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누벨 외로프): 두 판 사이의 차이

Communist 1968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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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의 파괴는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1948년까지 수도 기능을 할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폴란드는 임시로 [[루블린]]에 정부 기관을 설치하였고, 또 바르샤바에 위치했던 각종 시설들을 지방 도시로 분산시키며 연방 국가로서의 지방 분권에 열중했다. 바르샤바의 재건은 소련의 선물이자, 전쟁 개전 당시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에 대한 사과와도 같았다. 소련에서 파견된 수많은 토목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증언, 오래된 설계도, 심지어는 그림책과 민요까지 참조하며 전쟁으로 파괴된 구시가지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였다. 벽돌도 일부러 진흙을 뭍혀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1948년, 바르샤바는 말끔하게 재건되었고, 구시가지는 전쟁 전과 다름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57년 바르샤바 구시가지는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시가지는 완벽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른 콘크리트 도시로 건설되었다. 신시가지 중심부에는 "스탈린의 선물" [[문화과학궁전]]이 들어섰고, 문화과학궁전은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바르샤바의 파괴는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1948년까지 수도 기능을 할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폴란드는 임시로 [[루블린]]에 정부 기관을 설치하였고, 또 바르샤바에 위치했던 각종 시설들을 지방 도시로 분산시키며 연방 국가로서의 지방 분권에 열중했다. 바르샤바의 재건은 소련의 선물이자, 전쟁 개전 당시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에 대한 사과와도 같았다. 소련에서 파견된 수많은 토목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증언, 오래된 설계도, 심지어는 그림책과 민요까지 참조하며 전쟁으로 파괴된 구시가지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였다. 벽돌도 일부러 진흙을 뭍혀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1948년, 바르샤바는 말끔하게 재건되었고, 구시가지는 전쟁 전과 다름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57년 바르샤바 구시가지는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시가지는 완벽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른 콘크리트 도시로 건설되었다. 신시가지 중심부에는 "스탈린의 선물" [[문화과학궁전]]이 들어섰고, 문화과학궁전은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49년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사후, [[스테판 스타진스키]]는 소련의 지지에 힘입어 제3대 대통령으로서 대의원들의 만장일치로 선출된다.
1949년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사후, [[스테판 스타진스키]]는 소련의 지지에 힘입어 제3대 대통령으로서 대의원들의 만장일치로 선출된다. 1950년에는 [[6.25 전쟁]]에 폴란드군이 소련, 중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지원 물자를 북한에 보내기도 했다.


=== 경제 개혁과 탈소화 ===
=== 경제 개혁과 탈소화 ===

2022년 10월 26일 (수) 01: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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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
Zjednoczone Wieloetniczne Socjalistyczne Państwa Polskie
United Multi-ethnic Socialist States of Poland
국기 국장
Kraj wszystkich narodów
모든 민족의 나라
(1927~現)
상징
국가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레크
(Mazurek Dąbrowskiego)
국화 팬지꽃
국조 흰꼬리수리
역사
폴란드 제2공화국 성립 1918년
현 체제 성립 1927년
개혁 개방 1987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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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바르샤바 (Warszawa)
북위 52° 13′ 56″ 동경 21° 00′ 30″
최대 도시
면적 1,043,178km2
내수면 비율 1.8%
접경국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라트비아
러시아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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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억 1,398만 7,400명 (2022년)
밀도 109.26명/km2
출산율 1.85명 (2022년)
민족 비율 폴란드인 43.2%
우크라이나인 25.8%
벨라루스인 13.3%
유대인 4.2%
리투아니아인 4.0%
몰다비아인 2.6%
독일인 2.1%
리보니아인 1.6%
외국인 3.2% (2022년)
공용어 폴란드어
지역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리투아니아어, 라트비아어, 독일어, 이디시어, 루마니아어
공용 문자 라틴 문자, 키릴 문자
종교 국교 없음 (세속주의)
비율 가톨릭교 71.2%
정교회 5.6%
유대교 2.6%
이슬람교 2.1%
무종교 및 기타 18.5%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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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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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다민족 사회주의 (명목상), 공화제, 사회주의 공화국, 이원집정부제, 일당 우위 정당제, 양원제
민주주의 지수 5.87점[188개국 중 76위] (혼합된 체제)
대통령
(국가 원수)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정부
요인
총리
(정부 수반)
율리아 티모셴코
부통령[2] 안제이 두다
하원의장 알렉산데르 두친스키
인민재판소장 파트릭 조비코
입법부 최고 라다 (상원)
세임 (하원)
집권 여당 사회주의민족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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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국가자본주의혼합 경제[3]
GDP
(PPP)
$4조 6,438억 4,667만[4]
1인당 $40,740 (2021년)
GDP
(명목)
$3조 491억 6,295만[5]
1인당 $26,750 (2021년)
신용등급 무디스 A1
S&P A-
Fitch A-
화폐 공식 화폐 즈워티(zł, złoty)
ISO 4217 PLN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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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GMT+01:00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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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대한민국: 1988년 11월 1일
북한: 1948년 10월 16일
국제연합 가입 1945년 10월 24일
무비자 입국 양국 모두 45일
ccTLD
.pl
국가 코드
616, PL, POL
국가 전화 코드
+48
여행 경보
여행 자제 전 지역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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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역사

인테르마리움, 제국의 태동

1918년, 러시아 혁명베르사유 조약으로 폴란드는 대분할 이후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옆으로는 강대국 독일과 소련이 버티고 있었으며, 레프 트로츠키가 이끄는 소련군은 소련-폴란드 전쟁을 일으키며 폴란드의 주권을 위협했다. 또 폴란드는 다민족 국가로서 유대인들이 전체 인구의 5% 이상을 차지하는 등 불안한 요소가 다수 포진되어있었다.

폴란드의 독립운동가이자, 폴란드군 총사령관이었고, 독립 직후 폴란드 총통의 자리에 오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이러한 폴란드의 지정학적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폴란드의 특수한 외교적 체제인 인테르마리움을 성립하고자 하였다. 폴란드말로 미엔지모제라고도 불리우는 인테르마리움은 "바다와 바다 사이"를 의미하며, 그것은 흑해와 발트해 사이에서 폴란드가 중부 유럽의 지배적인 외교 위치를 가져야한다는 피우수트스키의 외교적 신념이었다. 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인테르마리움을 통해 폴란드가 중부 유럽에서 지배적인 무역 국가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며, 또한 강력한 내수 시장을 지니므로, 무역에 의존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는 현실적인 계산 역시 반영되었다.

피우수트스키는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과의 외교적 협상을 위해, 소련과 독일 양쪽에 대항하는 제2의 폴리투 건국이라는 공통의 이익을 확인하고,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의 주권을 보호하는 대가로 하나의 군사 동맹체를 형성하기로 하였다. 한편 소련과는 1921년 민스크 조약을 체결,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2/3은 폴란드에게, 나머지는 소련에게 귀속시키는 영토 확장을 이루어냈다.

27 혁명

1920년대 내내 폴란드에서는 민족주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피우수트스키의 정적인 로만 드모프스키민족민주당 세력은 폴란드인만의 폴란드 건국을 주창하며 리투아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등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드러냈다. 이들의 선동으로 인하여 폴란드의 단일 민족성은 1920년대 초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허나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의 애국주의를 지지했을 지언정 폴란드의 단일민족성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이었고, 폴란드가 폴리투라는 단일한 정체성 속에 여러 민족이 뭉치는 체제가 되어야함을 강변했다. 이러한 사고의 일환으로, 피우수트스키 총통는 일찍이 1923년 유대인 차별금지법을 통해 폴란드인의 타민족 차별을 법적으로 제재한 바 있다. 이는 민족주의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1927년 1월 10일, 민족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폴란드의 주요 도시에서 피우수트스키의 총통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으며, 경찰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1927년 폴란드 소요 사태가 벌어진다. 피우수트스키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폴란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폭력 세력을 몰아내자고 국민들을 선동했고, 군대와 경찰이 동원된 소요 사태 진압 세력은 민족민주당 당원들을 체포하고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그해의 10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사회주의 사상[6]다민족이 혼재된 폴리투적 애국주의를 합친 다민족 사회주의를 가치로 하여, 폴란드를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으로 재편시켰다. 이로 인해 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리투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이 가맹국이 되었으며 피우수트스키는 총통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바로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 직위에 올랐다. 이러한 친위 쿠데타의 과정을 통틀어 27 혁명이라고 부른다.

27 혁명에 성공한 폴란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표방하고, 반소와 반독 감정을 동시에 추구함과 동시에, 소련-폴란드 전쟁으로 확보한 우크라이나 지역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소련을 견제하고, 북쪽으로는 라트비아를 침공해 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성립하는 등 대대적인 영토 팽창을 실현했다. 1930년대 들어 폴란드는 중부 유럽의 가장 강력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27 혁명과 그 뒤를 이은 폴란드의 국제 침략 노선은 세계 연맹을 위시로 한 국제 사회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강대국들은 폴란드 문제에 개입하며 정복 전쟁의 중단을 요청하였다. 폴란드는 결국 라트비아 내에서 주민투표를 통하여 일부 지역을 독립시킬 수 밖에 없었으며, 단치히 역시 독일에게 반환하는 방식으로 다른 국가들을 달래며 패권을 확장시켰다.

경제 개혁

1920년대 내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중공업을 육성하여 폴란드의 고질적인 무역 의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위해 많은 인구를 토대로 한 내수 시장을 키웠고, 또 한편으로는 중부 유럽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통한 무역에서의 우위도 확립하였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과의 자유무역은 폴란드에게 큰 부를 가져다주었다. 가장 큰 관심은 대독일 무역 의존도 감소였다. 특히 단치히폴란드 회랑 문제로 독일과 사사건건 마찰을 겪던 폴란드는 무역 자체의 의존도도 낮췄을 뿐만 아니라 대독 무역 의존도 역시 대체 시장의 개발로 감소시켰다. 결정적인 것은 영토 분쟁을 이유로 일어난 1925년의 독일-폴란드 무역 분쟁이었다. 폴란드는 단치히를 독일에게 반환하는 대신 독일이 기존보다 더 유리한 조건으로 폴란드의 물품을 구입시키게 하는 마르크스-피우수트스키 협정[7]을 발효시켰다. 폴란드는 일단은 독일에게 단치히를 넘겨주지만, 다시 전쟁으로 이를 빼앗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뒤로는 독일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 구조를 구축하는 현실적 방안을 모색했다.

이러한 폴란드의 경제 구조 개혁은 1929년 대공황 당시 폴란드가 다른 국가들보다 더 선방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우수트스키는 경제 4개년 개발 계획을 통해 실레시아 지역에 집중되어있던 중공업 지대들을 폴란드 본토로 이전시키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규모 공단을 유치하고, 각 구성국간의 블록 경제를 추구함과 동시에 다방면에서 내수 시장의 성장을 토대로 한 경제 구조 개편을 가속화시켰다. 폴란드는 대공황 시기, GDP가 17% 정도 감소하는데 그쳐 타격을 잘 버텨냈고, 1932년 이후 경기 회복에 접어들었다. 반대로 독일은 경제 혼란에 빠져 결국 파산에 이르게 말았고, 1930년대 이후 폴란드는 독일의 경제 규모를 일시적으로 넘어서게 된다.

이 파트는 거의 반쯤 자면서 쓴거라 개 병맛인데다 고증도 개판이라 나중에 논문을 보면서 천천히 수정할 계획이 있다.

정치 개혁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미국의 합중국 체제를 본받은, 다민족이 애국심으로 뭉친 폴리투 제국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대통령 아래에 부통령을 두었고, 총리 직위는 있었지만 대통령이 총리직을 동시에 역임해서 사실상 총통 제도였다.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역임하였으며 상원은 각 구성국에서 10명씩 파견한 국회의원으로, 하원은 인구비례에 따른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하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제도를 많이 본땄음을 알 수 있다.

피우수트스키 정권은 27혁명 이후 상원인 최고 라다(평의회)와, 하원인 세임을 두었다. 세임(Sejm)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 귀족들의 입법부였던 세임에서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피우수트스키 정부가 폴리투를 최대한 계승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술했듯 라다는 각 구성국에서 동등한 정수로 선출했고 세임은 인구비례를 통한 총선거로 선출하였다. 당시에는 폴란드인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으나, 최고 라다에서의 균형으로 특정 민족의 불만이 조성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다. 폴란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였으며, 월 20즈워티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폴란드 선거국의 조사에 따르면, 1931년의 총선거에서는 폴란드인의 약 26.4%가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4년 뒤인 1935년의 총선거에서는 이 비율이 40%대 초반까지 상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피우수트스키에 따르는 폴란드 국민당이 상하원 전체 의석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관제 야당인 폴란드 사회당은 10석 내외의 의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부정선거와 선거구 조작이 횡횡했던 결과였고 또 대통령이 상원 의원의 33%, 하원 의원의 20%를 지명하게 함으로서 폐단은 더욱 심화되었다. 폴란드 공산당, 폴란드 민족민주당 등 야당의 설립은 금지되었고 다당제가 아닌 사실상의 일당제 시대가 개막함으로서 의회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외교 정책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1920년대 후반까지 강력한 반소, 반독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들어 독일의 경제 사정 악화로 인해 극우 정당이 준동하기 시작하자 폴란드 정치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더구나 독일 내에서는 사민당이든 중앙당이든 중도파와 극좌우파를 가릴 것 없이 반파(波) 여론이 높았던 상황이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양면으로의 적대 관계를 위험하게 생각하여 소련과의 친선 맺기에 나섰다. 이는 비록 비(非)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이었기는 했지만, 어렴풋이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던 폴란드와 사회주의의 대조국 소련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의 결과이기도 했다.

1929년, 유제프 할레르 폴란드 부통령과 알렉세이 리코프 소련 인민평의회 의장은 르부프에서 만나, 양국간의 친선과 점진적인 동맹 관계 확립을 합의하였다. 폴란드 국민당은 총 70%의 동의를 통하여, 당명을 사회주의민족당으로 교체하고 코민테른에 가입하였다. 폴란드는 소련과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도, 폴란드가 주장하고 있던 드네르프강 동부의 영역을 주장하지 않고,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북부에 대한 소련의 영유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국력은 폴란드와 소련이 거의 비슷하였기 때문에, 양쪽은 서로의 동맹 관계에 만족하였으나, 이는 사상적이라기보다는 이익적 동맹에 가까웠다.

어느정도는 당시 폴란드 내에서 준동하던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폴란드는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민족당 내에서 공산주의를 허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비인가 공산당은 여전히 탄압하는 방식으로 반정부 마르크스주의의 준동을 차단하였으며 소련은 이를 묵인하였다. 그럼에도 사회주의민족당 내 마르크스주의 세력은 그 세를 키워 고무우카 정권 이후로는 나름대로 민족당의 주류를 차지한다.

한편 독일과의 관계는 꾸준히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1935년, 피우수트스키가 죽었다. 그 이전부터 악화되었던 병세 때문에 그의 측근들이 사실상의 업무 대행을 하였으므로 정치적 공백기는 짧았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사후, 부통령 유제프 할레르가 잠깐 정권을 잡으나, 피우수트스키와 정치적으로 불편한 사이였다는 이유로 정권 지지 기반이 약했으며 1937년 2월 이후에는 피우수트스키 정부의 각료였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가 정권을 잡고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유제프 할레르는 총리직을 차지하며 27 혁명 이후 총통 제도에 가깝게 유지되었던 이원집정부제는 폐지되고 대통령-부통령 우위의 이원집정부 체제가 성립된다.

시코르스키는 피우수트스키보다도 더욱 원칙주의적인 입장이었으므로, 국민들 사이에서는 지지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으며 소련과도 불편한 동맹의 관계를 이어갔다. 소련은 민족당 내 마르크스주의자를 키워 장기적으로 폴란드를 자국에 충성적인 동맹으로 돌려놓으려는 계획을 세웠고 시코르스키는 이런 소련의 공작을 탐탁치 않게 보았다. 허나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폴란드의 선택지는 소련과의 군사동맹 강화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에 선전 포고하였고, 프랑스와 영국 역시 선전포고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독일군은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폴란드 영토 깊숙히 쳐들어갔고, 폴란드는 저항하며 버텼으나 1940년 1월 6일 수도 바르샤바가 함락되며 3달만에 독일군에 항복하고 만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를 비롯한 상당수의 군장성과 병력이 소련이나 영국으로 탈출해 자유 폴란드군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절반의 성공으로 그쳤다. 한편으로 시코르스키 정부는 유대인 학살을 우려해, 폴란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중 약 10%에 달하는 30만명을 러시아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유대인 피신 작전은 유대인에 대해 안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인들의 반발과, 유대인에 대한 특별 대우가 아니냐는 항의 속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을 고려하였으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교부장관의 설득으로 소련과 독일의 전면전은 회피되었고 대신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유폴란드군에 막대한 무기 지원으로 독일을 견제하였다. 프랑스 함락 이후에는 전후 유럽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아예 폴란드군에 자국군을 섞는 식으로 대리전까지 치루게 했는데, 이것이 독일의 불안을 촉발하였고, 결국 독일은 다소 이른 1941년 2월 독소 전쟁을 개전시켰다. 소련군은 기다렸다는듯 전쟁에 응했지만, 독일의 기동전으로 인해 순식간에 모스크바 인근까지 밀려났다. 하지만 소련-자유폴란드 연합군의 지속된 공세 속에서 독일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독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폴란드 총독부 내의 폴란드인들을 차별 대우하였다. 폴란드인들은 전차나 버스에서 뒷자리에만 타야했고 독일인들이 서있으면 그들에게 양보해야했다. 모든 관공서에서는 독일어만을 사용해야했으며, 폴란드의 국민음악가 쇼팽의 음악을 연주하면 처형되었다. 폴란드인들은 극도의 기아와 차별 속에서 수없이 학살당하였고, 약 150만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폴란드 인구 전체의 5%에 달하는 엄청난 수였다. 특히 유대인은 당시 폴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 315만명중, 40%에 육박하는 120만명 가량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나마도 폴란드 정부가 유대인들의 피신을 도운 덕택에 피해가 적었던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이에 대항하여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일으켰으나,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허나 게토 봉기 시절, 유대인들에 의해 주요 관공서에 폴란드 국기가 걸리는 모습을 보고, 몇년간 들어본적도 없던 폴란드 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은 폴란드인들은 강력히 고무되었다.

게토 봉기의 영향을 받은 자유 폴란드군은 1944년 바르샤바 대봉기를 기획한다. 독일군을 각개 격파하고 있던 소련 역시, 동부 전선으로의 빠른 영토 확장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자유폴란드군을 지원하였다. 1944년 8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독일이 혼란해진 틈을 타 바르샤바 각지에서 자유폴란드 게릴라군이 봉기했고, 뒤이어 폴란드의 각 도시에서도 무장 게릴라들의 산발적 전투가 이어졌다. 비록 독일 국경과 가까운 몇 도심에서 저항은 실패했으나, 폴란드의 자유 봉기는 폴란드 영토 상당수를 해방시켰으며, 1944년 9월 20일 바르샤바 해방구와 소련-자유폴란드군의 점령지를 잇는 전선이 형성되며 봉기는 성공으로 끝난다. 자유폴란드군은 1944년 10월 해체되고, 다시 폴란드 합중국군으로 재편된다.

1944년 12월, 소련-폴란드 연합군은 폴란드의 모든 영토를 해방시킨데 이어, 오스트리아 동부와 독일 동부, 바이에른, 이탈리아 북부 지역등을 해방시키며 선전한다. 전후 영토 조정안에 폴란드 역시 참여하였고, 폴란드는 동프로이센슐레지엔 지역 전체와 포메른 지역 일부를 할양받으며 영토를 늘렸고, 체코슬로바키아도 자국의 연방국가로 포함시켰다. 또한 독일은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독일 민주 공화국으로 분단되었고 오스트리아에도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며 공산권의 "철의 장막"이 수립된다. 다만 폴란드는 전쟁 내내 소련의 지원을 받은 것 때문에, 이들 국가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점할 수 없었으며, 자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위성국들은 철저히 소련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폴란드 역시 반소 민족주의자들의 힘이 대폭 감소했고 1945년 이후 사회주의민족당 내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힘이 강력해진다.

전후 경제 재건

역설적으로 소련에 기댄 2차 세계 대전의 수행은 온건한 반소파였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켰다. 그는 1943년 의문의 비행기 사고를 당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는데, 폴란드 정계에서는 소련에 온건히 반대하던 시코르스키를 죽이고 마르크스주의자를 대신 앉히려는 소련의 계략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았다. 또 2차 대전 도중의 마음고생, 과로 등으로 인해 시코르스키는 폭삭 늙어버렸고 1945년 이후로는 잔병 치레를 앓느라 제대로 서있는것도 힘든 신세가 되었다. 결국 1946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53세의 젊은 정치인 스테판 스타진스키가 총리로 취임하고 실권을 잡았다.

스타진스키는 바르샤바의 시장이었다. 그는 바르샤바의 시장이었던 시절, 도시 정화 사업과 각종 토목 공사로 바르샤바를 "동유럽의 파리"로 만들었다는 호평을 듣고 있었다. 비록 히틀러의 잔악한 통치로 전후 아름다웠던 바르샤바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이는 스타진스키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굳게 먹게하는데 큰 동력이 되었다. 스타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내각에 포진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총리이자 "국토재건부" 장관을 동시에 역임하며 만신창이가 된 폴란드를 재건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바르샤바의 파괴는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1948년까지 수도 기능을 할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폴란드는 임시로 루블린에 정부 기관을 설치하였고, 또 바르샤바에 위치했던 각종 시설들을 지방 도시로 분산시키며 연방 국가로서의 지방 분권에 열중했다. 바르샤바의 재건은 소련의 선물이자, 전쟁 개전 당시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에 대한 사과와도 같았다. 소련에서 파견된 수많은 토목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증언, 오래된 설계도, 심지어는 그림책과 민요까지 참조하며 전쟁으로 파괴된 구시가지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였다. 벽돌도 일부러 진흙을 뭍혀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1948년, 바르샤바는 말끔하게 재건되었고, 구시가지는 전쟁 전과 다름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57년 바르샤바 구시가지는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시가지는 완벽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른 콘크리트 도시로 건설되었다. 신시가지 중심부에는 "스탈린의 선물" 문화과학궁전이 들어섰고, 문화과학궁전은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49년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사후, 스테판 스타진스키는 소련의 지지에 힘입어 제3대 대통령으로서 대의원들의 만장일치로 선출된다. 1950년에는 6.25 전쟁에 폴란드군이 소련, 중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지원 물자를 북한에 보내기도 했다.

경제 개혁과 탈소화

스타진스키는 권위주의적인 행보로 인하여 시민들의 반발을 샀으며 여론 관리에 실패해, 1961년 물러나고 이후 개혁파인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한다. 고무우카는 비록 마르크스주의자이긴 하였으며 소련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인사였지만, 동시에 민족주의자로서 폴란드의 자주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어야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1972년 고무우카 퇴진 이후,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탈소화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민주주의로의 체제 이양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파로 인해 소련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소련에서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자, 기존의 공산권 국가와 이질적 체제를 갖추고 있던 폴란드는 소련으로부터 독자적인 외교 노선과 정치 노선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은 이에 반발했으나, 결과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를 시나트라 독트린이라 부른다. 결과적으로 시나트라 독트린의 수립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붕괴로도 이어진다.

1987년 10월 25일, 27 혁명의 60주년을 맞이하여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대통령은 레흐 바웬사를 위시로 한 폴란드 자유노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회의 부분적 자유화 조치를 취하였다. 통제 경제는 혼합경제로 재편되었고 다당제도 허용되어 폴란드 인민당 등 여러 야당들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민족 사회주의라는 체제는 포기하지 않은 채 부분적이고 점진적으로 개혁이 진행되었고, 기존 사회주의 체제의 효율성은 유지한 채 자본주의-부분적 제한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체제로 성공적으로 체제를 이양하여 1989년 이후의 동구권 붕괴에도 불구하고 국명에 "사회주의"가 들어가는 유일무이한 중부 유럽의 맹주로 자리잡았다.

1989년 7월 1일,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로운 대통령 선거 하에서 폴란드 자유노조, 폴란드 인민당, 폴란드 민주동맹의 지지를 받는 무소속 레흐 바웬사 후보가 50%를 득표해 47%를 얻은 사회주의민족당 소속의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스프키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체제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성사되었다. 이 소식은 다른 동구권 국가로도 퍼져나가 동유럽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허나 바웬사 대통령은 폴란드 합중국 체제 자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이미 체제와 타협하여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민주화로의 체제를 이양하기로 한 상태였다. 바웬사는 사회주의 체제를 준수하면서 부분적으로 사회, 경제, 정치의 자유화를 약속하며 폴란드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럼에도 각 소수민족들의 독립을 바라는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고 바웬사는 각 국가들의 독립을 보장하며 주민투표를 제안했다. 1992년 1월 1일, 주민투표를 통하여 각 구성국들의 독립 여부를 결정하게 하였다. 크림 반도 러시아인 자치 공화국이 찬성 52.6%,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이 찬성 83.2%,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60.6%로 합중국에서 탈퇴하였으며, 그 외 구성국들은 폴란드 합중국 체제에 잔류하기로 결정하였다.

레흐 바웬사 대통령은 사회 개혁 조치로 서방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경제 문제와 민족 분리 독립 문제에서 잘못 대처하였다는 이유로 큰 비판을 받았고 1994년 재선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주의민족당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스프키 후보에 55% 대 45%로 크게 패배했다. 이후 현재까지 정권교체 없이 사회주의민족당의 일당우위 정당제가 이어진다.

행정구역

  1. 188개국 중 76위
  2. 연방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겸한다.
  3. 1987년 이전에는 사회주의통제 경제에 가까웠다.
  4. 세계 6위, 유럽 2위
  5. 세계 7위, 유럽 3위
  6.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사회당 출신의 인물로, 非마르크스주의 계열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7. 여기서 말하는 마르크스는 카를 마르크스가 아닌 당시 독일의 수상이었던 빌헬름 마르크스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