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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의사당 폭★8.jpg|섬네일|공습으로 인해 파괴된 도쿄 국회의사당]] | |||
몰락 작전은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육군항공대가 시작을 알렸다. 본격적인 상륙 작전을 전개하기에 앞서 미군 사령부는 일본 열도 전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지시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아직 열도에 남아있는 산업 기반시설과 군 병력들을 절멸시키려는 의도였고 동시에 일본의 전투의지를 꺾어놓기 위한 시도였다. 8월 17일을 기점으로 중국과 대만에서 발진한 폭격기 800여대가 규슈를 시작으로 일본 열도를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 몰락 작전은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육군항공대가 시작을 알렸다. 본격적인 상륙 작전을 전개하기에 앞서 미군 사령부는 일본 열도 전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지시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아직 열도에 남아있는 산업 기반시설과 군 병력들을 절멸시키려는 의도였고 동시에 일본의 전투의지를 꺾어놓기 위한 시도였다. 8월 17일을 기점으로 중국과 대만에서 발진한 폭격기 800여대가 규슈를 시작으로 일본 열도를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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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규모 폭격은 8월 17일에 시작하여 9월에 절정을 이루다가 10월 초부터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10월 중순에는 전략폭격으로 전환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아래 설명될 '''핵폭격''' 때문이었다. | 이런 대규모 폭격은 8월 17일에 시작하여 9월에 절정을 이루다가 10월 초부터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10월 중순에는 전략폭격으로 전환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아래 설명될 '''핵폭격''' 때문이었다. | ||
===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최악의 핵폭격 === | ===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최악의 핵폭격 === | ||
1945년 10월 24일 가고시마, 미야자키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두 발이 투하되었다. 처음에는 항상 밤에만 오던 공습이 대낮에, 그것도 폭격기 여러대가 아닌 단 7대의 폭격기만이 나타난 것을 본 해당 지역의 시민들은 처음에는 의아함을 나타내었으나 불과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런 생각은 생각을 하던 당사자들과 함께 외마디 비명으로 기화되어 사라졌다. 미군 일부에서는 폭탄의 불발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 [[파일: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jpg|섬네일|가고시마와 미야자키에 투하 된 원자폭탄<ref>좌측이 가고시마에 투하 된 리틀보이, 우측이 미야자키에 투하 된 팻 맨.</ref>]] | ||
1945년 10월 24일 가고시마, 미야자키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두 발이 투하되었다. 처음에는 항상 밤에만 오던 공습이 대낮에, 그것도 폭격기 여러대가 아닌 단 7대의 폭격기만이 나타난 것을 본 해당 지역의 시민들은 처음에는 의아함을 나타내었으나 불과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런 생각은 생각을 하던 당사자들과 함께 외마디 비명으로 기화되어 사라졌다. 미군 일부에서는 폭탄의 불발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발 모두 불발되는 일은 없었다. | |||
당시 폭격지의 시민들은 매우 밝은 섬광을 목격하였으며 섬광을 뒤이어 천지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은 엄청난 폭발음과 음속에 달하는 폭풍이 도시를 집어삼켰다. 엄청난 충격파는 폭풍과 일체되어 근방의 모든 건물들을 파괴하였는데 이미 상단에 언급된 열도 대공습으로 인하여 목조 건물은 모두 날아간 상황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석조 및 콘크리트 건물 대부분도 완전히 파괴되어 도시를 쑥대밭 이하의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 당시 폭격지의 시민들은 매우 밝은 섬광을 목격하였으며 섬광을 뒤이어 천지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은 엄청난 폭발음과 음속에 달하는 폭풍이 도시를 집어삼켰다. 엄청난 충격파는 폭풍과 일체되어 근방의 모든 건물들을 파괴하였는데 이미 상단에 언급된 열도 대공습으로 인하여 목조 건물은 모두 날아간 상황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석조 및 콘크리트 건물 대부분도 완전히 파괴되어 도시를 쑥대밭 이하의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
2023년 2월 14일 (화) 00:10 판
틀:2차 세계대전의 전투 목록(아시아 및 태평양 (민국 38)) 틀:제2차 세계 대전/연표 (민국 38)
몰락 작전 ダウンフォール作戦 Operation Downfa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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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 작전 전개도 | ||||
기간 | ||||
1945년 8월 17일[1] ~ 1946년 8월 15일[2] | ||||
장소 | ||||
한반도, 만주, 류큐 등을 포함한 일본 제국 전역 | ||||
원인 | ||||
일본 제국의 포츠담 선언 거부 트리니티 실험의 실패로 인한 원자폭탄 투하 연기[3] | ||||
교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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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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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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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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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
일본의 항복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연합국 4개국의 일본 분할 |
개요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Before we're through with them, the Japanese language will be spoken only in hell. 윌리엄 홀시 |
전 포로가 되었어요. 우린 여기 와버렸어요, 그들이 우릴 속인 거에요. 私は捕虜に成りました。 私たちは此處に來てしまひました、彼らが私たちを騙したんです。 수용소에서 아사한 어느 신원 미상의 일본군 병사의 일기 中 |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 ダウンフォール作戦)은 제2차 세계대전 후반기 태평양 전쟁의 종결과 일본 제국의 멸망을 위한 연합군의 총공격 작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작전으로 이 작전 이후 일본이 항복하며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을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항복으로서 끝을 맺게 되었다.
연합군 총합 약 5,500,000명, 미군 단일로 봐도 약 1,900,000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 동원된 대작전으로 2024년 현재까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실행된 작전 중 최대 규모의 작전이자 가장 많은 사상자를 기록한 작전으로 남아있다.
배경
1942년에 있었던 미드웨이 해전이후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정예병력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1943년 과달카날 작전의 대실패와 1944년 사이판 전투의 패배로 인한 절대방위선의 붕괴 및 연합함대와 일본 해군의 붕괴라는 악재 속에서 일본 제국의 패전은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러나 이오지마가 함락되고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인해 일본 열도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와중에도 일본 정부는 항복은 커녕 협상의 뜻 조차도 밝히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타이완이 함락당하고 중국군이 난징을 넘어 베이징을 향해 가기 시작하자 미군의 공습은 더욱더 강해지기 시작했고 소련이 참전을 고민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국운이 풍전등화를 넘어 수내등화(水內燈火)의 수준에 이르게 되자 미중영 3개국은 당시로써는 굉장히 관대한 내용의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의 자발적인 항복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6]했고 이에 미군은 맨해튼 계획을 통하여 제작된 신형 폭탄인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여 전쟁을 단축시키고 일본 본토 상륙으로서 비롯될 막대한 규모의 피해를 줄여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실험용 가젯의 폭발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발하여 트리니티 실험이 실패하였고 원자폭탄의 사용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8월 6일 대본영 발표를 통해 일본이 항전의 뜻을 밝히며 유사 이래 아시아 최대규모의 군사작전이 그 서막을 열게 되었다.
전개
열도 대공습
몰락 작전은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육군항공대가 시작을 알렸다. 본격적인 상륙 작전을 전개하기에 앞서 미군 사령부는 일본 열도 전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지시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아직 열도에 남아있는 산업 기반시설과 군 병력들을 절멸시키려는 의도였고 동시에 일본의 전투의지를 꺾어놓기 위한 시도였다. 8월 17일을 기점으로 중국과 대만에서 발진한 폭격기 800여대가 규슈를 시작으로 일본 열도를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전의 도쿄 대공습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폭격은 소이탄을 통해 진행되었는데 르메이 장군의 설명에 따르자면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 뿐만이 아니라 그 공장에서 일하는 전쟁 수행원, 즉 민간인 노동자들의 제거를 의도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1,000톤 이상의 소이탄 폭격이 규슈를 시작으로 시코쿠와 도호쿠 이남 일본에 진행되었는데 이전의 일본 본토 공습과는 달리 대도시, 중소도시는 물론 산업시설이 이전된 일부 농촌에도 폭격이 전개된 까닭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학계에서는 열도 대공습 이후로 일본의 산업생산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 폭격으로 인하여 도쿄, 오사카, 교토 등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도시들은 잿더미로 전락하였고 이외에도 후쿠오카, 시즈오카, 구레, 구마모토, 나고야 등의 주요 도시들 역시도 통곡과 화약 냄새만이 가득한 폐허로 변해벼리게 되었다.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대략 200만 명 대로 추산되나 사망자를 추산할 때 추산 할 때 폭격의 "직접적인" 피해자, 즉 폭탄에 의하여 숨진 사망자들만을 추산하기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폭격의 간접적인 피해자[7]들까지 합산한다면 최대 500만 명대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대규모 폭격은 8월 17일에 시작하여 9월에 절정을 이루다가 10월 초부터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10월 중순에는 전략폭격으로 전환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아래 설명될 핵폭격 때문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최악의 핵폭격
1945년 10월 24일 가고시마, 미야자키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두 발이 투하되었다. 처음에는 항상 밤에만 오던 공습이 대낮에, 그것도 폭격기 여러대가 아닌 단 7대의 폭격기만이 나타난 것을 본 해당 지역의 시민들은 처음에는 의아함을 나타내었으나 불과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런 생각은 생각을 하던 당사자들과 함께 외마디 비명으로 기화되어 사라졌다. 미군 일부에서는 폭탄의 불발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발 모두 불발되는 일은 없었다.
당시 폭격지의 시민들은 매우 밝은 섬광을 목격하였으며 섬광을 뒤이어 천지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은 엄청난 폭발음과 음속에 달하는 폭풍이 도시를 집어삼켰다. 엄청난 충격파는 폭풍과 일체되어 근방의 모든 건물들을 파괴하였는데 이미 상단에 언급된 열도 대공습으로 인하여 목조 건물은 모두 날아간 상황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석조 및 콘크리트 건물 대부분도 완전히 파괴되어 도시를 쑥대밭 이하의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다음으로 시민들을 찾아온 것은 폭풍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들불이었다. 화재는 시내 중심부 11㎢를 모두 삼켜버렸고 폭풍은 절망에 찬 비명소리와 함께 불씨를 도시 곳곳으로 실어날렀다. 태양마저 가려버린 잿빛 대기는 도시 전체를 암흑 세계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와중에 화염 폭풍이 도시를 뒤덮었고 거리라고 부를 수도 없는 황무지 곳곳에는 비명소리만이 난무한 그야말로 지옥도가 도시 전역에 펼쳐졌다.
그 지옥도 속에서 피폭자들의 피부는 마치 양탄자 조각처럼 흘러내리고 수천가닥의 머리카락은 열기로 인해 하나로 용접되어 버렸으며 그조차도 없는 많은 사람들, 즉 피부 가죽 하나 남지않은 사람들은 괴물과 같은 몰골로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피폭자들은 검게 물들어 버린 하늘을 보며 일심동체가 되어 단 한 단어 만을 간곡히 외치게 되었으니, 바로 물이라는 단어였다. 불길속에서 누군가가 시작한 외침은 곧 도시 전체의 절망섞인 비명으로 바뀌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물을 요구하던 그들의 눈앞에는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빗물의 색깔은 마치 타르와도 같은 검은색이었고 비의 정체는 바로 방사성 분진이 응축된 폐기물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갈증을 참지 못한 이들은 입을 벌리고 검은 빗물을 받아먹었고 방사능 덩어리를 식도에 받아들인 이들의 말로는 죽음뿐이었다.
이는 매우 끔찍한 피해를 초래하였으며 수십만의 직접적 피해자와 백만 이상의 간접적 피해자가 발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이 핵폭격으로 미군의 일본 상륙 준비는 완료되었다.
올림픽-파스텔 작전
핵폭격의 여운이 조금은 가신 1945년 11월 1일 오전 6시,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340,000명 규모의 미군 병력이 규슈 남부 해안 지역에 일제히 상륙했다(올림픽 작전). 결호작전 제6호에 의하여 규슈지역의 방위는 제16방면군이 맡고 있었으나 전일까지도 진행된 전략폭격과 일전의 핵폭격으로 인하여 포를 쏠 수 있는 거의 모든 선박과 장비들이 파괴된 상황에서 16방면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인력을 갈아넣어서 미군의 출혈을 최대한 강요하는 것 뿐이었다.
장비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규슈 남부가 미야자키현을 제외한다면 산이 상당히 많은, 방어 측에 상당히 유리한 지형과 말 그대로 인명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돌격으로 인하여 16방면군은 상륙을 시도하는 미군에게 예상보다 많은 20,00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제57군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내륙으로 후퇴하였으며 직접적인 상륙 방어를 맡았던 제25, 212사단과 고사 제4사단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요코야마 이사미 당시 제16방면군 사령관은 살아남은 제57군의 패잔병들과 미군의 상륙대상에서 제외되어 병력을 보존한 제56, 40군 및 제57, 77, 206, 216사단을 모아 규슈 동남부에 상륙한 미군의 섬멸을 시도했으나 심각한 수준의 보급부족으로 인해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 제16방면군 전력의 대부분이 그나마 보급이 되던 대도시이자 핵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던 구마모토에 모여있었던 탓에 미군이 구마모토에 대규모 폭격을 실시하면서 병력 상당수가 와해되고 말았으며 잔존병력 대부분은 미군에 항복했다. 놀라운 점은 당시 규슈에 규슈에 주둔하던 16방면군의 공식적인 병력수가 1945년 기준 916,828명이었다는 점으로 이런 대군을 가지고도 자신들 병력의 3/1 정도 수준의 미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군의 병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한편 올림픽 작전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 작전의 일환으로 시코쿠에 또다른 상륙작전인 파스텔 작전이 시작되었다. 사실 말이 가만책이지 파스텔 작전 역시도 총 8만명 규모의 대규모 작전으로 당시 시코쿠에 주둔하던 제15방면군 소속 제55군의 총원이 다합쳐도 9만명 정도였기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장비를 앞세운 미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기만 작전이라는 설명과는 달리 시코쿠 전역을 점령하는 성과를 내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목표치보다 훨씬 큰 성과를 올린 올림픽 작전과 파스텔 작전의 결과로 미군과 연합군은 차후 도쿄 상륙에 있어서 더 안정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진격의 지연
본래 미국의 목표는 규슈 남부의 평야지대와 공항을 차지하여 이후 있을 코로넷 작전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지만 예상보다도 더 부실한 일본군의 전력 탓에 규슈와 시코쿠 전역을 점령하는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는 성과를 내게 되었던 미군이었으나 이는 곧 미군에게 족쇄로 작용하게 되었다.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일본군 몇십만을 포로로 잡게되어 수송해야 하는 식량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데다가 졸지에 통제해야 하는 영역도 예상치의 4~5배 이상으로 늘어버려 치안 유지에 들어갈 병력들이 크게 늘게 되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된 바와 마찬가지로 조직적으로 미군에 대항할 군사조직은 완전히 소멸하여 원 계획에서처럼 산맥을 방어선으로 일본군과 밀당을 할 필요는 없어졌으나 빈곤으로 들끓던 섬 두개를 통제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치안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문제들은 미국의 최종 필살기와도 같은 물량 공세를 통해 해결이 가능했지만 진짜 큰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방사능에 의한 피폭이었다. 원폭 투하 일주일 만에 있었던 폭심지로의 상륙작전 덕분에 미군 상당수는 방사능에 피폭되었고 주둔한지 1주일 가량의 시간이 지나자 피폭의 결과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방사선 피폭의 위험성을 훨씬 과소평가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미군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고 결과적으로 이는 공군 기지의 활용을 어렵게 만들어 코로넷 작전의 시작을 늦추는데에 일조하였다.
미군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홋카이도를 점령한 소련군은 도호쿠 일대로 빠르게 남하하기 시작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군은 몇달을 늦춰왔던 코로넷 작전의 시작을 결심하니 1946년 5월이었다.
코로넷 작전과 전쟁의 끝
소련의 도호쿠 점령이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 짐에 따라서 미군 사령부는 방사성 피폭의 영향으로 인해 사용이 어려워진 규슈의 공군 기지를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본래 기만 작전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점령한 시코쿠의 공군 기지를 사용하는 쪽으로 계획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어찌되었든 간에 준비를 마친 미군은 1946년 5월 1일에 720,000명의 병력과 약 3,000기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간토에 들이닥쳤다, 원 계획보다 2달이나 늦은 뒤였다. 치바 현 쿠쥬쿠리 해안과 가나가와 현 사가미 만을 주 상륙지로 하여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킨 미군은 예상보다 많은 일본군 병력에 생각보다 고전했으나 압도적인 제공권을 앞세운 미군의 공격에 말그대로 머릿수 말고는 가진 것이 없던 사실상의 예비군 집단이던 제1총군 제12방면군 산하 도쿄만 병단은 전멸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도쿄 함락을 막기위해 일본군이 근처에 있던 병력들 전체를 끌고오자 사상자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아무리 최첨단 무기와 공군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수십만 단위의 물량 공세에는 어느정도 고전 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제36군을 위시로한 일부 정예군 세력은 연합군에게 꽤나 큰 출혈을 유도하였다. 또한 일선에서는 일부 극단적인 장교들을 중심으로 생화학 무기와 민간인 자폭 돌격이 사용되자 미군은 경악하였다.
그러나 최소한의 인륜도 무시한 무자비한 군사작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병력이 비숙련병 혹은 칼 든 민간인 수준이었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점차 밀릴 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1946년 8월 6일에 미군이 도쿄에 진입하고 8월 9일 도쿄 공방전에서 도이하라 겐지 제12방면군 사령관이 미군에게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일본 열도 전역에서의 공식적인 전투 행위는 중단되었다. 이후 8월 15일 히로히토 덴노가 옥음방송으로 종전을 선언하면서 전쟁은 사실상 종료되게 되었다.
이로써 7년이라는 세월동안 8,000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핏자국들을 남긴채 그 끝을 맺었다.
타국과의 합동 작전
카보네이드 작전
휴가 작전
반도 진공 작전
결과
영향
- ↑ 열도 대공습의 시작 일자로 일각에서는 미군의 규슈 상륙이 시작된 동년 11월 1일을 시작 일자로 주장하기도 한다.
- ↑ 1946년 8월 15일 히로히토 덴노가 옥음 방송을 통하여 항복을 선언하면서 종료되었고 이후 9월 2일 공식적인 항복 협정이 조인되었다.
- ↑ 실제로 미국 정부는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했을 경우 히로시마, 고쿠라(현 기타큐슈), 요코하마, 니가타, 교토 중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시킬 예정이었으며 많은 역사학자들이 당시 일본의 상황을 고려 할 때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했을 경우 훨씬 적은 사상자로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낼 수도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 볼드체는 국가원수 및 정부수반이다.
- ↑ 인도,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국군 지휘 하 식민지 병력 포함.
- ↑ 일본 측은 묵살의 의미를 "무시"가 아닌 "보류"로 해석하였으나 연합국이 "무시"로 해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포츠담 선언 5조에 "... 우리는 어떤 지연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무시가 아닌 보류로 해석되었어도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 ↑ 산업시설 폭격으로 및 그로인한 식량, 물자 부족으로 인한 사망 등
- ↑ 좌측이 가고시마에 투하 된 리틀보이, 우측이 미야자키에 투하 된 팻 맨.
- ↑ 남사할린 또한 1943년 이후 내지로 편입되었으나 1943년부터 1846년까지 3년 남짓이었기에 포함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