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상륙작전 (빌레펠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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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fff; color:#000; text-align:center" | '''일본인민공화국의 상륙작전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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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9일 (수) 23:05 판



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연표 사건
1936년
2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공화국 철수 |
7월
스페인 내전 |
12월
미합중국 내전
1937년
5월
제7차 대타협 · 헝가리 반란 |
11월
사막전쟁
1938년
7월
하산 호 전투
1939년
9월
독일 침공(제2차 벨트크리그 발발) · 독일 본토 항공전 |
10월
엘자스-로트링겐 전역 · 브뤼셀 전투 |
11월
헬리펙스 회담
1940년
1월
아일랜드 전역 |
3월
켈트 해 해전 |
5월
암스테르담 철수 작전 |
6월
포항 상륙작전 |
7월
아헨 전투
1941년
2월
라인 강 대공세 · 프랑크푸르트 공방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독러전쟁, 겨울전쟁 발발) |
7월
함부르크 공방전 |
9월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개성 전투 |
10월
베를린 공방전 |
11월
한니발 작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1942년
4월
백마고지 전투 |
7월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드레스덴 공방전 |
10월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1943년
1월
트리폴리 회담 |
2월
제3차 브레슬라우 전투 |
7월
포젠 전투 |
12월
낫질 작전(아르덴 대공세)
1944년
5월
제3차 부산 전투 |
6월
마르세유 상륙작전 · 바르바로사 작전 |
7월
사빈코프 암살 미수 사건 |
8월
키이우 봉기 |
9월
샤른호르스트 작전
1945년
1월
아우구스투스의 몰락 작전(드네프르-돈 공세) |
1월
슈비네뮌데 회담 |
2월
브리튼 전투(바다사자 작전 · 귀향 작전 · 리즈 폭격) |
4월
모스크바 공방전 · 러시아국의 항복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일본인민공화국의 항복 |
9월
제2차 벨트크리그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포항 상륙작전
Battle of Pohang / 浦項上陸作戦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시아전선의 일부
날짜
1940년 6월 6일~1940년 7월 28일
장소
대한제국, 포항 해안
교전국 대한제국 일본인민공화국
지휘관 신성모[1]
권준[2]
우메즈 요시지로[3]
이무라 조[4]
병력 상륙 당시 약 24,000명
6월 24일 약 100,000명
7월 24일 약 250,000명
상륙 당시 약 40,000명
6월 24일 약 450,000명
7월 24일 약 1,200,000명
피해규모 총 사상자 약 25만명 총 사상자 약 30만명
결과
일본인민공화국의 상륙작전 성공
영향
일본의 한국 점령 작전 개시

개요

1940년 6월 6일, 우메즈 요시지로의 지휘 아래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기 위해 펼친 상륙작전. 제2차 벨트크리그에서 가장 중요한 상륙작전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 개전 직후의 대한제국군의 무능함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기도 하다.

과정

배경

제2차 벨트크리그 개전 이전부터 일본은 이 계획을 비밀리에 수립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생뒤칼리슴 정권이 수립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일본 정부는 큰 성과과 필요했고, 그래서 채택된게 대한제국 공격이였다. 상륙지로 부산이 아닌 포항으로 정해진 이유는 너무 뻔한 곳이라 한국이 준비를 제대로 했을 것이라는게 제일 컸고, 역사적으로 부산에 상륙해서 최종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는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친걸로 보인다.

영향

사령부의 무조건적인 절대사수 명령과, 부족한 지원들 때문에 권준은 끝내 포항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포항의 함락 이후, 한국군의 주력군이 배치되어있던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일대는 위험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속된 신성모의 오판은 끝내 경상남도의 한국군을 위기에 몰아넣게 되었고, 포항에서의 패배는 울산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포항에서의 패배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신성모의 말에도 불구하고, 울산에서까지 패배가 이어지며 한국군 주력이 통째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신성모는 해임. 퇴역한 안중근이 다시 임명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포항에서의 패배는 초기 한국군 주력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면서 수도인 한양까지 함락 당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2차 벨트크리그 동안 한국군의 가장 치명적인 패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어록

국군은 황제폐하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오사카에서 먹고 저녁은 도쿄에서 먹을 수 있다.
신성모. 일본의 선전포고 직전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 울산전투 패배 이후 총 사령관 재임명 명령을 받고서. 이후 대한제국군의 슬로건이 됐다.
  1. 당시 한국군 총사령관
  2. 당시 포항 방위군 사령관
  3.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4. 당시 포항상륙작전 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