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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3일 (월) 23:50 판
공산1968 | 리조니 | Arrondissments | 레스 어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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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대한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장면 張勉 | Chang My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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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9년 8월 28일 | ||||||||||||||||||||
한성부 서서 적선방 사온동계 사온동 (現 경성특별시 종로구 적선동) | |||||||||||||||||||||
사망 | 1971년 12월 30일 (향년 72세) | ||||||||||||||||||||
경성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36-5 | |||||||||||||||||||||
묘소 | 경성광역시 동작구 국립경성현충원 | ||||||||||||||||||||
재임기간 | 제27대 각료회의 의장 (총리) | ||||||||||||||||||||
1959년 6월 3일 ~ 1960년 3월 26일 | |||||||||||||||||||||
링크 |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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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못살겠다 갈아보자 제18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슬로건 |
대한공화국의 제27대 총리. 김규식을 잇는 중도우파의 리더였으며, 이른바 신파라고 불리는 민주당 내 자유주의 계파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비록 후일 좌익 정당으로 당적을 옮기긴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치에 끌어들이고, 가톨릭 포교도 한 사람으로 친분이 대단했다고 한다. 김대중이 한인사회당으로 당적을 옮기자 장면 전 총리는 상당히 섭섭해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면담을 하며 응원해주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우익 뿐 아니라 좌익에서도 높은 존경을 받으며, 해방 후 혼란기 동안 자유주의적 신념 하에서 국난을 극복하려 한 점이 부각되며 현대에 평가는 더욱 올라가고 있다.
생애
장면 총리 저격사건
1959년 10월 벌어진 적색 테러로, 현직 총리가 암살 위기에 처한 현재까지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이다.[2] 제2공화국의 좌우대립 및 혼란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대한공산당과 박헌영의 이미지가 심각하게 실추되며[3], 공산당은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현재까지도 당시의 당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평가
긍정적 평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
비록 그의 임기 도중 빛을 보지는 못했으나 대한공화국의 침체된 경제를 부흥시킨 획기적 정책이라 평가받는다.
온건한 자유주의적 성향
탈권위주의
부정적 평가
우유부단함
천안 괴뢰정부 부역 혐의
한편으로 한때 대통령에 나를 지지해줬던 사람들이 이제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을 지지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고 친일용공의 표수가 그렇게 많이 나왔다는 사실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민심의 소재를 측정하기가 곤란하다. 김창암 전 대통령 |
중립적 평가
친미 성향
대한 제2공화국의 대표적인 친미파 정치인으로, 대한공화국이 친미 자유진영 국가가 되는데 일정부분의 공을 세웠다. 특히 후임자 박정희가 반미적 권위주의 성향이 강했다는 점에서 그의 외교적 성향이 부각된다. 그러나 극우 및 극좌 진영에서는 그의 친미 정책이 미국에 대한 굴종 외교였다고 비판받으며, 보다 진지한 비판으로는 대한공화국의 중립주의적인 외교가 장면의 친미 정책으로 돌이킬 수 없게 손상되었다는 것이 있다.
어록
도대체 선생은 정치를 왜 그렇게 하시오? 장면 총리 저격사건 직후 대한공산당 당사를 찾아가서.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대한국민당 | 1933 - 1934 | 정계 입문 |
무소속 | 1934 - 1935 | 탈당 |
조선민주당 | 1935 - 1940 | 조만식을 따라 입당 |
무소속 | 1940 - 1945 | 2차대전 발발로 일시적 정계은퇴 |
조선민주당 | 1945 - 1953 | 당적 복원 |
1953 - 1972 | 신설 합당 정계 은퇴 작고 |
선거 이력
여담
- 생전 짜장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부정적인 별명이다.
- 김수환 추기경과 일화가 있다. 천안 괴뢰정부가 수립될 당시 장면은 정계를 잠시 떠나 김수환이 다니던 가톨릭 고등학교에서 교장을 맡았는데, 김수환이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서 제출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 때 장면은 김수환을 교장실로 호출했고 뺨을 후려쳤다. 만약 저 상황에서 장면이 저런 제스쳐를 안 했다면 김수환은 나중에 곤욕을 치렀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장이 애 뺨까지 때려가면서 훈육했으니 좀 넘어가주십사" 하는 일종의 쇼맨십. 어쨌거나 장면이 이렇게 나선 덕분에 별 탈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이후에 일본 유학 장학생을 선발할 때는 김수환을 1등으로 추천해서 보냈는데, 이렇게 보면 김대중을 발탁한 것도 그렇고 장면이 사람을 제대로 보는 안목이 있었다는 평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