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 82번째 줄: | 82번째 줄: | ||
부다페스트에 입성하는 러시아군. | 부다페스트에 입성하는 러시아군. | ||
8월에 남부로 전출된 마르코프군은 우크라이나 방면군을 도와 9월 26일에 끝난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팍트군이 30만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포로를 65만 명이나 잡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 전투 또한 격전이었기 때문에 마르코프도 보급 및 재편을 위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도 38만의 손실을 입어서 상당 기간 동안 진격을 할 수 없었다. 독일의 동맹이 사실상 붕괴 국면에 접어들자 | 8월에 남부로 전출된 마르코프군은 우크라이나 방면군을 도와 9월 26일에 끝난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팍트군이 30만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포로를 65만 명이나 잡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 전투 또한 격전이었기 때문에 마르코프도 보급 및 재편을 위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도 38만의 손실을 입어서 상당 기간 동안 진격을 할 수 없었다. 독일의 동맹이 사실상 붕괴 국면에 접어들자 사빈코프는 다시 벨라루스 방면군의 베를린으로의 진격을 계속하기로 했다. 발트 방면군에서 제4 근위 기갑군(바실렙스키 대좌)까지 벨라루스 방면군으로 전출시켜 '목성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 ||
러시아군이 목표로 했던 베를린의 가치는 매우 컸다. 우선 독일의 수도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독일 수뇌부의 근거지인데다, 라이히스팍트의 중심지로써, 수 많은 병력과 보급물자들이 축적되어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베를린을 점령하면 독일과 라이히스팍트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크게 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 러시아군이 목표로 했던 베를린의 가치는 매우 컸다. 우선 독일의 수도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독일 수뇌부의 근거지인데다, 라이히스팍트의 중심지로써, 수 많은 병력과 보급물자들이 축적되어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베를린을 점령하면 독일과 라이히스팍트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크게 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 ||
2023년 4월 4일 (화) 20:57 판
| 공지 | | 빌레펠트 연재부 |
| 빌레펠트는 현재 노후문서재정비촉진사업을 진행중입니다. 현재 설정과 맞지 않는 문서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
[ 펼치기 · 접기 ]
| |||||||||||||||||||||||||||||||||||||||||||||||||||||||||||||||||||||||||||||||||||||||||||||||||||||||||||||||||||||||||||||||||||||||||
| 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
[ 펼치기 · 접기 ]
| ||||||||||||||||||||||||
| 베를린 공방전 Battle of Berlin Берли́н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Schlacht um Berlin | ||||||||||||||||||
|---|---|---|---|---|---|---|---|---|---|---|---|---|---|---|---|---|---|---|
| 날짜 | 1940년 10월 2일~1941년 1월 7일 | |||||||||||||||||
| 장소 | 베를린 근교[1] , 브란덴부르크 | |||||||||||||||||
| 결과 | 독일제국의 결정적 역전승 | |||||||||||||||||
| 영향 | 바그라티온 작전의 중단 및 실패 베를린의 대한 공략 저지 천왕성 작전이 준비 되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드레스덴 공방전이 시작됨 | |||||||||||||||||
| ||||||||||||||||||
| 자유와 삶을 위해 |
개요
1940년 10월 2일부터 1941년 1월 7일까지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 근교에서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이 100만 명의 달하는 희생을 치룬 끝에 극적인 승리를 맞이하면서 러시아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중단되었다.
이 시기의 러시아 국방군은 빌헬름 2세가 칩거 중이던 베를린 성에 최고로 근접해 베를린성을 쌍안경으로 관측도 할 수 있었는데, 베를린에서 불과 30km 남쪽에 떨어진 코닉스 부스테르하우젠까지 도달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독일이 혹독한 겨울과 치열한 시가전 속에서 러시아군을 패퇴시킨 이미지는 대부분 이 전투를 의미한다.
서론
베를린 공방전은 독러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손꼽힌다. 보리스 사빈코프는 베를린을 점령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보았으며, 베를린을 점령함으로써 라이히스팍트를 붕괴 시키고 전후 제3 인터내셔널과의 기여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것이라 예상하였다. 때문에 독일의 입장에서도 베를린은 절대적으로 사수해야만 하는 도시였다.
본래 바그라티온 작전대로라면 러시아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시작하고 최소한 40년대 중순에는 베를린에 근접해있어야했다. 그러나, 바그라티온 작전 초기 팍트군 수십만명을 섬멸하거나 포로로 잡는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팍트군의 끈질긴 저항은 러시아군의 피해를 서서히 누적 시키며 러시아군의 진격을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일단 러시아군은 베를린 120km 근방의 구데리안 라인까지 접근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으로 너무나도 길어진 보급로는 러시아군의 빈약한 보급체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 상황에서 시작된 갑작스러운 폭설은 러시아군의 공세 수행 능력을 심각하게 마비 시키고 있었다. 허나, 독일군은 이미 베를린에서의 결전을 예견하고서 베를린에 막대한 물자와 동계 장비들을 비축해둔 상태였다.
12월초, 러시아군의 정찰 부대가 베를린성에서 남쪽으로 30km까지 떨어진 곳으로 진출하여 쌍안경으로 관측할 수 있었으나, 이미 주력부대는 빈약한 보급과 추위로 인한 약화된 전력. 그리고 독일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하여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12월 5일, 독일군은 새로이 신설된 사단들과 국민척탄병, 국민돌격대들까지 총동원하여 베를린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했다. 독일군의 반격은 해를 지나 1941년 1월까지 이어졌으며 러시아군을 베를린에서 100km 거리까지 후퇴 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 전투를 통해 독일군은 개전 사상 처음으로 러시아군의 공세를 좌절 시켰지만, 100만명에 달하는 참혹한 인명 손실이 그 대가로 따랐다. 베를린 공방전은 러시아군이 1939년 개전이래 처음으로 대규모로 패퇴한 전투로 러시아군 역사상 전환점이 된다. 러시아군 장성의 상당수가 해임되었으며, 보리스 사빈코프가 러시아 국방군 총사령관직을 겸직하게 되는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배경
1939년 9월 3일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과 라이히스팍트를 침공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방면군으로 나뉘어 세 갈래로 진격했고 각각의 목표는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였던 쾨니히스베르크, 베를린, 부다페스트였다. 그중 주공은 단연 독일제국의 수도, 베를린을 공략하는 벨라루스 방면군이었고 그 선두에는 제2 근위 기갑군과 제3 근위 기갑군이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벨라루스 방면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개전 시작 9달 만에 독일 본토 바로 앞의 바르샤바에 도달했다. 발트방면군도 쾨니히스베르크를 포위하면서 목표를 이뤘지만, 우크라이나 방면군은 고전했다. 유능한 지휘관인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도와 러시아군을 저지 중이었고, 빈이 함락 됐음에도 불구, 러시아의 예상보다 남은 오스트리아군이 많고 강력했었으며 동맹군의 진격이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계획한 발트와 벨라루스 방면군의 목표도 어려운 축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우크라이나 방면군은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를 요구 받고 있었다. 발트 방면군의 도달 목표인 쾨니히스베르크는 제3 인터내셔널의 방해로 인한 독일 발트함대의 지원 불가, 빈약했던 발트 연합 공국의 전력,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독일 동방주의 반발로 인한 라이히스팍트 내부의 갈등으로 그럭저럭 진격할 수 있었고, 벨라루스 방면군의 도달 목표인 베를린은 벨라루스 친러 세력의 도움과, 벨라루스 내부 정치적 변동으로 제한 받고 있던 독일군의 빈약했던 병력 배치로 중부 집단군을 재빠르게 격파하고나서는 러시아 보다 우수한 독일 철도를 따라 그럭저럭 진격이 가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방면군은 일단 지도상의 거리에서 가장 먼 바이에른까지 가야했으며, 가는 길은 평탄한 우크라이나였지만 도로가 뚫려 있는 것도 아니었고, 벨라루스나 발트 3국과는 달리, 반러 세력이 많았고 체급도 큰편이었다. 이에 러시아군도 동부전선에서 우크라이나 방면군에 상당한 전력을 배치하였지만, 발트나 벨라루스 방면군의 상황과는 달랐다.
이때 사빈코프는 벨라루스 방면군의 진격을 일단 정지시키고 제2 근위 기갑군을 우크라이나 방면군을 원조하는 데 돌린다. 제2 근위 기갑군 사령관 마르코프는 이에 대해 매우 항의했으나, 사빈코프는 "독일의 동맹국을 붕괴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부다페스트 공략의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다.
8월에 남부로 전출된 마르코프군은 우크라이나 방면군을 도와 9월 26일에 끝난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팍트군이 30만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포로를 65만 명이나 잡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 전투 또한 격전이었기 때문에 마르코프도 보급 및 재편을 위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도 38만의 손실을 입어서 상당 기간 동안 진격을 할 수 없었다. 독일의 동맹이 사실상 붕괴 국면에 접어들자 사빈코프는 다시 벨라루스 방면군의 베를린으로의 진격을 계속하기로 했다. 발트 방면군에서 제4 근위 기갑군(바실렙스키 대좌)까지 벨라루스 방면군으로 전출시켜 '목성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러시아군이 목표로 했던 베를린의 가치는 매우 컸다. 우선 독일의 수도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독일 수뇌부의 근거지인데다, 라이히스팍트의 중심지로써, 수 많은 병력과 보급물자들이 축적되어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베를린을 점령하면 독일과 라이히스팍트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크게 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지상전이 시작되기 한참 전인 7월 말, 러시아군은 뱌체슬라프 트카초프의 주도로 베를린에 대한 대규모 공중 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파괴해서 독일의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였으나 의외로 튼튼한 독일의 대공 방어와 강력한 루프트바페로 인해 실패하였다. 결국 베를린에 대한 지상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러시아군의 진격
10월 13일까지 러시아군의 제2기갑군은 베를린에서 불과 120km 떨어진 구데리안 라인에 도달했다. 이곳에는 9만 명의 독일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러시아군은 방어선을 뚫으며 계속 전진하였으나 매우 열악한 보급 상황 탓에 진격이 늦춰져 2주가 지난 10월 26일에야 슈테틴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독일군과 국민돌격대의 맹렬한 저항에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10월 29일에 러시아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독일군의 반격
결과
기타
어록
| 서부전선의 병사들이여 동지들이여, 오늘 결정적이고 위대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된다. 보리스 사빈코프가 베를린 공방전을 앞두고 병사들에게 보낸 편지 |
| 허풍쟁이 슬라브 선동꾼들이 끊임없이 요란하게 알린 것처럼, 대슬라브주의 러시아의 군대는 정말 무적인가? 물론, 아니다! 역사는 무적의 군대란 없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빌헬름 2세, 라디오 연설에서 |
| 베를린 수비대여! 제군의 아내,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이 제군을 지켜보고 있다. 제군에게 그들의 인생, 운, 신변 그리고 미래가 달려있다. 제군이 제군의 임무를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제군이 그 임무를 매우 훌륭히 수행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실의 시간이 마침내 도래했다. (중략) 나는 내 선전부 직원들과 베를린에 남을 것을 확언한다. 나의 아내와 아이들도 베를린에 있고 그들은 베를린에 남을 것이다. 카이저 폐하와 총리 또한 그럴 것이고, 우리 정부는 제국 수도에 대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실시할 것이다. 나의 행동과 생각은 전적으로 국민들의 삶과 우리의 공통 적에 대한 방어를 위한 것이다. 우리 수도의 방어벽에 몽골의 폭풍은 반드시 부서질 것이다. 수도에서의 우리의 싸움은 국가의 향방을 결정짓는 결정적 전투가 될 것이다. 열성적인 수비대는 슬라브 놈들의 손에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지 않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전투와 과업앞에 굳건히 서있다. 우리의 목표는 국민의 자유와 다가오는 행복한 미래를 위한 제국의 사회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괴벨스 선전부 장관, 상황이 급박했음을 증명해주듯 간간히 포성이 들린다. |
| 자유는 독일과 함께 서거나 함께 쓰러진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한스 포겔 전시 총리. 러시아군이 베를린 시내 코앞까지 왔다는 보고를 듣고서. |
- ↑ 베를린 시내에서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