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st 1968 (토론 | 기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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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이후, 1947년 54세의 정치가 [[스테판 스타진스키]]가 폴란드의 | 전쟁이 끝난 이후, 1947년 54세의 정치가 [[스테판 스타진스키]]가 폴란드의 총리로 선출되어 취임하였다. 스타진스키는 [[바르샤바]] 시장 출신으로 유능한 행정가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으며 바르샤바 시장직 수행의 경험을 살려 폴란드의 황폐해진 경제를 재건하는데 온 임기를 쏟아 바쳤다. 1953년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사후, 스타진스키는 폴란드의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 ||
=== 경제 개혁과 탈소화 === | |||
스타진스키는 권위주의적인 행보로 인하여 시민들의 반발을 샀으며 여론 관리에 실패해, 1961년 물러나고 이후 개혁파인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한다. 고무우카는 비록 마르크스주의자이긴 하였으며 소련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인사였지만, 동시에 민족주의자로서 폴란드의 자주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어야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 |||
1972년 고무우카 퇴진 이후,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탈소화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 |||
=== 냉전기 === | === 냉전기 === | ||
2022년 10월 26일 (수) 00:3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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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 Zjednoczone Wieloetniczne Socjalistyczne Państwa Polskie United Multi-ethnic Socialist States of Polan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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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 | 국장 | |||||||||||||||||||||||||
| Kraj wszystkich narodów 모든 민족의 나라 (1927~現) | ||||||||||||||||||||||||||
| 상징 | ||||||||||||||||||||||||||
| 국가 |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레크 (Mazurek Dąbrowskiego) | |||||||||||||||||||||||||
| 국화 | 팬지꽃 | |||||||||||||||||||||||||
| 국조 | 흰꼬리수리 | |||||||||||||||||||||||||
| 역사 | ||||||||||||||||||||||||||
| • 폴란드 제2공화국 성립 1918년 • 현 체제 성립 1927년 • 개혁 개방 1987년 | ||||||||||||||||||||||||||
| 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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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코드 | ||||||||||||||||||||||||||
| 616, PL, POL | ||||||||||||||||||||||||||
| 국가 전화 코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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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경보 | ||||||||||||||||||||||||||
| 여행 자제 | 전 지역 | |||||||||||||||||||||||||
|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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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역사
인테르마리움, 제국의 태동
1918년, 러시아 혁명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폴란드는 대분할 이후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옆으로는 강대국 독일과 소련이 버티고 있었으며, 레프 트로츠키가 이끄는 소련군은 소련-폴란드 전쟁을 일으키며 폴란드의 주권을 위협했다. 또 폴란드는 다민족 국가로서 유대인들이 전체 인구의 5% 이상을 차지하는 등 불안한 요소가 다수 포진되어있었다.
폴란드의 독립운동가이자, 폴란드군 총사령관이었고, 독립 직후 폴란드 총통의 자리에 오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이러한 폴란드의 지정학적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폴란드의 특수한 외교적 체제인 인테르마리움을 성립하고자 하였다. 폴란드말로 미엔지모제라고도 불리우는 인테르마리움은 "바다와 바다 사이"를 의미하며, 그것은 흑해와 발트해 사이에서 폴란드가 중부 유럽의 지배적인 외교 위치를 가져야한다는 피우수트스키의 외교적 신념이었다. 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인테르마리움을 통해 폴란드가 중부 유럽에서 지배적인 무역 국가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며, 또한 강력한 내수 시장을 지니므로, 무역에 의존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는 현실적인 계산 역시 반영되었다.
피우수트스키는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과의 외교적 협상을 위해, 소련과 독일 양쪽에 대항하는 제2의 폴리투 건국이라는 공통의 이익을 확인하고,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의 주권을 보호하는 대가로 하나의 군사 동맹체를 형성하기로 하였다. 한편 소련과는 1921년 민스크 조약을 체결,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2/3은 폴란드에게, 나머지는 소련에게 귀속시키는 영토 확장을 이루어냈다.
27 혁명
1920년대 내내 폴란드에서는 민족주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피우수트스키의 정적인 로만 드모프스키와 민족민주당 세력은 폴란드인만의 폴란드 건국을 주창하며 리투아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등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드러냈다. 이들의 선동으로 인하여 폴란드의 단일 민족성은 1920년대 초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허나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의 애국주의를 지지했을 지언정 폴란드의 단일민족성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이었고, 폴란드가 폴리투라는 단일한 정체성 속에 여러 민족이 뭉치는 체제가 되어야함을 강변했다. 이러한 사고의 일환으로, 피우수트스키 총통는 일찍이 1923년 유대인 차별금지법을 통해 폴란드인의 타민족 차별을 법적으로 제재한 바 있다. 이는 민족주의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1927년 1월 10일, 민족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폴란드의 주요 도시에서 피우수트스키의 총통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으며, 경찰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1927년 폴란드 소요 사태가 벌어진다. 피우수트스키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폴란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폭력 세력을 몰아내자고 국민들을 선동했고, 군대와 경찰이 동원된 소요 사태 진압 세력은 민족민주당 당원들을 체포하고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그해의 10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사회주의 사상[6]과 다민족이 혼재된 폴리투적 애국주의를 합친 다민족 사회주의를 가치로 하여, 폴란드를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으로 재편시켰다. 이로 인해 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과 리투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이 가맹국이 되었으며 피우수트스키는 총통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바로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 직위에 올랐다. 이러한 친위 쿠데타의 과정을 통틀어 27 혁명이라고 부른다.
27 혁명에 성공한 폴란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표방하고, 반소와 반독 감정을 동시에 추구함과 동시에, 소련-폴란드 전쟁으로 확보한 우크라이나 지역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소련을 견제하고, 북쪽으로는 라트비아를 침공해 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성립하는 등 대대적인 영토 팽창을 실현했다. 1930년대 들어 폴란드는 중부 유럽의 가장 강력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27 혁명과 그 뒤를 이은 폴란드의 국제 침략 노선은 세계 연맹을 위시로 한 국제 사회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강대국들은 폴란드 문제에 개입하며 정복 전쟁의 중단을 요청하였다. 폴란드는 결국 라트비아 내에서 주민투표를 통하여 일부 지역을 독립시킬 수 밖에 없었으며, 단치히 역시 독일에게 반환하는 방식으로 다른 국가들을 달래며 패권을 확장시켰다.
경제 개혁
1920년대 내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중공업을 육성하여 폴란드의 고질적인 무역 의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위해 많은 인구를 토대로 한 내수 시장을 키웠고, 또 한편으로는 중부 유럽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통한 무역에서의 우위도 확립하였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과의 자유무역은 폴란드에게 큰 부를 가져다주었다. 가장 큰 관심은 대독일 무역 의존도 감소였다. 특히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 문제로 독일과 사사건건 마찰을 겪던 폴란드는 무역 자체의 의존도도 낮췄을 뿐만 아니라 대독 무역 의존도 역시 대체 시장의 개발로 감소시켰다. 결정적인 것은 영토 분쟁을 이유로 일어난 1925년의 독일-폴란드 무역 분쟁이었다. 폴란드는 단치히를 독일에게 반환하는 대신 독일이 기존보다 더 유리한 조건으로 폴란드의 물품을 구입시키게 하는 마르크스-피우수트스키 협정[7]을 발효시켰다. 폴란드는 일단은 독일에게 단치히를 넘겨주지만, 다시 전쟁으로 이를 빼앗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뒤로는 독일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 구조를 구축하는 현실적 방안을 모색했다.
이러한 폴란드의 경제 구조 개혁은 1929년 대공황 당시 폴란드가 다른 국가들보다 더 선방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우수트스키는 경제 4개년 개발 계획을 통해 실레시아 지역에 집중되어있던 중공업 지대들을 폴란드 본토로 이전시키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규모 공단을 유치하고, 각 구성국간의 블록 경제를 추구함과 동시에 다방면에서 내수 시장의 성장을 토대로 한 경제 구조 개편을 가속화시켰다. 폴란드는 대공황 시기, GDP가 17% 정도 감소하는데 그쳐 타격을 잘 버텨냈고, 1932년 이후 경기 회복에 접어들었다. 반대로 독일은 경제 혼란에 빠져 결국 파산에 이르게 말았고, 1930년대 이후 폴란드는 독일의 경제 규모를 일시적으로 넘어서게 된다.
이 파트는 거의 반쯤 자면서 쓴거라 개 병맛인데다 고증도 개판이라 나중에 논문을 보면서 천천히 수정할 계획이 있다.
정치 개혁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미국의 합중국 체제를 본받은, 다민족이 애국심으로 뭉친 폴리투 제국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대통령 아래에 부통령을 두었고, 총리 직위는 있었지만 대통령이 총리직을 동시에 역임해서 사실상 총통 제도였다.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역임하였으며 상원은 각 구성국에서 10명씩 파견한 국회의원으로, 하원은 인구비례에 따른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하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제도를 많이 본땄음을 알 수 있다.
피우수트스키 정권은 27혁명 이후 상원인 최고 라다(평의회)와, 하원인 세임을 두었다. 세임(Sejm)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 귀족들의 입법부였던 세임에서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피우수트스키 정부가 폴리투를 최대한 계승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술했듯 라다는 각 구성국에서 동등한 정수로 선출했고 세임은 인구비례를 통한 총선거로 선출하였다. 당시에는 폴란드인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으나, 최고 라다에서의 균형으로 특정 민족의 불만이 조성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다. 폴란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였으며, 월 20즈워티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폴란드 선거국의 조사에 따르면, 1931년의 총선거에서는 폴란드인의 약 26.4%가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4년 뒤인 1935년의 총선거에서는 이 비율이 40%대 초반까지 상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피우수트스키에 따르는 폴란드 국민당이 상하원 전체 의석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제1야당인 폴란드 사회당은 10석 내외의 의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부정선거와 선거구 조작이 횡횡했던 결과였고 또 대통령이 상원 의원의 33%, 하원 의원의 20%를 지명하게 함으로서 폐단은 더욱 심화되었다. 폴란드 공산당 등 공산주의 정당은 금지되었고 폴란드 민족민주당 등 여타 극우 성향, 파시즘, 민족주의 정당들도 해산 조치를 맞이했다.
제2차 세계대전
1935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사후, 유제프 할레르가 잠깐 정권을 잡으나, 피우수트스키와 정치적으로 불편한 사이였다는 이유로 정권 지지 기반이 약했으며 1937년 2월 이후에는 피우수트스키 정부의 각료였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가 정권을 잡고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전후 경제 재건
전쟁이 끝난 이후, 1947년 54세의 정치가 스테판 스타진스키가 폴란드의 총리로 선출되어 취임하였다. 스타진스키는 바르샤바 시장 출신으로 유능한 행정가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으며 바르샤바 시장직 수행의 경험을 살려 폴란드의 황폐해진 경제를 재건하는데 온 임기를 쏟아 바쳤다. 1953년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사후, 스타진스키는 폴란드의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경제 개혁과 탈소화
스타진스키는 권위주의적인 행보로 인하여 시민들의 반발을 샀으며 여론 관리에 실패해, 1961년 물러나고 이후 개혁파인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한다. 고무우카는 비록 마르크스주의자이긴 하였으며 소련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인사였지만, 동시에 민족주의자로서 폴란드의 자주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어야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1972년 고무우카 퇴진 이후,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탈소화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냉전기
민주주의로의 체제 이양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파로 인해 소련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소련에서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자, 기존의 공산권 국가와 이질적 체제를 갖추고 있던 폴란드는 소련으로부터 독자적인 외교 노선과 정치 노선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은 이에 반발했으나, 결과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를 시나트라 독트린이라 부른다. 결과적으로 시나트라 독트린의 수립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붕괴로도 이어진다.
1987년 10월 25일, 27 혁명의 60주년을 맞이하여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대통령은 레흐 바웬사를 위시로 한 폴란드 자유노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회의 부분적 자유화 조치를 취하였다. 통제 경제는 혼합경제로 재편되었고 다당제도 허용되어 폴란드 인민당 등 여러 야당들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민족 사회주의라는 체제는 포기하지 않은 채 부분적이고 점진적으로 개혁이 진행되었고, 기존 사회주의 체제의 효율성은 유지한 채 자본주의-부분적 제한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체제로 성공적으로 체제를 이양하여 1989년 이후의 동구권 붕괴에도 불구하고 국명에 "사회주의"가 들어가는 유일무이한 중부 유럽의 맹주로 자리잡았다.
1989년 7월 1일,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로운 대통령 선거 하에서 폴란드 자유노조, 폴란드 인민당, 폴란드 민주동맹의 지지를 받는 무소속 레흐 바웬사 후보가 50%를 득표해 47%를 얻은 사회주의민족당 소속의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스프키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체제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성사되었다. 이 소식은 다른 동구권 국가로도 퍼져나가 동유럽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허나 바웬사 대통령은 폴란드 합중국 체제 자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이미 체제와 타협하여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민주화로의 체제를 이양하기로 한 상태였다. 바웬사는 사회주의 체제를 준수하면서 부분적으로 사회, 경제, 정치의 자유화를 약속하며 폴란드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럼에도 각 소수민족들의 독립을 바라는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고 바웬사는 각 국가들의 독립을 보장하며 주민투표를 제안했다. 1992년 1월 1일, 주민투표를 통하여 각 구성국들의 독립 여부를 결정하게 하였다. 크림 반도 러시아인 자치 공화국이 찬성 52.6%,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이 찬성 83.2%,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60.6%로 합중국에서 탈퇴하였으며, 그 외 구성국들은 폴란드 합중국 체제에 잔류하기로 결정하였다.
레흐 바웬사 대통령은 사회 개혁 조치로 서방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경제 문제와 민족 분리 독립 문제에서 잘못 대처하였다는 이유로 큰 비판을 받았고 1994년 재선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주의민족당의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스프키 후보에 55% 대 45%로 크게 패배했다. 이후 현재까지 정권교체 없이 사회주의민족당의 일당우위 정당제가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