 분할 점령의 대상이 되었다. 3월에 체결된 얄타 협정에 따라 이탈리아는 로마 북쪽 3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북부는 소련과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의 영향 하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남부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왕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1946년 6월 12일,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을 계승하는 남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었다. 초대 국왕에는 사보이아 왕가의 움베르토 2세가 즉위했으며, 수도는 로마로 정해졌다. 초대 총리에는 전쟁 중 반파시스트 활동을 벌였던 가톨릭 정치인 프란체스코 데 갈로가 임명되어 기독교민주인민연합 정부를 이끌었다. 건국과 동시에 실시된 1946년 제헌의회 선거는 남이탈리아의 정치 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거였다. 총 5개 정당이 경쟁한 이 선거에서 데 갈로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인민연합이 77석(44.8%)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단독 과반에는 실패하여 이탈리아 사회민주당(23석, 13.4%)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 남이탈리아 지부가 55석(32.0%)을 획득하여 강력한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이는 전후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 속에서 좌파 이념에 대한 상당한 지지가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공화당(11석)과 시칠리아 인민당(6석)은 각각 반왕정 세력과 지역주의 세력을 대변했다. 이에 따라 데 갈로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경제-정치적 안정을 요구하는 '반공 친서방 노선'을 명확히 했다. 1947년 체결된 이탈리아-미국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군의 나폴리, 타란토 기지 주둔을 허용하고, 경제적으로는 마셜 플랜의 수혜국이 되어 전후 복구에 박차를 가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 남이탈리아 지부를 견제하기 위해 '국가안보법'을 제정했고, 교육 정책에서는 가톨릭 교육을 강화하여 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경제 정책에서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되, 주요 기간산업은 국가가 관리하는 혼합경제 모델을 채택했다.

페루자 위기(1948)와 로마 노동자 항쟁(1949)

남이탈리아 건국 초기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1948년 3월의 페루자 위기였다. 북부 공산 정권이 로마 라인 경계 지역인 페루자에 대해 기습적인 군사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북부군은 소련제 주피터 미사일로 4일간 페루자를 포격했고, 이에 남이탈리아 왕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양측 합계 262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민간인 43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비록 남이탈리아가 영토 방어에 성공했지만, 분단 체제의 군사적 대립이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양측은 '페루자 협정'을 체결하여 군사분계선을 공식화하고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핫라인을 설치했다.

뒤이은 1949년 9월에 발생한 로마 노동자 항쟁은 남이탈리아 초기 사회의 계급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국영철강공사 노동자 마르코 로시의 산업재해 사망을 계기로 시작된 이 폭동은 5일간 계속되었고, 15만 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다. 항쟁 과정에서 정부군과 시위대 간의 무력 충돌로 47명이 사망하고 234명이 부상했다. 데 갈로 정부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했지만, 실제로는 전후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가 폭발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남이탈리아 사회의 깊은 계급 갈등을 보여주었고, 이후 정부의 노동 정책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

재무장과 반공 정권의 공고화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남이탈리아 재무장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의 압박으로 데 갈로 정부는 '왕국 방위력 강화법'을 제정하여 국방비 3배 증액, 의무복무 기간 연장, 3개 기갑사단 신설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코민테른을 비롯한 좌파 세력과 평화주의자들이 격렬히 반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대 총선과 3대 총선에서 공산당이 참패하고 기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반공 정권의 공고화를 위한 토대로 비추어졌다.

1955년 4월 17일 제3대 총선데 갈로 내각 9년의 성과에 대한 국민적 평가였다. 선거 결과는 모든 예상을 뒤엎고 기독교민주인민연합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기민당은 106석(61.6%)을 획득하여 남이탈리아 건국 이래 최초로 단독 과반을 확보했다. 반면 사민당은 43석에서 32석으로, 공산당은 31석에서 19석으로 크게 후퇴했다. 이는 '안정과 번영을 통한 공산주의 위협 극복'이라는 데 갈로의 메시지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특히 페루자 포격전에서의 성공적 방어와 마셜 플랜을 통한 경제 회복이 기민당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정권의 위기와 산타마리아 체제(1957)

1955년 압승의 여세를 몰던 데 갈로 정부는 1956년 마치니 내무장관 부패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었다. 알베르토 마치니 내무장관이 나폴리 항만 운송업체들과 결탁하여 정부 계약을 특혜 배정하고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야당 지도자인 조반니 에스포지토 사민당 당수도 같은 업체들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에스포지토는 구속되었고, 사민당은 루치아 비안코를 새 당수로 선출하여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이 사건은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높였고,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켰다.

마치니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에 처한 데 갈로 총리는 1957년 조기 총선을 단행했다. 1957년 3월 24일 제4대 총선에서 기민당은 85석으로 의석을 잃었지만 여전히 제1당을 유지했다. 선거 후 기민당 내에서는 새로운 지도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마르코 산타마리아가 새로운 당수이자 총리로 선출되었다. 산타마리아는 데 갈로와 달리 "경험과 안정의 정치"를 내세우며 더욱 보수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시칠리아 인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92석의 안정적 과반을 확보했다.

  1. 1970년대 이래 저조한 출산율과 북으로의 이민으로 인해 인구가 꾸준히 감소했다.
  2. 1986년 3월 15일 이후 기능을 정지하였으며, 1986년 5월 이후 소비에트군과 북이탈리아 인민군이 주둔하였다.
  3. 납의 시대 기간 이탈리아 기독교민주인민동맹을 제외한 사회주의 야당 대부분이 국가보안법으로 금지당하며 실질적인 일당제가 시행되었다.
  4. 동시기 북이탈리아($5,700)의 5~60% 수준이었으며 196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