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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26A9DF; color: #fff;" | 경력 | ! style="background: #26A9DF; color: #fff;" | 경력 | ||
| 민주사회를 위한 | | 경성 제1대학교 총학생회장<br>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모임 회장<br>'''제9~10대 남포광역시장'''<br>한인사회당 선거대책위원장<br>남포국립대학교 법학과 교수<br>제13회 지방선거 남포광역시장 후보 {{small|(무소속)}}<br>제15회 대통령 선거 야권 단일후보 {{small|(등록 무효)}}<br>버지니아 주 변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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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공화국 (리좀)|대한공화국]]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 과거 좌익 계열의 아이돌로 평가받기도 하였으나, 정치적 실수와 줄타기 실패로 인해 현재는 재야 인사에 머물고 있다. | [[대한공화국 (리좀)|대한공화국]]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 과거 좌익 계열의 아이돌로 평가받기도 하였으나, 정치적 실수와 줄타기 실패로 인해 현재는 재야 인사에 머물고 있다. | ||
== 생애 == | == 생애 == | ||
1964년 평양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박정희 (리좀)|박정희]]의 지지자였으며 공화당의 열혈 당원이었다고 한다. 박만영 역시 보수주의자로 자라났으나, 대학생 시절 친구가 구해다준 정치 서적을 읽고 신좌파 사상에 경도되어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경성 제1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한 후 남포의 공단에 위장취업을 하고, 좌익 성향 유인물을 뿌리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도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는 좋았는지 1987년 경성 제1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1987년 노동자대투쟁 (리좀)|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주도하여 유명해졌고, 졸업하기 직전 [[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 모임 (리좀)|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 모임]]을 설립하여 초대 회장이 된다. | |||
1989년, 진지한 법학공부를 하길 원했던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여러 견문을 쌓은 그는 노선을 다소 온건화하고, 3년만에 법학박사(JD) 학위를 취득한다. 특히 당시 미국을 뒤흔들던 앨 고어와 빌 클린턴의 "제3의 길"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좌익적인 성향은 남아있어, 귀국 후 바로 변호사 개업을 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인권변호사가 되어 관북권에서 유명한 재야 노동운동가 겸 변호사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고건 (리좀)|고건]]을 지지한 인사 중 한명이었는데, 특히 1995년 대선을 앞두고 한인사회당 전당대회에서 고건을 지지하는 장문의 연설을 해 주목 받았다. | |||
그를 일찍이 주목한 사회당 지도부는 [[제9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리좀)|1998년 지방선거]]의 남포광역시장 선거에 그를 전략공천했다. 당시 남포의 상황은 [[이휘령 (리좀)|이휘령]] 시장이 공천헌금 살포 사건으로 컷오프를 당하고 [[남포시민연합 (리좀)|남포시민연합]]이라는 지역정당을 만들어 독자출마를 감행한 가운데 청년좌파 세력의 [[청년진보당 (리좀)|청년진보당]], 공단 지역에서 인기가 높은 대한공산당, 급진좌익 성향의 [[노동자혁명당 (리좀)|노동자혁명당]] 등 다수의 좌익 성향 정당이 난립하던 구도였다. 이휘령 시장이 사회당의 조직을 들고 날랐기 때문에 당시 사회당은 전국적으로 높은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남포에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청년 정치가 박만영이 공천되며 청년진보당으로 이탈했던 사회당 20대 지지층이 결집하였으며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거세진 이휘령 시장의 사법리스크로 박만영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선거 결과 모두의 예상을 깨고 52% 대 48%라는 여유로운 표차로 박만영이 이휘령 시장을 꺾으며 그는 다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 |||
그는 시장으로 "제3의 길"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신산업에 투자하는 한편 노동조합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 노동자와 기업인 모두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또한 공단의 쇠퇴와 동남아시아 발 외환위기로 위기에 몰려있던 남포의 구도심 상당 부분을 재개발해 남포가 오늘날과 같이 대한공화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 중 하나가 되도록 만들었다. 재선을 앞둔 박만영 시장의 지지율은 80%대에 육박했고 그는 2002년 지방선거에서 재선하는데에 성공한다. | |||
== 어록 == | == 어록 == | ||
{{인용문|'''무능한 300석을 얻느니 똘똘한 100석이 더 낫다.'''|[[제32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리좀)|2007년 총선]] 선거대책위원장 재직 中. 이 선거에서 한인사회당은 겨우 93석만을 건지는 역대급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 {{인용문|'''무능한 300석을 얻느니 똘똘한 100석이 더 낫다.'''|[[제32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리좀)|2007년 총선]] 선거대책위원장 재직 中. 이 선거에서 한인사회당은 겨우 93석만을 건지는 역대급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
2023년 9월 17일 (일) 21:18 판
공산1968 | 리조니 | Arrondissments | 레스 어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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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0대 남포광역시장 박만영 朴滿永 | Park Man-ye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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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4년 5월 29일 (58세) |
평양광역시 중구 만수동 | |
국적 | 대한공화국 | 미국[1] |
사저 | 미합중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남포광역시 온천군 금곡리 20-5 |
현직 |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공동이사장 미국 버지니아주 변호사 |
재임기간 | 제9-10대 남포광역시장 |
1998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 |
링크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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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공화국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 과거 좌익 계열의 아이돌로 평가받기도 하였으나, 정치적 실수와 줄타기 실패로 인해 현재는 재야 인사에 머물고 있다.
생애
1964년 평양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박정희의 지지자였으며 공화당의 열혈 당원이었다고 한다. 박만영 역시 보수주의자로 자라났으나, 대학생 시절 친구가 구해다준 정치 서적을 읽고 신좌파 사상에 경도되어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경성 제1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한 후 남포의 공단에 위장취업을 하고, 좌익 성향 유인물을 뿌리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도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는 좋았는지 1987년 경성 제1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주도하여 유명해졌고, 졸업하기 직전 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 모임을 설립하여 초대 회장이 된다.
1989년, 진지한 법학공부를 하길 원했던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여러 견문을 쌓은 그는 노선을 다소 온건화하고, 3년만에 법학박사(JD) 학위를 취득한다. 특히 당시 미국을 뒤흔들던 앨 고어와 빌 클린턴의 "제3의 길"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좌익적인 성향은 남아있어, 귀국 후 바로 변호사 개업을 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인권변호사가 되어 관북권에서 유명한 재야 노동운동가 겸 변호사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고건을 지지한 인사 중 한명이었는데, 특히 1995년 대선을 앞두고 한인사회당 전당대회에서 고건을 지지하는 장문의 연설을 해 주목 받았다.
그를 일찍이 주목한 사회당 지도부는 1998년 지방선거의 남포광역시장 선거에 그를 전략공천했다. 당시 남포의 상황은 이휘령 시장이 공천헌금 살포 사건으로 컷오프를 당하고 남포시민연합이라는 지역정당을 만들어 독자출마를 감행한 가운데 청년좌파 세력의 청년진보당, 공단 지역에서 인기가 높은 대한공산당, 급진좌익 성향의 노동자혁명당 등 다수의 좌익 성향 정당이 난립하던 구도였다. 이휘령 시장이 사회당의 조직을 들고 날랐기 때문에 당시 사회당은 전국적으로 높은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남포에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청년 정치가 박만영이 공천되며 청년진보당으로 이탈했던 사회당 20대 지지층이 결집하였으며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거세진 이휘령 시장의 사법리스크로 박만영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선거 결과 모두의 예상을 깨고 52% 대 48%라는 여유로운 표차로 박만영이 이휘령 시장을 꺾으며 그는 다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는 시장으로 "제3의 길"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신산업에 투자하는 한편 노동조합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 노동자와 기업인 모두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또한 공단의 쇠퇴와 동남아시아 발 외환위기로 위기에 몰려있던 남포의 구도심 상당 부분을 재개발해 남포가 오늘날과 같이 대한공화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 중 하나가 되도록 만들었다. 재선을 앞둔 박만영 시장의 지지율은 80%대에 육박했고 그는 2002년 지방선거에서 재선하는데에 성공한다.
어록
무능한 300석을 얻느니 똘똘한 100석이 더 낫다. 2007년 총선 선거대책위원장 재직 中. 이 선거에서 한인사회당은 겨우 93석만을 건지는 역대급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
그러게 누가 산에 들어가라고 했냐. 손학규를 디스하며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83 - 1985 | 입당 | |
무소속 | 1985 - 1997 | 노선 차이로 탈당 |
1997 - 2010 | 정계 입문 | |
무소속 | 2010 - 2016 | 탈당 |
2016 - 2018 | 창당 | |
무소속 | 2010 - 2016 | 탈당 |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98 | 제9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 남포광역시장 | 327,347 (52.31%) | 초선 | ||
2002 | 제10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 000,000 (00.00%) | 재선 | |||
2014 | 제13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 무소속 | 132,740 (18.93%) | 낙선 (3위) | ||
2022 | 제15회 대통령 선거 | 대한공화국 | 등록 무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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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1월 1일 취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