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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4일 (일) 13:55 판
대한민국 국무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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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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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0-13대 국무총리 박정희 朴正熙 | Park Chung-he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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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7년 11월 14일 | |||||||||||||||||||||||||||||||||||||||||||||||||||||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現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 | ||||||||||||||||||||||||||||||||||||||||||||||||||||||
사망 | 2010년 5월 16일 (향년 91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국무총리묘소 | |||||||||||||||||||||||||||||||||||||||||||||||||||||
사저 | 경상북도 구미시 형곡2동 373-5 | |||||||||||||||||||||||||||||||||||||||||||||||||||||
재임기간 | 제10대 국무총리 | |||||||||||||||||||||||||||||||||||||||||||||||||||||
1968년 8월 16일 ~ 1971년 1월 3일 | ||||||||||||||||||||||||||||||||||||||||||||||||||||||
제9대 국무총리 | ||||||||||||||||||||||||||||||||||||||||||||||||||||||
1971년 1월 4일 ~ 1973년 9월 29일 | ||||||||||||||||||||||||||||||||||||||||||||||||||||||
제10대 국무총리 | ||||||||||||||||||||||||||||||||||||||||||||||||||||||
1973년 9월 30일 ~ 1977년 1월 24일 | ||||||||||||||||||||||||||||||||||||||||||||||||||||||
제11대 국무총리 | ||||||||||||||||||||||||||||||||||||||||||||||||||||||
1977년 1월 25일 ~ 1979년 10월 26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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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제10대 국방부 장관과 제10·11·12·13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역대 총리중 두번째 20세기 출생 총리이자 두번째로 젊은 총리[4] 그리고 역대 최장 기간 집권한 국무총리 기록을 보유한 인물이다.
1961년 김원봉 당시 국방부 장관에 의해 사회당에 영입되었으며 이후 김원봉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좌우합작 장면 내각에서 국방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1966년 제7대 민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장준하 총리에 의해 1964년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1968년에 세대교체를 주장하며 사회당의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1968년 아시아 혁명 당시 기성 정치권을 거침없이 공격하는 모습을 통해 인기를 끌며 한독당을 제치고 사회당의 지지율을 높이는데에 일조하였고 이후 총선에서 사회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서 제10대 국무총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집권기 내내 한국의 중공업 성장을 견인하였으나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위기로 인해 물러났으며 사회당의 명예총재(1991년 사임), 최고상임고문, 국가원로자문회의 부의장[5]을 역임하다. 2010년 9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집권이후 이룩한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으로 대표되는 중화학공업 발전 및 경제개발의 성과와 신 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을 통한 농촌진흥정책과 평안북도 서해안의 석유시추 성과 등으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이지만 집권기간중 보인 권위주의, 독선적 행보와 강경한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대소·대일공관계를 크게 악화시킨 점, 당내 정적 탄압등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생애
초년시절
1917년 11월 14일 일제강점기 시절 경상북도 구미에서 농민 박성빈과 백남의 부부 사이에서 4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가난했던 집 사정으로 인해 어머니 백남의가 간장을 마신다던가 하는 식으로 낙태를 유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박정희는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태아일 때의 이런 고생 때문인지 박정희는 아버지나 형제들에 비해 작은 키를 가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집안에서는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형인 박성희와 함께 그를 학교로 보내 근대식 교육을 받게하였으며 이에 박정희는 1932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기도 했다. 본래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사범학교 응시를 포기하려 했으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부모를 설득해 응시하게 되었다. 어머니인 백남의는 그가 낙방하기를 바랬으나 정원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했고,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기숙사에서 등하교 하였고 품행평가에서 그리 좋지못한 평가를 받았으나 군사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좋았다고 한다. 1937년 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동년 4월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훈도로 부임하던 와중 아픈 아버지의 간청으로 1936년 19세의 나이로 김호남과 결혼을 했고, 이듬해에 딸 박재옥이 태어났다. 그러나 사랑없는 정략결혼 이었던 관계로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청년기·군인시절
그렇게 교사로 제직하던 와중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군인에 대한 동경과 한국인 교사 차별문제, 가정불화 등을 이유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1938년 21세의 나이로 신징육군군관학교 1기에 1차로 지원했다. 처음에는 나이 제한으로[6] 인해 거절당했으나 이후 혈서를 써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7] 이 혈서를 본 고향선배이자 시험관이던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가 그의 후원자가 되주어 결국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에, 합격자 240명 중 15등으로 입학하였다.
이후 1942년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수석 졸업생 자격으로 "대동아 공영권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며, 만주국 수령 짱스이에게 은사품으로 금장시계를 받고 일본육사 유학생대 편입 특전을 받았다. 졸업 이후에는 당시 관행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2년)에 진학해 졸업하였다. 1944년에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해 견습군관으로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되었으며 동년 7월에는 제6군관구 보병 제8단 배장(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부대의 엘리트였던 박정희는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을종 부관(작전참모) 겸 부대의 기수(旗手)가 되었다. 이후 1945년 7월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질 무렵 중위로 진급하였으며 8월에는 소련군이 남하한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17일 둬룬으로 집결하였으나 도미나가 교지 사단장이 "이렇게 싸우다 죽는건 개죽음"이라고 말하며 사단을 이끌고 중국군에 항복하는 바람에 박정희 역시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중국군의 포로가 된 박정희는 당시 장교출신을 찾고있던 한국광복군에 동료였던 신현준, 이주일과 함께 편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다. 이후 광복군이 중국군 및 소련군과 함께 국내로 들어오자 광복군 제1대대 제2중대장 자격으로 서울에 입성하였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 주둔하던 미군은 광복군과 임정, 각지 인민위원회의 해체를 요구하였으나 중국군과 소련군은 이를 거부했고 사회주의자였던 형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이때부터 박정희는 사회주의와 중국·소련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3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2기로 졸업하였고 과도정부가 수립되어 각지의 무장세력들을 통합하여 조선국방경비대가 설립되자 임관하여 포병 소위계급을 부여 받았다. 당시 박정희는 형인 박상희의 설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는데 이로 인해 당시 과도정부와 군정당국의 견재를 받았다고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조선공산당 당적을 유지하며 장교 생활을 이어나가던 박정희였으나 공산당 당수였던 박헌영이 반체제적 발언을 이어가자 당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며 1948년 12월 3일 헌법재판소에서 조선공산당에 대한 강제해산이 결정되자 당일부로 조공 당원증을 불태워 버렸고 동년 2월에 공산당 잔당이 청진시 일대에서 봉기하자 형인 박상희를 설득하여 봉기참여를 막았다.
조공 반란사태 당시 박정희는 장교직을 잃고 연금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원증을 불태워버리고 정부에 충성맹세를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나진 진공작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형을 설득하여 봉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덕에 박정희는 여운형 총리로부터 훈장까지 받았고 육영수와 재혼도 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정계 입문과 국방부 장관
1960년 육군 대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박정희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자 사회당 소속 민의원 의원 김원봉에 의해 형인 박상희와 함께 사회당에 영입되었다. 곧 그는 군복을 벗고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62년 국방부 장관으로 선출 될 때 까지 재임하였다.
1962년 2대 악법 반대 운동과 당내 야권의 총공세로 인해 장면 총리가 사임하고 장준하가 총리에 취임하자 박정희의 후원자이던 김원봉은 내무부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되었고[8] 김원봉의 비호 아래 박정희는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국방부 장관 재임 당시 박정희는 주로 포병 전력의 강화에 집중하였으며 끊임없이 내각에 군비 확충을 요구하였다. 당시 장준하 총리는 개인적으로 박정희와 그의 후견자인 김원봉을 못마땅해 했으나 박정희의 국방정책 만큼은 마음에 들어하였고 그덕에 박정희는 국방부 장관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김원봉이 건강 문제로 민의원 의원직을 사퇴하고 장준하에 이어 윤보선이 총리로 취임하면서 그의 앞날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윤보선 총리는 일반 의원시절 박정희 장관의 군비확충에 반대하며 제동을 걸었던 인물이었고 귀족적인 성격인 윤보선과 토속적인 성격인 박정희의 성격차가 겹치며 둘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윤합작에 따라 장준하가 총리직을 사임 할 시기가 다가오자 윤보선은 임시 내각 인선을 발표하였고 박정희는 내각에서 방출되게 되었다.
이후 6대 민의원이 임기 만료로 인해 해산되자 박정희는 사회당의 공천을 받아 전국구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금뱃지를 달게 되었다. 이후 의원 임기를 이어나가던 와중 1966년 사회당 총재이던 홍명희가 딸의 간통 논란으로 인해 사임하자 사회당 총재 선거에 뛰어들었다. 박정희는 젊고 신선한 청년 정치인을 표방하며 사회당 주류파[9]의 거두이던 장건상을 따돌리고 사회당 총재에 당선되었다.
한편 1968년, 아시아 혁명의 여파로 한국에서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 운동이 거세지고 있었고 윤보선 총리로 대표되는 사회 기득권 층에 대한 반발 여론이 거세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유진산 부총리 겸 내무부 장관이 학생 시위대를 가리켜 "빨갱이"로 지칭한 일명 진산 파동이 일어나 한독당의 지지율이 급락했고 이때 박정희 총재가 연정 파기를 선언함과 동시에 윤보선 내각을 두고 "구태 내각", "수구 내각" 등으로 비판하며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윤보선 총리가 민의원을 해산하고(빨갱이 해산) 제8대 민의원 의원 선거 정국에서 박정희 총재는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선거운동으로 사회당을 대승으로 이끌었고 본인 또한 경상북도 군위·선산 선거구에서 당선되며 선거의 승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최장기간 재임총리
1968년 박정희는 역대 두 번째로 젊은 총리이자 가장 젊은 사회당 출신 총리로 선출되었다. 김종필, 정일권을 필두로 한 군부 출신들과 강성산 등의 경제학자 출신들을 주류로 하여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내각의 목표로 반공노선의 강화와 한독당 내각의 경제개발 정책 계승, 중공업화 정책등을 표방하였다. 중국으로부터 받은 원조·차관과 서방과의 기술협력을 바탕으로 경부/경인고속도로 등의 도로 건설이나 공장, 댐, 발전소 등의 기반 시설 등으로 대표되는 국가 주도의 대규모 시설건설을 실시하였으며 새마을 운동을 통한 농촌 진흥 계획을 실행하였다.
또한 포항제철소 건설과 청진제철소 복구를 대표로 한 중화학 공업부흥 정책과 시멘트 공장, 비료공장의 꾸준한 건설을 통한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통해 수입을 줄이고 총 수출액과 국민소득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이런 정책에 사회당과 박정희 총리의 지지율은 급 상승했으며 이에 박정희 총리는 지지율이 73.6%에 달하던 1970년 11월에 민의원을 해산하였고 이후 치뤄진 총선에서 272석을 얻는 압승을 거두면서 11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제2차 박정희 내각 당시 박정희 총리는 중공업 등에 대한 집중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당시의 수출액은 1964년에 비해 10배 가량 증가하여 10억달러를 넘어섰으며 베이비붐 세대의 사회 진출로 인한 노동력 특수를 통해 제철산업, 조선업, 자동차 제조업 등 노동 집약형, 조립가공형 중화학 공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1차 오일 쇼크와 외채상환 압박, 부실기업 문제로 성장률이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박정희 총리는 1972년 8.3 사채 동결 조치를 통한 기업사채 분할상환 유도와 10월 유신[10] 선언을 통한 국민결집, 그리고 과다투자를 통해 이를 무마하려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위에서 보이듯 중공업의 발달이 가속화 되었으나 재벌 독주와 중소기업의 쇠퇴, 은행·금융 부실과 기형적인 경제구조라는 악영향을 불러왔고 이는 결국 1997년 경제위기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다.
상당히 떨어진 지지율과 당 내외의 요구에 박정희 총리는 민의원을 해산하여 정면 돌파를 시도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정희 총리의 실각을 예견했으나 진산파동으로 인해 한독당에 공천잡음이 생기면서 사회당은 201석을 확보하여 민의원 내 다수당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박정희 총리는 경제성장세를 유지하고 지지율을 반등시키기 위해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을 6대 전략 업종에 선정해 이들 분야에 10년간 90억 달러를 투자해, 1981년까지 중공업 비중을 전체 공업 비중에서 51%까지 늘리고 1인당 GDP 1000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발표하였다.
당시 오일 쇼크로 인한 유가상승과 8배 가량의 물가 상승으로 인한 무역 적자로 인해 부도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대출을 통해 이를 막았고 연간 수출 증가율의 40% 경신과 동시에 노동집약 건설업을 아랍과 사우디에 많은 노동인력을 건설투자에 투입함으로써 다량의 외화를 벌어옴으로써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의외의 수출 신장과 국내풍작으로 인한 경기호황과 경제성장률의 상승으로 사회당과 박정희 총리의 지지율은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런 호황에 기회를 잡은 박정희 총리는 다시 한번 민의원 해산을 단행하였다.
217석을 차지하며 직전 총선에 비해 안정적인 과반을 확보한 사회당은 박정희를 다시 한번 총리로 선출하였으며 제4차 박정희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4차 박정희 내각 당시인 1976년 대한민국은 세계 19위의 무역국에 올라섰으며 1977년에는 국민소득 1,000 달러와 수출총액 100만 달러를 달성하며 경기 호황을 맞이했고 연간 20%에 달하는 제조업 성장세를 과시하며 대한민국을 개도국에서 중진국의 반열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인하여 석유 가격이 급등하는 제2차 오일 쇼크가 일어나며 박정희 내각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이미 10년 간의 장기 집권으로 당 내외의 피로감이 크게 증가한 상태에서 민생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힌 오일 쇼크는 박정희의 정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를 초래하였다. 결국 야권의 총공세와 여당내 반대파의 정권 흔들기를 직면한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총리 직을 사임하였다.
졍계 은퇴와 말년
박정희 총리의 사임 이후 당시 여당이던 사회당은 김종필 부총리를 후임 총리로 선출하였고 본래 박정희 총리의 임기 만료일이던 1981년 1월 24일까지 김종필을 총리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사임 이후 박정희는 정치활동을 지속해 나갔으나 그의 사임 이후 영향력이 약해진 민주공화회는 이후 총재선거에서 김철 혁신정우회 회장에게 총재직을 내주었고 박정희 또한 정계에서 조용히 활동을 이어나갈 뿐 별다른 눈에띄는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김철 총리 이후 13대 민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한독당이 승리를 거두고 김대중이 총리 직을 가져가자 13대 민의원 의원을 마지막으로 차기 총선 불출마와 정계 은퇴를 시사하였다.
1985년 68세의 나이로 정계를 은퇴한 박정희 전 총리는 사회당의 명예 총재와 최고상임고문(사실상의 명예직)등을 맡으며 조용한 말년을 보냈고 강연과 저술활동 등으로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는 경제성장기의 자신의 정책을 옹호하면서도 노동자 인권 소홀이나 기형적 경제 체제를 만들어낸 점 등 일정 부분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듯 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08년 경제위기가 닥치자 당시 이명박 총리의 요청으로 자신의 후임인 김종필, 김영삼, 이회창, 김대중 등과 함께 국가원로자문회의 위원을 맡기도 하였으며 2010년 뇌졸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뤄졌고 3김과 양노를 비롯하여 이회창, 권영길, 이명박 등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조문을 왔으며 시신은 유가족들의 동의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평가
대한민국의 제2차 경제발전을 이끌어내고 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그 실행 방법에 대해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다.
긍정적 평가
박정희 총리 집권기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가 엄청나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며 장면 총리 시기의 5개년 계획을 발전시킨 신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경공업 위주의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던 한국을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체제로 변화시킨 것은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또한 독선적인 그의 정치방식은 비판을 받기도 하나 그런 정치운영 방식 덕분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포항제철 건설, 성진제철 복구 등의 강한 추진력이 요하는 계획들을 빠르게 입안시켜 실행함으로써 현대 선진국 대한의 토대를 닦게 되었다.
또한 조소앙·조봉암 내각 당시에 진전되었다가 장면 내각이후 침체되었던 복지시스템에도 공을 들여 해외에서도 극찬하는 의료보험 제도가 이당시에 자리잡았는데 이 또한 당내외의 비판을 감수하고 추진한 것으로 박정희 총리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그리고 장면 내각 시기에 이루어졌던 개발은 대도시 및 거점도시에 한정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박정희 내각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을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농촌의 초가집과 비포장도로가 없어지고 콘크리트 건물과 포장도로가 들어섰으며 제한적이지만 전기가 공급되는 등 농촌의 삶의 질은 상당히 높아졌다. 또한 농촌에 현대식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농산물의 생산량이 상승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상당히 높아지게 되었다.
국방면에 있어서도 기존 미중양국의 뒤에 숨어서 조용한 평화의 시대를 누리던 한국의 안보체계를 장준하 총리의 뒤를 이어 강화하고 국군 현대화를 추진하였으며 대규모의 군비증축과 자주국방 계획이 실시되었다.
부정적 평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김종필 등 일부 측근들과 재건동지회를 구성하여 주도권을 잡고 독재적인 당 운영을 하였으며 집권후반기에는 자신의 경제계획에 반대한 몇몇 의원들을 당에서 재명하려는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는 등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독선적인 면모를 보인덕에 김종필을 제외한 후계자를 전혀 키우지 않았으며[11] 결국 박정희 총리의 정계 은퇴이후 김종필 총리를 제외한 다른 미래권력이 없던 민주공화회는 내분에 휩싸인 끝에 붕괴되었고 결과적으로 혁신정우회의 김철이 총재로 선출되어 총리가 되게 되었다.
또한 사회당 출신의 총리임에도 불구하고 의료보험제도 이외에는 복지에 큰 관심을 주지 않았으며 일부 대기업과 유착하여 노동자 인권탄압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실제로 이 당시의 근로기준법이 제정되고 시행되기는 하였으나 박정희 본인은 상당히 전체주의 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노동자의 인권향상 같은 '소수'를 위한 정책보다는 '다수'의 풍요을 위한 경제발전에 치중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의 노농계급 권리를 상당히 퇴보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당내외의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대학 교수들을 비롯한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동원한 여론조작을 하였음은 당시에도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10월 유신'등의 실체없는 구호들에 대한 비판또한 지식인들을 동원해 무마시켰으며 각주에서 언급되듯 민주공화회 내부의 측근들과 이러한 친유신 지식인들을 모아 '유신정우회'로 계파명을 바꾸고 반대파 의원들을 처내려는 시도를 하는 등 지식인들을 정치적인 친위세력으로 이용한 것은 말할것도 없는 박정희 총리의 암적인 면이며 비판받아야 마땅할 부분이다.
비판 및 논란
노동 3권 비하 및 책임전가 논란
1999년, 동남아시아발 경제위기가 진행중이던 와중 한겨례와의 인터뷰에 임했는데 경제불황의 원인을 묻는 한겨례 기자의 질문에 "근로자들이 옛날처럼 국가의 대한 헌신과 봉사의 정신이 아니라 돈만 보고 일해서 이렇게 되었다, 노동 3권이나 근로기준법 같이 애국심을 금전적 이익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 이 나라에 도입되어 일이 이렇게 커졌다."라며 경제 위기의 원인을 노동자들에게 돌리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런데 애초에 노동 3권은 제헌헌법에 명시되어 있던 것이고 근로기준법의 경우 같은 것은 1953년 이미 김구 총리 재임기 당시 전진한 노동부 장관의 주도로 제정된 것이며 경제 위기는 오히려 박정희 총리 재임기 당시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만들어진 기형적 경제 구조가 주요 원인중 하나라는 점에서 좌우 양쪽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 전 총리는 별다른 사과없이 유유히 넘어갔으며 이로 인해 당시 심판론이 불던 한독당 정권이 연장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리고 박 전 총리는 이후 2007년이 되어서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제개발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묻는 질문에 "결과적으로 볼때 당시에는 나의 노선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에 여러 근로자들이 피죽 한 끼도 먹지 못하고 전깃불도 안들어 오는 곳에서 12시간을 넘게 일해야 했던 점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며 자신의 노동정책 실패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였다.
지역구 세습 논란
1999년 박정희 전 총리의 차녀 박근혜가 정계 입문을 선언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출마 선거구를 이전에 박정희가 지역구 의원을 지냈던 구미시 일대로 정하며 논란이 되었다. 그 이유는 이미 당시에 구미시 갑에는 박세직이, 을에는 김윤환이 각각 삼선, 재선의원으로서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당 내부에는 구 박정희의 후신세력인 김종필 중심의 자유민주연합과 권영길, 김문수 등 노동계·운동권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승리21이 양대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두 세력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고 박근혜에 대한 공천갈등은 사회당 구파와 신파의 갈등으로 번지게 되어 사회당의 지지율을 하락시켰고 이 와중에 박정희 당시 최고상임고문이 당 공천심의위원회에 압력을 가했다는 소문이 더해지며 사회당이 압도적인 제1당으로 올라 설 것으로 예상되었던 선거에서 예상보다 부진한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12]
당시 박정희 최고상임고문은 공심위에 대한 압력설을 부정하였고 박근혜도 결과적으로 구미가 아닌 대구 달성에 공천을 신청해 최종적으로는 구미시 갑·을의 박세직, 김윤환 의원은 당선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전 총리와 사회당 구파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안좋아 졌으며 이후 박근혜가 사회당 대표 선거에서 떨어지는 데에 일조하게 되었다.
김대중 패싱 논란
2008년 국가원로자문회의의 회의에서 김종필, 홍숙자, 이회창 등과는 악수를 하였으나 김대중 전 총리가 악수를 청하자 그대로 무시하고 자리에 착석하는 모습을 보여 논란이 되었다. 이게 문재가 된 이유는 박정희가 본래 김대중·김영삼(양김)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개인적인 앙금으로 결례를 저질렀기 때문도 있으나 김영삼과는 싫은 티를 내면서도 악수를 한 반면 김대중은 아예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당시 새천년민주회 소속 한독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민간인들도 정치적인 결례라고 비판했으나 박정희 전 총리는 죽는 날 까지 이에 대해 함구하였다.
민주공화회(舊 재건동지회, 박정희계)
민주공화회(民主共和會)혹은 박정희계(朴正熙系)는 사회당에서 박정희 전 총리를 따랐던 계파를 말하는 말이다. 민주공화회는 박정희 전 총리가 김원봉 당시 국방부 장관에 의해 사회당에 영입될 때 같이 영입되었던 군부출신 인원들에 의해 재건동지회(再建同志會)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졌으며 이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출범한 근대적인 회파[13]였다.
주로 군부출신 인원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일부 기성정치권 인사들과 학계나 시민단체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온건 국가자본주의, 협동조합주의 성향을 띄었으며 정치·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 여러모로 현재의 사회당과는 성향이 다른데 이는 박정희가 여운형-조봉암-장건상-김철-현재 사회당으로 이어지는 주류 사회민주주의-민주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조선공산당에 몸담은 전력이 있어 소련식 사회주의, 일명 스탈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박정희계는 박정희의 총리 재임기 당시 사회당 내 주류파였으나 그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김종필을 중심으로한 청구동계와 태완선등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유신회로 분열되어 혁신정우회와 김철에게 주도권을 내주었고 이후 유신회는 해체되고 청구동계를 중심으로 신민주공화회, 자유민주연합등으로 명칭을 바꾸며 당내의 주요 계파로 유지되었으나 반 박정희 성향이 강하던 노동계·운동권 출신 인물들이 사회당에 유입되며 당내 주류파가 되자 2000년대 초반을 중심으로는 완전히 밀려났으며 노무현 총리를 거치면서는 사회당의 리버럴화가 가속되어 김종필의 정계 은퇴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중심으로 다시한번 결집하여 미래창조회를 창설하며 재기를 노리는 듯 하였으나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패배하였고 이후 박근혜의 내부총질 논란과 무능함으로 인해 와해되며 현재 '박정희의 유산'은 사회당 내에서 자취를 감춘 상태이다.
대중매체에서
- MBC 드라마 공화국 시리즈에서는 김상민, 홍경인, 이창환이 각각 아역 박정희, 청소년 박정희, 청년·장년 박정희 역을 맡았다.
-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창환이 박정희 역할을 맡았으며 당시 박정희가 살아있었기에 박정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등장하였다.
- SBS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와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독고영재가 박정희 역을 맡았다.
-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는 조영진이 박정희 역으로 등장하였다.
- 박정희 총리 암살미수 사건을 담은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송재호가 박정희 역을 맡았다.
-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본명이 아닌 '박의원'으로만 언급되며 장면 총리의 덕혜옹주 귀국안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송재호가 연기했다.
- 박정희 내각 당시의 권력암투를 담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박정희는 이성민이 연기했으며 본명이 아닌 '총리각하', '박총리'로만 언급되나 군복등의 명찰에는 간간히 본명이 적혀있다.
여담
여자보는 눈이 꽤나 높았다고 하며 당시의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평가받던 순종적이고 저학력인 여성보다는 자신처럼 근대식 교육을 받은 일명 신여성(新女性)과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또한 키가 크고 얼굴이 긴 미인형 여자를 좋아했다는데 이는 육영수 여사의 외모와 일치한다.
엄청난 애연가이자 애주가 였다고 한다. 제8대 민의원 선거날에는 자택에서 줄담배를 피웠으며 총리궁에서도 당시 유행중이던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담배가 나올때 마다 피웠다고 한다. 술도 잘마셔서 태국 방문 당시에는 연설 직전까지도 여러차례 술을마셔 육영수 여사가 눈치를 준적도 있다고 한다.
전주 지역 시찰을 마친 후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에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한 삼백집에 수행원을 시켜 배달을 요청했는데 그 식당의 주인이었던 욕쟁이 할머니가 욕을 하며 직접오라고 호통을 쳤고 이후 직접 식당에 찾아가자 욕쟁이 할머니는 욕을 삼가해달라는 수행원들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욕을 한바가지를 하면서 식사를 대접했다. 욕쟁이 할머니의 "네놈은 어찌 그리 박정희를 쏙 빼닮았냐? 누가 보면 총리인 줄 알겄다 이놈아!", "그래도 그놈은 큰일이나 했지. 옛다, 여기 계란이나 더 쳐먹어!"라는 말에 빅정희는 웃으며 "허허, 할머니? 박정희가 날 닮았지, 어떻게 나더러 박정희를 닮았다고 하슈?"라는 말로 응수했으며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맛있게 국밥을 다 먹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국가주의, 권위주의 성향을 띄는 전형적인 '스트롱맨' 느낌의 지도자였으나 사적으로는 부하들에게도 존댓말을 쓰고 욕도 잘 하지않는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고 하며 식사도 전임자인 윤보선이나 장면보다는 비슷하게 군인출신 이었던 장준하와 비슷하게 단촐했다고 한다. 식욕도 별로 없고 먹는양도 적었다고 하는데 딸인 박근혜도 그런것을 보면 유전인듯 하다.
만주군에서 복무한 전적을 보고 알 수 있듯이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성향이 강했으며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일설에는 퇴임이후 전임총리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무능한 존재였으며 독립이 중국과 같은 외세의 덕으로 된 것이란 발언을 했다고 하며 이에 같이있던 장준하 전 총리가 박정희 전 총리의 뺨을 때리고 욕설을 퍼부어[14] 싸움으로 번질뻔 한 걸 윤보선 전 총리가 겨우 말려 진정된 적도 있다고 한다.
박정희 총리의 업적과는 별개로 자식농사에는 실패했다는 평이 많은데 일단 자식들 간의 사이가 전부 안좋은데다가 딸인 박근혜 전 민의원 의원이 2017년 비리사태로 인해 구속되면서 이런 평가는 더욱 확고해졌다.
어록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66 | 제7대 민의원 의원 선거 | 전국구 | 10,337,637 (43.96%) | 당선 (15번) | 초선 | |
1968 | 제8대 민의원 의원 선거 | 경북 군위군·선산군 | 51,019 (79.69%) | 당선 (1위) | 재선 | |
1971 | 제9대 민의원 의원 선거 | 54,927 (80.81%) | 3선 | |||
1973 | 제10대 민의원 의원 선거 | 경북 칠곡군·군위군·성주군·선산군 | 61,213 (67.52%) | 4선 | ||
1977 | 제11대 민의원 의원 선거 | 64,214 (68.04%) | 5선 | |||
1981 | 제12대 민의원 의원 선거 | 경북 구미시·군위군·성주군·선산군·칠곡군 | 67,071 (66.16%) | 6선 | ||
1983 | 제13대 민의원 의원 선거 | 경북 구미시·군위군·칠곡군·선산군 | 100,219 (63.17%) | 7선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46 - 1950 | 입당 | |
무소속 | 1950 - 1960 | 위헌정당 해산 전향 |
1960 - 2010 | 입당 정계 입문 정계 은퇴 사망 |
둘러보기
- ↑ 성주군·칠곡군
- ↑ 달성군·고령군·성주군
- ↑ 직강공파 29세손, 혁거세 65세손 ◯희(熙) 항렬.
- ↑ 첫번째 20세기 출생 총리이자 가장 젊은 총리는 제7대 장준하 국무총리이다.
- ↑ 2008년 세계경제위기 당시 일시적으로 거국내각이 구성되었을때 김영삼, 권영길, 김종필(이상 전 총리), 홍숙자(전 대통령, 자문회의 의장)등과 함께 임명
- ↑ 당시 신징군관학교는 17세 이상 20세 미만 미혼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고 이는 박정희 본인도 알고 있었다.
- ↑ 다만 이는 진위여부 논란이 있다.
- ↑ 김원봉과 장준하의 관계는 정적을 넘어선 앙숙 수준의 정치인이었으나 당시 연립 여당이던 사회당의 총재였기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 ↑ 여운형, 조봉암을 중심으로 내려오는 사회민주주의-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계파들의 통칭.
- ↑ 대규모의 부패인사, 정치깡패 숙청과 신진인사 등용을 통한 구악일소·정치개혁 운동으로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가졌다.
- ↑ 김종필 조차도 집권후반기에는 견제하여 김종필 총리의 영향력을 지우고자 소속 회파의 명칭을 유신정우회로 변경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반발에 못이겨 취소하였다.
- ↑ 물론 예상보다 부진했다는 것이지 500석 중 272석을 차지하며 단독 집권에 성공하기는 했다.
- ↑ 즉 회파 내부에 회장, 부회장, 간사 등의 직책을 둔 회파.
- ↑ 참고로 박정희는 1917년 생, 장준하는 1918년 생으로 박정희가 1살 형인데도 이런것을 보면 진심으로 분노 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