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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개전 이전부터 일본은 이 계획을 비밀리에 수립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생뒤칼리슴 정권이 수립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일본 정부는 큰 성과과 필요했고, 그래서 채택된게 대한제국 공격이였다. 상륙지로 부산이 아닌 포항으로 정해진 이유는 너무 뻔한 곳이라 한국이 준비를 제대로 했을 것이라는게 제일 컸고, 역사적으로 부산에 상륙해서 최종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는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친걸로 보인다. | 제2차 벨트크리그 개전 이전부터 일본은 이 계획을 비밀리에 수립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생뒤칼리슴 정권이 수립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일본 정부는 큰 성과과 필요했고, 그래서 채택된게 대한제국 공격이였다. 상륙지로 부산이 아닌 포항으로 정해진 이유는 너무 뻔한 곳이라 한국이 준비를 제대로 했을 것이라는게 제일 컸고, 역사적으로 부산에 상륙해서 최종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는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친걸로 보인다. | ||
== 영향 == | == 영향 == | ||
사령부의 무조건적인 절대사수 명령과, 부족한 | 사령부의 무조건적인 절대사수 명령과, 부족한 지원들 때문에 권준은 끝내 포항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포항의 함락 이후, 한국군의 주력군이 배치되어있던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일대는 위험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속된 신성모의 오판은 끝내 경상남도의 한국군을 위기에 몰아넣게 되었고, 포항에서의 패배는 [[울산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포항에서의 패배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신성모의 말에도 불구하고, 울산에서까지 패배가 이어지며 한국군 주력이 통째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신성모는 해임. 퇴역한 안중근이 다시 임명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 ||
포항에서의 패배는 초기 한국군 주력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면서 수도인 한양까지 함락 당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2차 벨트크리그 동안 한국군의 가장 치명적인 패배 중 하나로 손꼽힌다. | 포항에서의 패배는 초기 한국군 주력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면서 수도인 한양까지 함락 당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2차 벨트크리그 동안 한국군의 가장 치명적인 패배 중 하나로 손꼽힌다. |
2023년 3월 20일 (월) 17:02 판
공지 | | 빌레펠트 연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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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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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상륙작전 Battle of Pohang / 浦項上陸作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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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아시아전선의 일부 | ||
날짜 | ||
1940년 6월 6일~1940년 7월 28일 | ||
장소 | ||
대한제국, 포항 해안 | ||
교전국 | 대한제국 | 일본인민공화국 |
지휘관 | 신성모[1] 권준[2] |
우메즈 요시지로[3] 이무라 조[4] |
병력 | 상륙 당시 약 24,000명 6월 24일 약 100,000명 7월 24일 약 250,000명 |
상륙 당시 약 40,000명 6월 24일 약 450,000명 7월 24일 약 1,200,000명 |
피해규모 | 총 사상자 약 25만명 | 총 사상자 약 30만명 |
결과 | ||
일본인민공화국의 상륙작전 성공 | ||
영향 | ||
일본의 한국 점령 작전 개시 |
개요
1940년 6월 6일, 우메즈 요시지로의 지휘 아래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기 위해 펼친 상륙작전. 제2차 벨트크리그에서 가장 중요한 상륙작전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 개전 직후의 대한제국군의 무능함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기도 하다.
과정
배경
제2차 벨트크리그 개전 이전부터 일본은 이 계획을 비밀리에 수립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생뒤칼리슴 정권이 수립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일본 정부는 큰 성과과 필요했고, 그래서 채택된게 대한제국 공격이였다. 상륙지로 부산이 아닌 포항으로 정해진 이유는 너무 뻔한 곳이라 한국이 준비를 제대로 했을 것이라는게 제일 컸고, 역사적으로 부산에 상륙해서 최종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는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친걸로 보인다.
영향
사령부의 무조건적인 절대사수 명령과, 부족한 지원들 때문에 권준은 끝내 포항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포항의 함락 이후, 한국군의 주력군이 배치되어있던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일대는 위험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속된 신성모의 오판은 끝내 경상남도의 한국군을 위기에 몰아넣게 되었고, 포항에서의 패배는 울산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포항에서의 패배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신성모의 말에도 불구하고, 울산에서까지 패배가 이어지며 한국군 주력이 통째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신성모는 해임. 퇴역한 안중근이 다시 임명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포항에서의 패배는 초기 한국군 주력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면서 수도인 한양까지 함락 당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2차 벨트크리그 동안 한국군의 가장 치명적인 패배 중 하나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