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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후계자 '''레프 트로츠키'''는 '영구혁명'의 깃발 아래 붉은 군대를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로 흩뿌리며 전 세계를 화염 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습니다.<br> | 레닌의 후계자 '''레프 트로츠키'''는 '영구혁명'의 깃발 아래 붉은 군대를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로 흩뿌리며 전 세계를 화염 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습니다.<br><br> | ||
열강의 탐욕과 군벌의 야합, 붉은 비적들의 준동이 들끓는 이 거대한 프런티어 속에서 미합중국은 타협하지 않는 거인을 선택합니다.<br> | 열강의 탐욕과 군벌의 야합, 붉은 비적들의 준동이 들끓는 이 거대한 프런티어 속에서 미합중국은 타협하지 않는 거인을 선택합니다.<br><br> | ||
몬태나의 카우보이자 베테랑 외교관, 상원의원을 거쳐 1940년 백악관의 주인이 된 '''게리 쿠퍼'''. 190cm의 거구와 냉철한 현실주의를 갖춘 그는 진주만의 포성 속에서 '태평양 우선 원칙'을 관철하고 1944년 역사상 최고 득표율(61.9%)로 재선하며 트로츠키의 적화 야욕에 맞서 선을 긋습니다.<br> | 몬태나의 카우보이자 베테랑 외교관, 상원의원을 거쳐 1940년 백악관의 주인이 된 '''게리 쿠퍼'''. 190cm의 거구와 냉철한 현실주의를 갖춘 그는 진주만의 포성 속에서 '태평양 우선 원칙'을 관철하고 1944년 역사상 최고 득표율(61.9%)로 재선하며 트로츠키의 적화 야욕에 맞서 선을 긋습니다.<br><br> | ||
붉은 혁명의 트로츠키, 생존을 발버둥 치는 북양정부, 그리고 백악관의 파수꾼 게리 쿠퍼. 석양과 총탄, 냉혹한 국익이 교차하는 거대한 개척의 서사, '프런티어(Frontier)'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붉은 혁명의 트로츠키, 생존을 발버둥 치는 북양정부, 그리고 백악관의 파수꾼 게리 쿠퍼. 석양과 총탄, 냉혹한 국익이 교차하는 거대한 개척의 서사, '프런티어(Frontier)'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
2026년 8월 8일 (토) 22:02 판
프런티어
프런티어
| Frontier | |
|---|---|
| 출범일 | 2026년 8월 8일 (출범일로부터 +26일, 0주년) |
| 연재자 | Eiffel |
| 장르 | 대체역사, 정치·외교 |
역대 미국 대통령
미합중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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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쿠퍼
| 미합중국 제33대 대통령 게리 쿠퍼 Gary Cooper | |
|---|---|
| 본명 | 프랭크 제임스 쿠퍼 Frank James Cooper |
| 출생 | 1901년 5월 7일 |
| 미국 몬태나 주 헬레나 | |
| 사망 | 1961년 5월 13일 (향년 60세) |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 묘소 | 프랭크 제임스 쿠퍼 국립사적지 묘지 |
| 재임기간 | 제33대 대통령 |
| 1941년 1월 20일 ~ 1949년 1월 20일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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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당선되고,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취임한 미국 대통령이자, 최초의 20세기 출생 대통령이기도 하다.
3명의 프린스턴 대학교 출신 미국 대통령 중 한 명이자, 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함께 미국 공화당을 대표하는 존재이자 강하게 지지 받는 정치인으로, 미국 보수층과 공화당 지지자들의 정신적 지주에 그접한 대통령이다.
약력
- 1924. 주이탈리아 미국대사관 3등 서기관
- 1926. 주프랑스 미국대사관 2등 서기관
- 1928. 주영국 미국대사관 1등 서기관
- 1936. 제75대 미국 연방 상원의원 당선 (몬태나주, 공화당)
- 1941.1. 제33대 미국 대통령
생애
미국 몬태나주 헬레나에서 1901년 5월 7일에 태어났다. 본명은 프랭크 제임스 쿠퍼.
부모님은 잉글랜드 이민자 출신으로 헬레나 외곽에 600에이커, 즉 70만 평이 넘는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자연스레 어려서부터 형 아서와 어울리며 승마와 카우보이 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다. 아버지 찰스 쿠퍼는 몬태나주 대법원 판사로 복무한 법조인이었다.
자식들이 자신들의 뿌리인 영국 문화를 익히길 원했던 어머니 앨리스 쿠퍼의 주도로 초등학생 시절 형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때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익혔다. 같은 시기에 라틴어도 수학했다. 1912년 귀국해 헬레나로 복학했으며, 이후 몬태나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19년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했다. 전공은 우드로 윌슨과 함께 정치철학, 사학으로, 재학 중 국제법·외교사·정치철학 분야에서 우수한 성취를 보였으며, 교내 토론 클럽과 웅변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1923년 우등 졸업한다.
외교관
대학교 졸업 직후 미국 국무부에 합류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초임지는 이탈리아 로마였으며, 이후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을 순차적으로 거쳤다. 외교관으로 생활하며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라틴어 역시 문서 독해 수준으로 활용했다. 발음은 프랑스 현지인들도 만족하는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로마 근무 시절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공고화되는 과정을 현장에서 목격했으며, 파리 근무 시절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과 프랑스의 대독 유화 기조를 관찰했다. 런던 근무 시절에는 영국 외무부 관계자들과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 당시, 쿠퍼는 국무부 내에서 유럽 정세 분석 보고서로 상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 들어서는 에티오피아 위기, 라인란트 재무장, 스페인 내전 등 유럽의 연쇄적 위기 상황에 관한 분석으로 워싱턴 정가에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7년 이후 일본의 중국 침략이 가시화되면서 국무부 내 태평양 담당 라인과도 긴밀히 협력했다. 이 무렵 쿠퍼는 국무부 내에서 유럽과 태평양 양쪽 정세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외교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정계 입문과 대선 출마
한편 1934년 몬태나로 일시 귀환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1936년 몬태나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는 엄청난 이변이었는데, 당시 루스벨트의 뉴딜 지지층이 두터웠던 몬태나에서 공화당 후보가 승리한 것은 충격적인 결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외교관 경력이 본업이었던 만큼 상원의원으로서의 활동은 주로 외교위원회에 집중되었으며, 세입위원회에서도 재정 보수주의 노선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유럽 정세에 관해 당내 고립주의 강경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독자적 노선을 취했으며, "미국의 지속적 무관심은 결국 더 큰 개입을 불러올 것"이라는 논지를 반복적으로 제기했다.
이후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은 뚜렷한 선두 주자 없이 혼전 양상으로 시작되었는데, 경선 초반 가장 강력한 후보로 거론된 것은 뉴욕 검사장 출신의 토머스 E. 듀이였다. 듀이는 검사 시절 럭키 루치아노, 왁시 고든 등 미국 마피아 거물들을 연이어 기소, 유죄 판결로 이끌며 "갱버스터"라는 별명을 얻어 전국적 명사가 된 인물로, 1938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 현직 허버트 레먼에게 불과 1%p 차이로 패배한 선전이 오히려 1940년 경선 유력 주자로 부상하는 발판이 되었다.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로버트 A. 태프트는 당내 재정 보수파와 고립주의 강경파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듀이의 대항마로 부상했다. 태프트는 뉴딜 비판과 연방 권한 축소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중서부와 남부 공화당 조직을 공략했다.
쿠퍼 역시 경선 초반부터 이 두 후보와 함께 주요 후보군으로 거론되었다. 1936년 상원 당선 이후 외교위원회에서 유럽 정세에 관한 발언을 지속적으로 이어온 쿠퍼는, 1938년 뮌헨 협정 전후로 유럽 위기를 구체적으로 경고하는 발언들이 전국 언론에 반복 보도되면서 "외교 전문 상원의원"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외교관·상원의원 경력을 통해 쌓인 실무 경험과 서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상징성, 특정 당내 파벌에 얽히지 않은 중립적 이미지가 경선 초반부터 쿠퍼를 여타 후보들과 차별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미시간주 상원의원 아서 반덴버그 역시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으나, 본인 스스로 적극적인 경선 운동을 펼치지 않는 소극적 태도를 유지했다.
당시 쿠퍼는 스스로를 고립주의자와 관여론자 사이 어딘가에 위치시키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유럽 현장을 직접 경험한 외교관 출신으로서 위기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미국의 직접적 군사 개입에는 여전히 유보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쿠퍼의 성향은 완전한 고립주의를 고수하는 태프트 계열과도, 적극적 관여론을 주장하는 동부 국제파와도 구별되는 것으로, 오히려 당내 폭넓은 계파를 아우를 수 있는 유연한 입지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전당대회 당시 듀이와 태프트, 쿠퍼의 3강 구도라는 흐름이 이어졌으나, 6월 필라델피아 전당대회에서 양상이 급변했다. 1차 투표에서 듀이가 선두를 달렸으나 과반에 미치지 못했고, 2·3차 투표에서도 3명의 후보가 팽팽히 맞서며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4차 투표부터 각 후보의 지지 대의원들이 이탈하기 시작하면서 절충 후보 물색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온 쿠퍼가 자연스러운 대안으로 부상했다. 서부와 중서부 주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쿠퍼 지지 움직임이 급격히 확산되었고, 4차 투표에서 쿠퍼가 태프트를 제치고 1위로. 이후 쿠퍼가 과반을 확보하며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러닝메이트로는 미시간주 상원의원 아서 반덴버그를 지명했다. 당내 고립주의파를 달래는 동시에 중서부 대형주의 표심을 잡기 위한 인선으로, 반덴버그의 중서부 기반이 쿠퍼의 서부 지역기반을 보완하는 지역 균형 인선이기도 했다.
본선 상대는 민주당의 웬델 윌키였다. 윌키는 원래 자유주의 성향의 민주당원으로, 커먼웰스 앤 서던 전력회사 경영진 출신의 기업인이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특히 TVA가 자신의 회사를 압박하는 데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는데, 루스벨트가 3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민주당 내 루스벨트 색채가 옅어지자 유력 대선 후보군으로도 불리운다. 본래 국제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였던 윌키는 민주당 내에서 FDR 이후의 대안 후보로 부상했고, 전당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되었다. 러닝메이트는 켄터키주 출신 상원 원내대표 앨번 W. 바클리였다. 남부 수성을 노린 인선이었으나, 이미 균열이 시작된 당내 연합을 봉합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두 후보의 노선 차이는 생각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윌키가 국제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였던 반면, 쿠퍼는 미국의 직접 개입에는 신중하되 유럽 정세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조건부 관여론자"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했다. 쿠퍼 캠프는 "무분별한 개입도, 무책임한 방관도 아닌 냉철한 현실 판단"을 선거 전략으로 내세우며 고립주의 강경파와 관여론자 양쪽의 표심을 동시에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내정에서는 뉴딜로 인한 연방 재정 팽창 비판, 연방 권한의 주 환원, 소기업·농장주 보호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선거 운동이 본격화되던 1940년 여름, 유럽 전황이 결정적인 변수로 부상했다. 5월 독일의 프랑스 함락에 이어 영국 본토 항공전이 전개되면서 전쟁이 대서양 건너 현실로 다가온 상황에서, 유권자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두 후보의 외교·안보 역량 비교로 쏠렸다. 유럽 현장에서 직접 외교 실무를 수행하며 이 위기의 본질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쿠퍼와 기업인 출신의 윌키 사이에서, "이 위기를 누가 더 현실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쿠퍼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쿠퍼 캠프는 이를 최대한 활용해 외교관 경력과 유럽 현장 경험을 선거 후반 운동의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여기에 민주당 내부 분열이 겹쳤다. 루스벨트의 불출마로 구심력을 잃은 민주당은 전당대회 과정에서부터 계파 간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뉴욕 기반의 자유주의자인 윌키에 대해 남부 보수 민주당원들 사이에서 뚜렷한 거부감이 형성되었으며, 루스벨트 열성 지지층 일부도 FDR의 후계자로서 윌키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이미 균열이 시작된 민주당 연합은 본선에서도 봉합되지 않았으며, 경합주인 텍사스, 테네시, 켄터키에서의 민주당 투표율 저하로 이어졌다.
한편 쿠퍼의 외모 역시 선거 과정에서 적잖은 화제가 되었다. 190cm에 달하는 장신에 단정한 외모를 갖춘 쿠퍼는 유세 현장에서 군중의 시선을 압도했으며, 특히 여성 유권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당시 언론에서는 워런 G. 하딩 이후 가장 "대통령답게 생긴" 후보라는 평가가 잇따랐으며, 외교관 출신 특유의 절제된 언행과 차분한 카리스마가 더해지면서 "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 효과적으로 각인되었다. 유세 현장에서 쿠퍼가 등장할 때마다 군중이 몰리는 현상이 반복되었고, 일부 유세지에서는 행사 정원을 크게 초과하는 인파가 집결해 경호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결국 선거 결과, 쿠퍼의 압도적 대승이었다. 득표율 60.8% 대 38.7%, 선거인단 452 대 79로 쿠퍼가 윌키를 압도적으로 이겼다. 뉴잉글랜드, 중부 대서양, 중서부, 서부 전역을 석권했으 경합주인 켄터키·테네시·버지니아·텍사스에서도 쿠퍼가 우세를 점했다. 윌키는 앨라배마·미시시피·사우스캐롤라이나·루이지애나·조지아·아칸소·플로리다·노스캐롤라이나 등 딥 사우스 8개 주만 겨우 지켜냈다. 민주당으로서는 1920년 이후 최악의 선거 참패로 기록되었으며, 루스벨트 없는 민주당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선거로 평가받는다.
대통령 재임
대통령이 된 후 쿠퍼가 펼친 정책은 크게 세 축으로 요약된다. 연방 지출 축소와 감세, 태평양 우선 원칙에 입각한 전시 전략, 그리고 전후 세력권 협상에서의 냉철한 현실주의이다.
취임 직후 쿠퍼 행정부는 뉴딜 체제에서 팽창한 연방 관료제의 점진적 축소에 착수했다. 일부 공공사업 프로그램의 규모를 줄이고 연방 기관 통폐합을 추진했으며, 중소기업과 농장주에 대한 규제 완화를 병행했다. 뉴딜을 "미국적 자립 정신의 침식"으로 규정한 그의 선거 공약이 실제 행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다. 다만 농업 보조금과 핵심 인프라 예산만큼은 현실적 이유로 유지했으며, 진주만 공습 이후에는 전시 예산 편성이 불가피해지면서 재정 긴축 기조는 사실상 후순위로 밀렸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쿠퍼 행정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는데, 쿠퍼는 이튿날 의회에 대일 선전포고를 요청했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전포고에 맞대응해 유럽 참전도 결정했다. 쿠퍼는 전쟁 수행의 기본 전략으로 태평양 우선 원칙을 채택했다. 유럽은 영국과 소련이 지상에서 버티는 동안 미국은 물자 지원과 제공권 확보에 집중하고, 주력 전투력은 태평양에 투입한다는 구도였다. 처칠은 이 결정에 격렬히 반발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조기 실현을 강하게 요구했으나, 쿠퍼는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는 미국이 결정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20세기를 풍미한 두 거목이 전시라는 공동 목표 아래 협력하면서도 끝내 완전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소련과의 관계에서 쿠퍼의 반공주의 성향으로, 독일 격퇴라는 공동 목표 하에 소련에 대한 무기대여법 지원은 유지했으나 명시적인 조건을 달았다. 지원의 대가로 전후 동유럽 처리 문제와 소련군의 진격 범위에 관한 사전 협의를 요구했으며, 이오시프 스탈린은 물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정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쿠퍼는 스탈린을 두고 측근들에게 "아돌프 히틀러와 다른 방식으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전해지며, 회담 자리에서도 개인적 친밀감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실무적 협상에만 집중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1944년 대통령 선거에서 쿠퍼는 득표율 61.9%를 기록하며 압도적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전시 대통령 프리미엄과 태평양 전선에서의 연이은 승전보가 맞물린 결과였는데, 민주당은 이번에도 유력한 대항마를 내세우지 못했으며, "전쟁을 이기고 있는 대통령을 바꿀 이유가 없다"는 유권자 심리가 지배적이었다. 쿠퍼는 미국 역사상 전시 재선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재선 임기 중 1945년 독일의 항복과 일본의 항복을 연이어 맞이하며 전쟁을 종전으로 이끌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쿠퍼의 현실주의 외교는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동유럽 일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묵시적으로 인정하되 그 범위를 폴란드 동부·루마니아·불가리아 수준으로 제한하려 했다. 태평양에서는 소련의 대일 참전 요청을 제한적으로만 수용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다.
여담
- '가장 미국적인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할리우드를 뛰어 넘는 외모의 대표적인 미남 정치인이었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사석에서 쿠퍼를 가리켜 "만약 제가 치른 대통령 선거에 그 친구가 나왔다면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렇게 생긴 친구는 생전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 웃음은 또 뭐라고 표현해야 합니까? 아마 여자 유권자들에게 몰표를 얻었겠죠"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 윈스턴 처칠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히 우정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이견이 많은데, 처칠은 특유의 과장된 화법으로 쿠퍼와의 관계를 여러 자리에서 친밀하게 묘사했으나, 쿠퍼는 처칠에 대해 공개적으로 특별한 감정을 표현한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측근들의 회고에 따르면 쿠퍼는 처칠을 두고 "탁월한 전략가이지만 그의 전략은 언제나 영국으로 귀결된다"는 식의 건조한 평가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2000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
|---|---|---|---|---|---|---|---|---|
윌키 52인 (14.9%) ✔ (85.1%) 452인 쿠퍼
| ||||||||
| ||||||||
| 선거일시 | 1940년 11월 5일 | |||||||
| 투표율 | 62.5% ▲ 5.6%p | |||||||
| 선거 결과 | ||||||||
| 후보 | 민주당 |
공화당 | ||||||
| 홈스테이트 | 윌키 뉴욕 바클리 켄터키 |
쿠퍼 몬태나 반덴버그 미시간 | ||||||
| 승리 주 | 8 | 42 + D.C. | ||||||
| 선거인단 | ||||||||
| 79인 | 452인 | |||||||
| 전국 득표 | ||||||||
| 19,329,606 38.7% |
30,332,082 60.8% | |||||||
| 당선자 | ||||||||
| 공화당 게리 쿠퍼 | ||||||||
개요
1940년 11월 5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게리 쿠퍼와 부통령 후보 아서 반덴버그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웬델 윌키와 부통령 앨번 W. 바클리를 꺾고 미국의 제33대 대통령과 제33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다시 8년만에 공화당 정권이 들어선 선거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와 맞물려 세계 대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배경
경선
공화당
| Worth Fighting For 싸울 가치가 있는 미국 2000 퀘일-스톡데일 티켓 슬로건 |
공화당 경선은 민주당과 달리 시작 전부터 사실상 승부가 정해져 있었다. 현직 대통령인 댄 퀘일이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당내 뚜렷한 대항마가 없는 상태에서 사실상 단독 후보로 경선에 임했다.
일부 당내 인사들 사이에서 퀘일의 재지명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존재했으나, 현지 대통령에 맞서 당내 경선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수반하는 선택이었기에, 결국 이렇다 할 도전자 없이 퀘일이 압도적인 대의원 수를 확보하며 재지명되었다.
퀘일은 1996년 대선에 이어 제임스 스톡데일 부통령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다만 그가 매우 고령이라는 점이 지속해서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전쟁 영웅이자 명예훈장 수훈자로서 상당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만, 정치에서의 대중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대해서는 재임 4년 내내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당 일각에서는 새로운 얼굴로의 교체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퀘일은 그냥 무시하고 지명을 선택했다.
민주당
| Tomorrow Begins Today 미래는 오늘 시작된다 2000 케네디-브로 티켓 슬로건 |
퀘일 행정부의 낮은 지지율로 민주당은 이번 대선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선거라고 보았다. 민주당 내에서는 일찍부터 후보군에 대한 하마평이 무성했는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부상한 인물이 존 F. 케네디 주니어였다.
케네디는 1994년 뉴욕주 상원의원 당선 직후 부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압도적인 이름값과 대중적 인지도, 그리고 젊고 호감형인 이미지로 인해 당선 직후부터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어 왔다.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전국 순회 강연, 지역 당 조직과의 교류 등을 통해 민주당 내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다.
케네디에 맞선 주요 경쟁자로는 뉴저지주 상원의원 빌 브래들리, 코네티컷주 상원의원 조 리버만, 그리고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이자,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인 마이클 듀카키스가 있었다.
케네디는 아이오와 코커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를 포함한 초반 경선 일정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하며 사실상 경선을 조기에 종결시켰다. 슈퍼 화요일 이후 브래들리와 리버만은 잇따라 경선 중단을 선언했으며, 듀카키스 역시 뒤이어 완주를 포기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케네디는 사실상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
케니디는 부통령 후보로 루이지애나주 연방 상원의원인 존 브로를 지명했다. 뉴욕 상원의원이자 북동부, 도심 지역 기반의 진보적 이미지가 강한 케네디와 달리, 브로는 딥사우스 출신의 중도실용주의 협상가로서 오랜 상원 경력을 통해 초당적 조정 능력을 인정받아온 인물이다. 이 지명은 케네디의 상대적 약점으로 지적되던 남부 지역 기반과 국정 경험 부족을 동시에 보완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