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준 (아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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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28일 (목) 16:4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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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아름다운 세상은 1945년 모종의 이후로 이승만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긴 뒤 대한민국6.25 전쟁 승리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거대한 변화가 왔을 때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이승만의 변화와 그 아래 태어난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 그 외에도 아름다운 세상을 자처하는 수많은 국가들의 정치와 사회, 문화, 경제적 변화를 다룹니다.


대한민국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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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8·9대 총통
서석준
徐錫俊 | Seo Seok-jun
출생 1938년 9월 24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現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청사도서관길 13)
사망 2026년 12월 23일 (향년 88세)
서울수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서석준총통묘소
재임기간 제8대 총통
1980년 12월 10일 ~ 1984년 12월 9일
제9대 총통
1984년 12월 10일 ~ 1988년 12월 9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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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달성 서씨[1]
부모 아버지 신홍렬, 어머니 이묘현
형제자매 4남 3녀 중 3남
배우자 유수경
자녀 장남 서익호, 차남 서익제, 딸 서이영
학력 성주국민학교 (졸업)
성주중학교 (졸업)
성주농업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 / 학사)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병역 병역 면제 (고등고시 합격)
종교 가톨릭
약칭
청사(靑史)
공식 초상화

개요


대한민국 제8·9대 총통 취임 선서

대한민국의 제8·9대 총통.

약력

생애

유년기 시절

서석준(徐錫俊)은 1938년,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성주군의 농촌 마을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넉넉하지 않았으나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집안으로, 학문과 근면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성주읍내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그는, 당시 지역 농민 자제들이 주로 진학하던 성주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생계난과 학비 부담으로 인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고, 이는 그의 생애에 첫 번째 큰 시련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둔 후에도 서석준은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품팔이와 노동으로 생계를 돕고, 밤에는 혼자 책을 들춰가며 공부를 계속한 끝에,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입시를 준비했고, 마침내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합격, 1956년 입학하여 1960년 졸업하였다. 이 시기 그는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학업에 몰두하였고, 정치철학·정치경제·서양사상사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근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정치사상에 영향을 받아, ‘자유’와 ‘질서’의 조화를 강조하는 사유 체계를 형성해갔다.

서울대학교에서 뛰어난 학업 성과를 거둔 서석준은, 1960년 졸업과 동시에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과의 유대 강화를 위한 인재 양성 차원에서 우수 학생들을 미국의 명문대학에 보내고 있었으며, 서석준도 이 프로그램의 수혜자 중 한 명이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 정부는 이승만 총통의 주재 아래 청와대에서 장학생 환송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서석준은 처음으로 당시 현직 총통이었던 이승만과 직접 대면하였다. 이승만은 젊은 유학생들을 격려하며 "대한민국을 이끌 차세대 지도자는 여러분"이라 언급했고, 서석준은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으로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하였다. 훗날 그는 "그날 이승만 총통이 손을 잡아주며 '미국에서 배운 것을 조국을 위해 써달라'고 했던 말이 내 인생의 방향을 정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만남은 그에게 정치적 실용주의와 반공 자유주의의 상징으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정치에 대한 장기적 관심의 씨앗이 되었다.

밴더빌트 대학교 유학 시절

1960년 여름, 서석준은 국비장학생 자격으로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도착하여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학부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하였으나, 국제정치경제에 대한 관심과 한국의 경제개발 필요성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인해 대학원에서는 경제학을 전공 분야로 선택하였다.

입학 초기 그는 수학 및 통계학 등 경제학 이론과 계량분석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점차 적응하며 정규 과정을 이수하였다. 당시 시카고대학교는 시장주의 경제학의 중심지로 평가받던 시카고학파(Chicago School of Economics)의 본산으로, 자유시장경제를 강조하는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석준은 재학 중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였다. 프리드먼은 통화주의 이론과 정부의 최소 개입을 강조한 이론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고 있었으며, 이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인물이다. 서석준은 이 시기 시장자율 확대, 규제 최소화, 통화 안정, 자유무역 확대 등 시카고학파의 경제 이론을 접하게 되었고, 관련 학문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프리드먼의 저서인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를 비롯한 주요 문헌을 학문적으로 탐구하였으며, 학내에서는 시장경제 이론에 관심을 보이는 한국인 유학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시기의 경험은 이후 그의 경제관 및 정책 구상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1964년, 서석준은 경제학 석사학위(M.A.)를 취득하였으며, 박사과정 진학을 제안받기도 하였으나 귀국을 결정하였다. 귀국 배경에 대해서는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당시 국내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실천적 목적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관료 시절

귀국 이후, 같은 해 제11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재무부 사무관으로 공직에 입문하였다. 이후 경제 분야 관료로서의 경력을 빠르게 쌓아갔다.

1966년에는 재무부 물가국 과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68년에는 재무부 물가국장, 1969년에는 재무부 경제기획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한국 경제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던 물가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조율에 참여하였다. 특히 국내외 시장 요인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대응하는 물가 안정 종합대책의 초안을 작성하고, 가격 통제 및 유통 구조 개선책을 병행하는 정책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단기간 내 소비자물가의 급등세를 일정 부분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에 대한 공로로 그는 근정포장을 수여받았다. 관료 시절 서석준은 정무적 판단보다는 계량 기반의 분석과 실무 조율에 강점을 가진 경제 관료로 분류되었다.

1971년, 서석준은 만 33세의 나이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경무대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고속 승진 사례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경무대 비서관직을 맡은 배경에는 그의 학문적 경력, 재무부 시절의 성과, 그리고 경제정책에 대한 전문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경제수석으로 재직하며 서석준은 정무수석 심상우, 민정수석 김재익과 함께 경무대 내 핵심 정책 참모 그룹으로 분류되었으며,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이들을 묶어 '심김서'(심상우-김재익-서석준)라는 약칭으로 불렀다. 해당 그룹은 이승만 정부 후반기 정책 조정 논의에서 실질적 영향을 미치는 최측근 중 최측근, 이승만의 심복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정치 입문과 심김서

이승만 총통이 퇴임한 이후, 서석준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직에서 물러났으며, 본격적으로 정당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민주국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며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였고, 당의 정책 조정과 전략 기획을 담당하는 핵심 실무자로 활동하였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과거 청와대 시절 함께 활동했던 심상우, 김재익과 함께 소위 '심김서 연대'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정부 외곽에서 개혁 정책의 방향성과 후계 구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공식 정치 연대체로 간주되었으며, 특히 김영삼 대통령의 초기 국정 운영에 견제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영삼과의 관계는 일정 기간 우호적이었으나, 정책 노선 및 당내 인사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점차 갈등 양상으로 전환되었다.

김영삼 정부 제1기 후반부에 들어 지지율 하락과 개혁 피로가 누적되자, 김 대통령은 정권 후반기 동력 확보를 위해 주요 인사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은 당내 통합과 정책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서석준에게 수석장관 겸 경제기획원 장관직을 제안하였고, 서석준은 이를 수락하며 행정 부처로 복귀하게 되었다.

서석준은 경제기획원 장관 복귀할 때 즈음, 당시 내각은 장준하 부총통과의 정책 노선 차이로 인해 적지않은 갈등을 겪었다. 장준하는 보다 분배 중심의 복지 확장 노선을 지지한 반면, 서석준은 규제 완화, 시장 자율 확대 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를 고수하면서 내부적으로 이견이 조율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김영삼 정부 후반기에는 경제정책 주도권을 둘러싼 긴장이 심화되었고, 이는 차기 총통 선거를 앞두고 인사 재편 논의로 이어졌다.

김영삼은 7대 총통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 하락과 경기 침체로 인해 재선 가능성이 불투명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따라 선거 전략 차원에서 부총통 후보 교체가 검토되었고, 결국 기존 부총통이던 장준하를 배제하고 서석준을 부총통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에 장준하는 대노하며 민국당 탈당 후 무소속으로 총통에 출마할것을 검토했지만 서석준의 간절한 설득으로 결국 포기했다. 당시 서석준은 대중적으로는 비교적 신선한 이미지와 함께 실무 중심의 경제관료로서 '유능한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이는 김영삼 정부의 정책 신뢰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부총통 후보 교체 이후, 김영삼의 지지율은 완만한 반등세를 보였으며, 특히 경제정책 부문에서 긍정적 평가가 강화되었다. 선거 막판 접전 상황에서 서석준 효과가 부각되며, 김영삼 후보는 최종적으로 2%포인트 차이의 근소한 승리를 거두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이후 김영삼 2기 정부에서는 경제정책 대부분이 서석준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서석준은 부총통으로 재임하면서 경제 분야 실무를 사실상 총괄하였고, 규제 개혁, 민영화, 재정 건전화, 시장 구조조정 등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시기의 정책 노선은 이후 그가 총통으로 집권하는 데 있어 정책 기반 및 행정 능력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서석준은 김영삼 정부 내에서 실질적 제2인자로 부상하며, 향후 당내 차기 대권 구도의 유력 주자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김영삼 2기 정부 말기, 심김서 연대는 정책 노선과 계파 전략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인해 점차 분열 양상을 보였다. 특히 김재익은 당내 비주류 및 개혁 성향 의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독자적 대권 행보를 시사하였고, 심상우는 이 과정에서 김재익을 일정 부분 지원하며 과거 연대 구도가 해체되었다.

한편, 서석준은 부총통직 재임과 함께 당내 실무조직을 재정비하고, 김영삼 계열로 분류되던 상도동계의 상당수를 흡수하여 독자적인 계파를 형성하였다. 이후 민주국민당은 차기 총통 선거를 위한 대선 후보 경선을 실시하였으며, 서석준은 김재익과의 치열한 경선 접전 끝에 간발의 차이로 승리하여 공식 후보로 지명되었다. 당시 김재익은 당내 개혁파와 시민사회 기반 지지층의 응원을 받았으나, 서석준은 관료 및 중도 보수세력의 결집을 통해 승부를 뒤집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서석준은 제8대 총통 선거에서 당시 야당이었던 자유당의 박순천 후보와 맞붙었다. 선거 과정에서 그는 시장 중심의 성장 전략과 실용주의 행정능력을 강조하며, 김영삼 정부에서 추진했던 개혁 노선을 일부 계승하되 안정성을 강조하는 노선을 내세웠다.

박순천 후보는 여성 정치인으로서 사회 개혁과 복지 확대를 전면에 내세우며 유권자층을 공략하였으나, 보수 성향이 강한 관서·영남권에서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또 박순천은 서석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현 한국을 파멸로 이끌것이라 주장했으나, 서석준은 상대적으로 균형 잡힌 지역 지지와 정통 경제관료 이미지, 안정적 정권 운영 경험 등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우위를 점했기에 공격은 크게 통하지 않았다.

선거 결과, 서석준은 52.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박순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대한민국 제8대 총통에 취임하였다. 이는 현재까지를 기준으로해도 최연소 총통의 당선 사례였으며, 전임 김영삼 정부와 일정한 연속성을 갖되 신자유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하겠다 발표하면서 정책적으로도 차별화를 시도하는 정부가 될것이라 예상되었다.

제8대 총통

서석준 정부는 출범 이후 전임 김영삼 정부 시기 마련되었던 경제 규제 및 개입 정책의 상당 부분을 철폐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전환하였다. 경제정책의 핵심은 시장 자율성 확대, 관치경제 해소, 민간 중심 성장 전략에 있었으며, 이를 위해 각종 가격·임금 통제, 기업설립 인허가 제도, 수출입 규제 등이 단계적으로 완화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국내외 자본 유입을 촉진하고 기업 투자 환경을 개선하는 데 일정한 효과를 보였으며, 국제 신용평가기관과 외신으로부터 "아시아 내 가장 적극적인 시장개방국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서석준은 내부적으로는 심상우, 김재익 등과 함께 민국당의 세대교체 이미지를 형성하며 젊고 역동적인 리더십을 강조하였다. 그는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인 외교 행보를 보였는데, 특히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수차례 회담을 갖고 경제 협력 및 기술 교류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는 냉전 완화 국면 속에서 남북문제 및 동북아 외교구도와 연계된 실용적 접근으로 평가되었다.

서석준 정부의 제1기 후반기인 1980년대 중반은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로 불릴 정도로 국내 경제가 급속한 성장을 보이던 시기였다. 수출 증대, 외자 유입, 내수시장 확대, 건설경기 활성화가 맞물리며 고용과 소득지표가 동반 개선되었다. 정부는 이 시기를 활용해 일부 복지 예산을 축소하거나 민영화를 진행했으나, 경기 호조 덕분에 사회적 반발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또한 그는 개인 자유의 보장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취임 직후 야간 통행금지 제도를 전면 폐지하고, 중고등학교의 두발 규제를 전면 철폐하는 등 생활 속 통제를 줄이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젊은 층과 도시 중산층 사이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정치적으로도 큰 위기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대규모 자연재해나 국제 충격 역시 제한적이었다. 이에 따라 서석준은 1986년 제9대 총통 선거에서 무리 없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선거를 앞두고는 만주자치령 민정장관 라정남이 지역 극좌 무장단체 '열투단' 단원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공안 정국이 조성되었으며, 이는 선거 국면에서 정부의 '안정과 질서' 프레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제9대 총통

그러나 서석준 정부 제2기 출범 이후, 국내 정치와 경제 상황은 동시에 불안정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정치적 사건은 1985년 당시 민국당 원내총무였던 김재익의 탈당과 신당 창당이었다. 김재익은 이전부터 서석준 대통령과 경제 정책, 사회복지 제도, 정당 운영 방식 등 여러 분야에서 노선 차이와 정책적 이견을 보여왔으며, 이러한 갈등은 점차 당내 계파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김재익은 1985년 중반 민국당을 탈당하고, 개혁적 중도 노선을 표방하는 신생 정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민주당은 복지 지출 확대, 공기업 구조조정의 속도 조절, 정치적 다원주의 강화 등을 내세우며, 기존 민국당의 우남주의·신자유주의적 보수 정체성과의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이는 단순한 인사 갈등을 넘어서 보수 진영 내부의 정책 정체성과 전략 구도의 분열로 이어졌고, 이후 보수 진영의 세력 재편과 정권 기반 약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같은 시기 경제 상황도 점차 하강 국면에 진입하였다. 1988년 초반 이후 세계 경기의 둔화와 맞물려, 한국 경제 역시 수출 성장률 감소, 금리 인상, 내수 위축 등 복합적인 구조 변화에 직면하였다. 특히 주요 대기업들의 연쇄적인 유동성 위기 및 일부 부도 사례가 발생하면서 금융 불안정성이 증가하였고, 실업률 상승과 투자 심리 위축으로 고용 및 생산 지표 전반이 악화되었다.

정부는 초기에는 이러한 흐름을 경기 순환의 일시적 조정 국면으로 인식하였으나, 경기 하강이 장기화되면서 민간 부문뿐 아니라 국가 재정 역시 압박을 받기 시작하였다. 1기 정부 당시 추진되었던 공기업 민영화와 복지 축소 정책이 이 시기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중산층과 저소득층 사이에서 순식간에 사회경제적 불만이 확산되었고, 이는 곧 노사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등 다양한 사회적 긴장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석준 정부는 금융시장 안정화와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추가 대책을 발표했으나, 내외부의 신뢰 회복에는 제한적인 효과를 보였으며, 정부에 대한 여론 지지도는 하락세를 지속하였다. 정치권의 분열과 경제적 불확실성이 병행된 이 시기는 서석준 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주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1990년 제10대 총통 선거에서, 서석준 정부의 후계 구도를 대표한 심상우 후보가 민국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다. 그러나 당시 통합야당으로 재편된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진보·중도·개혁 세력을 광범위하게 결집하며 세력 확장을 이루었고, 정부 여당의 분열과 피로 누적으로 지지층 결집에 실패한 심상우는 결국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이로써 서석준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게 되었으며, 김대중의 당선으로 한국 정치사에서는 또 하나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후 서석준은 정계 일선에서 한동안 물러나게 되며, 민국당은 선거 패배 이후 대대적인 조직 재정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퇴임 이후

서석준은 1990년 총통직에서 퇴임한 이후 정계에서 사실상 은퇴하였으며, 이후에는 주로 학술 활동과 저술에 집중하였다. 퇴임 직후부터 국내외 경제학계와의 교류를 지속하였고, 특히 자유주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정책 이론을 주제로 한 학술 세미나와 강연 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시장과 국가』, 『한국경제의 자유화 전략』, 『개입 없는 번영』 등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 서적을 다수 집필하였다.

국내에서는 한국경제학회, 자유주의연구회, 아시아시장연구소 등과의 협업을 통해 경제정책 논의에 참여하였으며, 해외에서는 프리드먼주의자 및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과 교류하며 국제 신자유주의 네트워크와의 연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서석준은 일정 부분 기존 입장을 수정하였다. 위기 직후 발표한 기고문과 강연에서 그는 "시장 실패의 가능성을 간과했던 것이 일정 부분 사실이며, 거시적 위기 상황에서는 정부의 규제와 개입이 일정 정도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후 그는 거시경제 안정화 수단으로서의 공공정책 역할에 대해 보다 유연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기존의 엄격한 시장 중심주의 입장에서 벗어난 실용주의적 접근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사망 직전까지 서석준은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회 제6분과[2]의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학계 원로로서 경제학계의 정책 자문, 후학 양성, 연구 출판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또한 우남재단 이사장으로도 활동하는 등 80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사망

서석준 정부

서석준 1기 정부

평가

서석준 2기 정부

평가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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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및 논란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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