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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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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1부총리로 취임한 직후인 2008년 9월 15일, 미국의 4대 투자은행이었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며 본격적인 대침체의 막이 올라가게 된다. 이 시기의 조선은 [[게오르기 리 (트롤리버스)|게오르기 리]] 시절부터 이어져 온 사실상의 의원내각제 시스템이 마비된 시기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로만 리 (트롤리버스)|로만 리]] 대통령은 적극적인 내각 개입을 통해 조선에 닥쳐 온 경제 위기를 타파하려 했다. 이 시기 드미트리 한 총리는 미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교섭을 주로 담당했으며 안톤 킴 제1부총리는 내치를 주로 담당했다.
그가 제1부총리로 취임한 직후인 2008년 9월 15일, 미국의 4대 투자은행이었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며 본격적인 대침체의 막이 올라가게 된다. 이 시기 드미트리 한 총리는 미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교섭을 주로 담당했으며 안톤 킴 제1부총리는 내치를 주로 담당했다.


=== 조선 총리 ===
=== 조선 총리 ===

2023년 4월 27일 (목) 05: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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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화국 제6대 대통령
안톤 블라디슬라보비치 킴
Антон Владиславович Ким
Anton Vladislavovich Kim
조선어 이름 김종인(金鍾仁)
출생 1940년 7월 11일(1940-07-11) (84세)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現 서울시 남서구 신림동)
사저 서울시 중구 구기동
관저 서울시 남서구 석조대로 1 (여의도동)[1]
재임기간 제6대 대통령
2019년 10월 30일 ~ 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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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울산 김씨
부모 아버지 김재열, 어머니 이필기
형제자매 누나 김종은, 김종현
배우자 올가 킴
자녀 슬하 1녀
학력 서울덕수초등학교 (졸업)
한양중학교 (졸업)
장충고등학교 (전학)
중앙고등학교 (졸업)
국립국제관계대학교 (독일어 / 학사)
라이프치히 대학교 (경제학 / 학사)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박사)
병역 소련 육군 병장 전역
종교 러시아 정교회
신체 174cm
소속 정당 무소속
의원 선수 8
의원 대수 1, 2, 3, 4, 5, 6, 7, 8
약력

개요


제6대 조선 대통령 취임 선서

조선의 제6대 대통령.

생애

정계 입문 이전

1940년 7월 11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일치시기 시절 이인, 허헌과 함께 여러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일제로부터 변호해 후일 소련으로부터 레닌 훈장을 수훈받는 유명 항일변호사 김병로이며 아버지인 김재열은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법조인이었다.

서울덕수초등학교, 한양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1959년 국립국제관계대학교의 독일어과에 진학, 1964년에 졸업한다. 졸업 이후엔 동독의 라이프치히 대학교[2]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1969년에 경제학 석사 학위를 수여받고 1972년엔 경제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는다. 당시 세부 전공 분야는 재정학이었다고.

젊은 시절의 안톤 킴

이후 1972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32세의 나이에 국립서강대학교의 경제학과 조교수가 됐다. 그가 조교수로 있던 시기에 폴리나 박 조선공화국 공산당 원내총무가 학부생 시절 그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이끄는 국립서강대학교 출신의 관료집단인 '서강학파'에 속하나 그는 소련 중앙정부에서 근무한 안드레이 남으로 대표되는 선성장 후분배, 올리가르히 육성을 중심으로 한 압축 성장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제2세대 서강학파로 평가받는다.

1974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 입당 이후에 소련 중앙정부, 그 중에서 보건부로 넘어가 본격적인 정부 관료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후 1991년엔 소련 보건상으로 임명되었으나 임명 직후 8월 쿠데타가 발발하였으며 당시 고르바초프가 주도한 경제 개혁안인 페레스트로이카와 정치·사회 개혁안인 글라스노스트 중에서 페레스트로이카만을 지지한 안톤 킴은 쿠데타 안정화 직후 결국 보건상에서 해임된다. 해임 직후 안톤 킴은 서울로 돌아왔으며 그가 서울로 돌아온 지 약 2개월이 지난 1991년 12월 11일, 조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서의 탈퇴를 선언한다.

조선의 소련 탈퇴 이후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으로 당명을 바꾸는 등의 개혁을 실시하며 추후 실시될 초대 총선의 승리를 위한 밑작업에 들어갔으며 이 시기에 안톤 킴은 다비트 로 대통령으로부터 서울시 제26구로의 출마를 제안받았다. 이러한 제안에 안톤 킴이 수락하면서 안톤 킴은 본격적으로 조선 정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조선인민당의 총선 승리 이후 출범한 예브게니 박 내각에서 안톤 킴은 보건부장관에 취임한다.

정계 입문

보건부장관

보건부장관 임명 직후의 안톤 킴

그가 보건부장관으로 재임하던 시기 그가 행한 가장 큰 업적은 단연코 의료제도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은 소련에서 탈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식 국가 주도 무상 의료제도를 고수하고 있었는데 이는 의료비를 전 국가에서 부담하는 제도였기에 연방 탈퇴 직후 국고가 거덜난 당시 조선의 재정 상황에는 맞지 않는 제도였다. 거기다 의료비가 무료인 만큼 접근성은 높았지만 질은 이에 반비례해 당시 조선의 영아 사망률자가 무려 45,000명에 육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의 러시아보다 약 3배 더 높은 수치[3]였으며 이러한 수치에 견줄 수 있는 나라는 카자흐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 뿐이었다.

이에 안톤 킴은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무상 의료제도를 폐지, 유상 의료제도로 전환했으며 여기에 정부에서 병원비를 일정 부분 지원해 갑작스런 유상화에 느껴질 부담을 덜었다. 여기에 조선 전역에 설치되어 있던 세나토리움[4]을 대부분 민영화, 리조트로 전환했으며 이를 통해 기존의 세나토리움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하였다. 이렇게 해 남은 의료 예산은 경제 안정화에 투입되어 조선의 경제 안정화에 일정 부분 기여한다.

이렇게 그는 보건부장관으로서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마치고 제2대 조선 국가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이후 바실리 박 내각의 초대 경제부장관으로 등용된다.

경제부장관

그가 경제부장관으로 재임하던 당시인 1995년의 조선은 소련 해체 이후 시행된 국영 공장, 농장들의 헐값 판매로 인해 수많은 올리가르히들이 양산되었고 부동산 가격은 기록적인 폭등을 기록하는 등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안톤 킴은 이러한 부동산 가격 폭등의 원인을 올리가르히와 기업의 무분별한 부동산 투기로 보았다. 이에 경제부장관 취임 직후 안톤 킴은 공급량 조절을 위하여 주요 올리가르히들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 매각시키는 '5.8 조치'를 단행하여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켰다. 이는 당시 소련 가맹국의 올리가르히 잡기 중에서도 가장 강도 높은 올리가르히 규제로 손꼽힌다. 이를 통해 안톤 킴은 경제 구조 조정과 체질 개선을 주도했으며 국가의 적절한 시장 개입을 통해 올리가르히와 대기업의 폭주를 견제하는 등의 경제적 성과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더해 안톤 킴은 본인이 국립서강대학교 조교수 시절 당시부터 주장해 온 경제민주화를 이 시기에 조선에 본격적으로 도입시킨다. 금산분리 정책을 도입하고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실시해 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저지했으며 노동자들의 경영권 참여를 의무화해 노동자들의 기업 내 입지를 확대시켰다. 이러한 경제민주화 정책은 올리가르히들의 문어발식 확장으로부터 영세업자와 중소기업을 보호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한편으론 조선의 경제 성장을 위축시켜 조선의 경제 정상화까지의 기간을 연장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다만 이렇게 강력한 올리가르히 견제 정책을 시행한 안톤 킴은 당시 주요 공직자들과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주는 등의 정격유착으로 정권을 지탱하던 올리가르히들에겐 상당히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결국 올리가르히의 강력한 압박을 받은 신임 라파일 리 내각은 개각 과정에서 안톤 킴을 경질시킨다. 경질 이후 안톤 킴은 일반 국가회의 대의원 의원과 국립서울대학교 석좌교수를 병행하며 약 8년 간의 은둔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올리가르히 견제 정책과 부동간 가격 안정화 정책은 당시 조선 국민들에게 그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도록 했으며 이러한 그의 커리어는 후일 그가 조선 총리는 물론 조선의 대통령 자리에 까지 오르는 데에 기여한다.

2007년 10월 30일 안톤 킴은 드미트리 한 내각의 제1부총리 직 제안을 수용하며 드미트리 한 내각 초대 제1부총리로 취임한다.

제1부총리

그가 제1부총리로 취임한 직후인 2008년 9월 15일, 미국의 4대 투자은행이었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며 본격적인 대침체의 막이 올라가게 된다. 이 시기 드미트리 한 총리는 미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교섭을 주로 담당했으며 안톤 킴 제1부총리는 내치를 주로 담당했다.

조선 총리

총리로 선출된 안톤 킴

2017년 1월 5일 표트르 한의 후임으로 선출된 스테판 리 총리가 족벌정치와 낙하산 인사 논란으로 결국 300일 만에 백기를 들고 총리 직에서 사퇴한다. 그러나 표트르 한 전 총리도 다시 총리로 선출될 만큼의 지지도를 얻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던지라 내부에 마땅한 총리감이 없던 새하얀 산은 결국 안톤 킴을 조선 제10대 총리로 선출한다. 선출 당시 안톤 킴의 본인이 77세라는 고령의 나이라는 점을 들어 총리직을 거절했으나 새하얀 산의 지속적인 부탁으로 인해[5] 마지못해 총리로 취임한다.

조선 대통령

2019년 8월 23일에 실시된 2019년 조선 대통령 선거에서 새하얀 산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다.[6]

2021년

2022년

2023년

성향

비판 및 논란

"국민은 돈 맛 들이면 안 떨어져 나가" 발언

미혼모 관련 발언 논란

"총리는 연기를 좀 해달라" 발언

허수아비 대통령이 아니라 총리와 협치하는 호민관 노릇을 할 테니 총리도 태도를 바꿔 내가 해준 대로만 연기(演技)를 좀 해달라.
내각회의 당시 막심 킴 총리에게

여담

어록

일관성이 밥 먹여주나. 정체성, 정체성 하는데, 막상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도 없다.
'소련의 정체성'을 언급하며 페레스트로이카를 반대하는 관료들에게
덩치가 크다고 해서 싸움에 이기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제6대 대통령 취임사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1 초대 조선 국가회의 대의원 선거 서울시 제26구
조선인민당 흰색 로고타입.svg
XX,XXX (XX.X%) 당선 (1위) 초선
1995 제2대 조선 국가회의 대의원 선거
새하얀 산 흰색 로고타입.svg
XX,XXX (XX.X%) 재선
1999 제3대 조선 국가회의 대의원 선거 XX,XXX (XX.X%) 3선
2003 제4대 조선 국가회의 대의원 선거 XX,XXX (XX.X%) 4선
2007 제5대 조선 국가회의 대의원 선거 XX,XXX (XX.X%) 5선
2011 제6대 조선 국가회의 대의원 선거 XX,XXX (XX.X%) 6선
2015 제7대 조선 국가회의 대의원 선거 XX,XXX (XX.X%) 7선
2019 제8대 조선 국가회의 대의원 선거 XX,XXX (XX.X%) 8선[7]
2019 2019년 조선 대통령 선거 조선 무소속 36,700,743 (74.56%) 초선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소련 공산당
()
1974 - 1991 정계 입문
조선인민당 흰색 로고타입.svg
1991 - 1993 당명 변경
새하얀 산 흰색 로고타입.svg
1993 - 2019 당명 변경
무소속 2019 - 현재 탈당

저서

  • 페레스트로이카를 이끈 조선인 - 동화출판사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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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산 흰색 아이콘.svg 새하얀 산 흰색 로고타입.svg 의 계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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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대중주의 자유보수주의 가부장적 보수주의
일반관료
막심 킴
경제관료
안톤 킴*
나탈리야 누오리바
올리가르히
일리야 정
다닐 킴
실로비키
김긴배
*: 무소속지만 사실상 이 계파에 소속됐다.
정당별 계파 (공산 · 자민)

  1. 여의도 문서 참고.
  2. 당시엔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Karl-Marx-Universität)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3. 1990년 당시 러시아의 영아 사망자 수는 약 18,000~19,000명대를 기록했다.
  4. 구 소련 가맹국 일대에 설치되었던 단기 복합 요양 의료 시설. 소련 정부는 노동자들의 피로 해소를 위해 세라토리움을 전국에 설치, 노동자들의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
  5. 당시 의장이었던 표트르 한이 직접 찾아가 도게자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6. 물론 형식상으로만 무소속이었지 새하얀 산의 지지를 받는 사실상의 새하얀 산 소속 후보였다.
  7. 2019.8.23. 제6대 대통령 당선 및 취임에 따라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