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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5일 (토) 00:21 판
책임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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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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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 朴憲永 | Pak Hon-y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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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5월 28일 | ||||||||||||||||||||||||||||
충청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 (現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청신로 379) | |||||||||||||||||||||||||||||
사망 | 1995년 5월 19일 (향년 94세) | ||||||||||||||||||||||||||||
알바니아 티라나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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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 소비에트 연방, 알바니아의 반수정주의 공산주의 계열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 조공 반란사태의 전범.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후로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 유명했으나 정부 수립이후에는 소련과 일공을 등에 업고 함경도 일대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대한민국 정부의 전복을 시도한 전범이다. 봉기 실패이후 소련으로 망명하여 망명 조선공산당을 이끌었으나 베리야 집권이후 문화 대혁명 노선에 반발하여 당에서 쫒겨났고 이후 엔베르 호자 치하의 알바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자신을 따라 온 몇멏 추종자들과 함께 재건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다. 호자 사망이후 알바니아가 민주화되고 소련이 재편되자 건강히 급격히 악화되어 1995년 알바니아 티라나에서 사망하였다.
생애
광복 이전
1900년 5월 28일 충청남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박현주(朴鉉柱)와 어머니 이학규(李學圭) 사이의 서자로 태어났다. 대흥공립보통학교 졸업후 우수한 성적을 바탕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YMCA 활동도 하였다. 1919년 2월 경성고보를 졸업하고 3.1운동을 경험하며 화요파에서 활동하다가 상하이에 가게 된다.
상하이에서 활동을 하던 와중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22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민족 대회에 참가한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려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뤘다. 석방 이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취직하였으며 화요파 조선공산당 창당에 관여하였다. 기자로 재직하던 와중 주세죽과 결혼식을 올렸으나 이듬해에 일제에 의해 기자직에서 해임되고 만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당시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었고 신의주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재판와중 재판정에 달려든 이후 심각한 수준의 폭행을 당하여 인분을 섭취하는 등의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보석으로 1927년 11월 22일에 석방되었으며 1928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아내와 함께 탈출해 버렸다. 1928년에는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국제레닌대학에 입학하였으며 29년에는 졸업과 동시에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1년 상해로 돌아가 "코뮤니티"라는 잡지를 국내로 반입시겼으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이후 강화된 일제의 단속에 의해 검거되어 1934년 국내로 압송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고 1939년 형기를 1년 남기고 가석방되었다. 1939년 12월 12일에 경성콤그룹에 영입되어 기관지 집필을 맡았으며 1941년 경성콤그룹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자 전라남도 광주로 도피하여 태평양 전쟁 기관동안 노동자로 위장하여 은거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중소연합군이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고 미군이 제주도로 상륙하여 한반도가 해방되자 경성으로 상경하여 경성콤그룹 출신들과 함께 조공 재건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10월 16일 조선공산당의 총비서로 추대되었다. 이후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건준과 각지의 인민위원회가 자체정부 수립이 아닌 삼국연합군정에 대한 협조와 좌우합작 과도정부 수립으로 노선을 정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인물들 및 일부 지역 인민위원회와 함께 건준에서 이탈하였다.
이후 우익세력들이 임시정부와 김구, 이승만을 중심으로 결집하자 위기감을 느꼈는지 민족주의 좌파성향의 조선신민당, 중도좌익 성향의 최대 정치조직이던 조선인민당과 민족주의민주전선(민전)을 조직하여 단일대오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좌우합작에 우호적이던 인민당과는 달리 박헌영은 우익세력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우며 사실상 합작을 반대하고 있었고 연합군정의 지지를 받던 여운형이 우익과의 합작을 위해 온건방침을 정하자 박헌영은 이에 반발하여 결국 민전은 해체되고 만다.
이후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원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건국 초반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