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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세자가 환후가 있었다. 여러 신하가 모두 놀라 문안을 청하니, 상이 근심하여 밤낮으로 의원을 들게 하였다. | {{인용문| 세자가 환후가 있었다. 여러 신하가 모두 놀라 문안을 청하니, 상이 근심하여 밤낮으로 의원을 들게 하였다. | ||
2026년 3월 9일 (월) 13:14 판
대한국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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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 (헤르메스)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배경
효명세자의 급사가 없다
순조가 끔찍이 아끼던 효명세자가 요절하지 않았다.
| 세자가 환후가 있었다. 여러 신하가 모두 놀라 문안을 청하니, 상이 근심하여 밤낮으로 의원을 들게 하였다.
며칠 지나 세자의 병세가 점차 나아지니, 상이 크게 기뻐하며 이르기를,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요 종사의 장래이다. 하늘이 아직 우리 사직을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경들은 마땅히 마음을 합하여 보필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세자가 일찍부터 총명하고 기국이 넓어, 서책을 강론함에 있어 옛일에만 머물지 아니하고 사방의 형세와 백성의 생업에까지 뜻을 두었다. 이때 병환이 깊었다가 다시 나았으니, 조야에서 모두 종사의 다행으로 여겼다.《순조실록》 |
아편전쟁의 전말을 일찍이 알게 되다
소현세자가 1834년, 순조의 승하 이후 즉위하여 본격적으로 근대화에 관심을 지대히 갖게 된 계기가 바로 1차 아편전쟁의 발발이다. 그러나 사대부의 방해로 근대화는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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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청국은 대국이라 일컬어 오래도록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였으나, 이제 멀리 바다 밖 오랑캐의 군선에 제압당하였다 하니, 이는 비록 남의 일이로되 또한 우리를 위한 경계이다. 나라를 지키는 도는 글만 숭상하고 형식만 지키는 데 있지 아니하며, 백성을 기르고 군정을 바로잡으며 기물을 익히는 데 있다. 비록 갑자기 옛 제도를 바꿀 수는 없으나, 마땅히 시무를 널리 구하여 후환에 대비케 하라.” 하였다. 이에 비변사와 호조·병조에 명하여 청국과 서양 각국의 형세를 상세히 탐문하게 하고, 바닷길과 화포, 군정의 폐단을 아울러 계문하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중국의 패함을 듣고 깊이 경계하여, 마침내 시무를 물어 기강을 정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오래도록 갈라졌으니, 혹은 예를 지켜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 하고, 혹은 기예를 배워 변방을 굳게 해야 한다 하였다. 이때 비로소 조정 안에 신구의 논의가 뚜렷해졌다.《문조실록》 |
김좌근의 난으로 몰락한 신 안동 김씨
김조순은 매우 뛰어난 인품과 성품으로 조선 조정의 주목을 받았으나, 세도정치의 본격적인 내막을 열었고, 이에 따른 정치적 불안감을 조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소현세자는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가문 사이에서 조정을 시도했고,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다만, 문조(효명세자)의 출생이 김조순의 딸인 순원숙왕후의 장자였기 때문에 안동 김씨를 멀리 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김조순의 아들인 김좌근이 영의정으로 실권을 장악하려 하자, 이를 반려하는 대신 좌의정보다 낮은 우의정으로 낮추어 앉혔다.
이에 분노한 김좌근은 안동 김씨 일가의 수장이자 삼정승의 직위를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가 1849년이었다. 명분은 순조의 유언에 따라 문조(효명세자)의 아들인 이환(헌종)을 즉위시켜야 했으나 문조(효명세자)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원숙왕후는 섣불리 김좌근을 지원하지 않았고, 풍양 조씨와 반남 박씨 일가의 배신으로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다. 김좌근의 난의 실패로 세도정치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헌종의 급사로 이의 지지 기반이었던 안동 김씨가 몰락했으며 이에 따라 정치 개혁을 방해하던 세력이 숙청당하면서 이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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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정 김좌근이 스스로 병권과 정권을 믿고 사사로이 무리를 모아 불궤를 도모하였다. 그 무리가 몰래 말하기를, “선왕의 뜻은 본래 동궁을 높이고자 함에 있었는데, 조정이 이를 그르쳐 대통이 어지러워졌다.” 하며 허망한 말을 지어내어 인심을 선동하였다. 상이 듣고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신하가 군부를 속이고 종사를 핑계하여 사욕을 이루려 하니, 이는 곧 역적이다. 비록 명분을 빌린다 하나, 실상은 나라를 어지럽히려 함일 뿐이다.” 하였다. 이에 훈련도감과 금위영에 명하여 도성의 문을 굳게 지키게 하고,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유시를 내려 역당을 잡게 하였다. 풍양 조씨와 반남 박씨의 여러 신하가 모두 군령에 응하여 역당을 토벌하니, 김좌근의 무리가 미처 크게 일어나지 못하고 흩어졌다. 김좌근은 마침내 사로잡혔고, 국문 끝에 대역죄로 논하여 스스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그 일가 가운데 역모에 가담한 자는 법에 따라 죄를 정하고, 연좌할 만한 자는 귀양보냈다. 다만 왕비의 친가와 갈린 여러 지파 중 죄가 없는 자는 함부로 확대하지 말라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안동 김씨가 여러 대에 걸쳐 권세를 잡아 조정을 전횡하더니, 마침내 한 사람의 사심이 온 문벌의 재앙이 되었다. 김좌근이 명분을 빌렸으나, 천명이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종사가 사사 집안의 물건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다. 이 난이 평정된 뒤로 벌열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문조실록》 |
양자로 입적한 회평군
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의 손자이고 전계대원군의 적장남인 회평군이 문조(효명세자)의 외아들인 헌종이 급사하자 비록 방계의 왕손이나 문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이원범(훗날 철종)에 따르면 의종(회평군)의 인품이 매우 훌륭하고 훈훈하며 함께 강화도 유배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애민정신이 출중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의종의 시호 또한 백성을 옳고 이롭게 한다는 뜻의 '의(義)'가 되었다.
이때 여러 외국(영국, 프랑스 등)이 개항을 요구하고 국서를 전달함과 동시에 천주교 등 외국의 문화와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였다. 의종의 집권 당시 세도가문의 공백으로 사실상 정치세력이 왕실과 일부 노론 시파를 제외하고 전무했던 상황이었다. 그는 문조 대에 든든한 배후인 숙종왕후와 함께 강화된 왕권을 이용하여 이원범과 함께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삼정 문란을 혁파하였으며 근대화의 속도를 높였다.
더욱이 의종은 기존의 왕실과 달리 강화도에서 태어났고 평민의 출신에서 양자로 입적되면서 왕족의 지위를 복원하였다. 이에 따라 의종은 사대부의 전통과 신분제도에 반항적이었다. 마침 정치세력이 사실상 왕실과 극소수의 노론 시파 세력을 제외하고 전무하던 실정이었기 때문에 과거 급제한 평민 출신의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였고 체제의 개혁을 이루면서도 반대하는 이들이 없었다. 또한 비록 바로 신분제를 철폐하지는 않았으나 노예제를 폐지하고 양반도 군역에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등 점진적으로 신분에 대한 경계의 벽을 허무는데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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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환(奐)이 훙서하였다. 상이 오래도록 슬퍼하여 정사를 돌보지 못하였다. 대신과 예조가 함께 아뢰기를, “저하께서 먼저 서거하여 대통이 비게 되었으니, 종사를 위하여 마땅히 종친 가운데 덕망 있는 이를 택하여 계통을 잇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한참 뒤에 이르기를, “회평군은 비록 방계이나 사람됨이 어질고 삼가며, 일찍이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원망으로 뜻을 잃지 아니하였다. 종사를 잇게 함은 사사 은혜가 아니라 사직을 위한 일이다.” 하였다. 이에 예관으로 하여금 길일을 택하게 하고, 회평군을 왕자의 예로 입궐시켜 대통을 이을 양자로 삼게 하였다. 조정 신하 가운데 더러 의논이 있었으나, 상이 친히 전교하여 이를 그치게 하고 이르기를, “큰일은 정통을 세우는 데 있지, 사사로운 친소를 가리는 데 있지 아니하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회평군은 종실의 먼 갈래에서 나왔으나, 어려서 곤궁함을 겪어 민간의 고달픔을 알았다. 그가 대통을 잇게 되자 사람들은 혹 놀라고 혹 기뻐하였다. 놀란 자는 예전의 관례를 들었고, 기뻐한 자는 새 임금이 백성의 고통을 알리라 여겼다.《문조실록》 |
지방수령의 반발을 잠재우다
| 상이 삼정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여 삼정이정청을 두고 각도에 영을 내리니, 여러 고을 수령 중에 이를 달가워하지 아니하는 자가 많았다.
혹은 장부를 숨기고, 혹은 군포의 수를 속이고, 혹은 환곡의 실수를 사실대로 보고하지 아니하였다. 상이 비국에 전교하기를,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관청의 창고를 채우고, 그 허실을 가려 조정의 명을 거역하니, 이는 법을 업신여기고 백성을 해치는 일이다.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좀먹는다면, 어찌 나라의 근본이 편안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암행어사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고, 수령의 치적을 다시 상고하게 하였다. 또 각 고을의 장부를 호조와 선혜청에 거듭 대조하게 하여, 감춘 곡식과 거짓 군액을 적발하였다. 탐학이 심한 자는 파직하고, 죄상이 큰 자는 국문하였으며, 백성에게 폐를 끼친 재물을 추징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법은 백성을 옭아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간사한 관리가 백성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새 정사는 비록 민간을 번거롭게 할지라도, 그 근본은 오래도록 편안케 하려는 데 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의종이 즉위한 뒤 개혁을 서두르자 지방관들이 많이 두려워하고 원망하였다. 그러나 상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법을 분명히 하였으므로, 아전과 수령이 전처럼 방자하지 못하였다. 다만 여러 폐단이 오랜 세월 쌓인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다 씻기지는 못하였다.《의종실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