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
|||
64번째 줄: | 64번째 줄: | ||
|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 | |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 | ||
|- | |- | ||
| [[제주도 (굳세어라 금순아)|제주도]] [[제주직할시 (굳세어라 금순아)|북제주군]] 아라면 [[서울대학교병원 (굳세어라 금순아)|서울대학교병원]]<br>(現 [[제주직할시 (굳세어라 금순아)|제주직할시]] [[아라구 (굳세어라 금순아)|아라구]] 아란동 [[ | | [[제주도 (굳세어라 금순아)|제주도]] [[제주직할시 (굳세어라 금순아)|북제주군]] 아라면 [[서울대학교병원 (굳세어라 금순아)|서울대학교병원]]<br>(現 [[제주직할시 (굳세어라 금순아)|제주직할시]] [[아라구 (굳세어라 금순아)|아라구]] 아란동 [[전시연합대학병원 (굳세어라 금순아)|전시연합대학병원]]) | ||
|- | |- | ||
! style="background:#00205C; color:#BD8E00" | 묘소 | ! style="background:#00205C; color:#BD8E00" | 묘소 |
2023년 11월 23일 (목) 18:56 판
대한민국 대통령 |
---|
[ 펼치기 · 접기 ] |
이승만 관련 틀 | |||||||||||||||||||||||||||||||||||||||||||||||||||||||||||||||||||||||||||||||||||||||||||||||||||||||||||||||||||||||||||||||||||||||||||||||||||||||||||||||||||||||||||||||||||||||||||||||||||||||||
---|---|---|---|---|---|---|---|---|---|---|---|---|---|---|---|---|---|---|---|---|---|---|---|---|---|---|---|---|---|---|---|---|---|---|---|---|---|---|---|---|---|---|---|---|---|---|---|---|---|---|---|---|---|---|---|---|---|---|---|---|---|---|---|---|---|---|---|---|---|---|---|---|---|---|---|---|---|---|---|---|---|---|---|---|---|---|---|---|---|---|---|---|---|---|---|---|---|---|---|---|---|---|---|---|---|---|---|---|---|---|---|---|---|---|---|---|---|---|---|---|---|---|---|---|---|---|---|---|---|---|---|---|---|---|---|---|---|---|---|---|---|---|---|---|---|---|---|---|---|---|---|---|---|---|---|---|---|---|---|---|---|---|---|---|---|---|---|---|---|---|---|---|---|---|---|---|---|---|---|---|---|---|---|---|---|---|---|---|---|---|---|---|---|---|---|---|---|---|---|---|---|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李承晩 | Syngman Rhee | |
출생 | 1875년 3월 26일[1] |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삼리 능안골 (現 황해남도 봉천군 성기리) | |
사망 |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 |
제주도 북제주군 아라면 서울대학교병원 (現 제주직할시 아라구 아란동 전시연합대학병원) | |
묘소 | 국립묘지 이승만대통령묘소 |
재임기간 | 초대 대통령 |
1948년 7월 24일 ~ 1965년 7월 19일 | |
서명 | | [2]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선서 |
---|
제주의 초대 대통령.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이후 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초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거쳐서 1948년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이후 6년 임기로 헌법을 개정하여 1952년 대선과 1958년 대선, 1964년 대선에서도 당선되어 총 17년 동안 제주의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 재임 중 제주 정부 수립, 제주의 국제적 승인, 농지개혁, 초등학교 의무교육,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대대적인 학교 건립, 평화선 선포 등과 같은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6.25 사변에서의 패배로 인해 제주도로 쫓겨나는 9.15 후퇴의 치욕을 당하고 만다.
제주도로 쫒겨났을 당시에도 죽을 때까지 북진통일을 포기하지 않고 제주의 경제, 사회 시설을 발전시켜 본토에서의 행적뿐만 아니라 현대 제주에서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써 자유당과 제주에선 우남기념관과 헌법 전문에서도 보이듯 국부(國父)로 그를 추앙하고 있다. 한편으론 제주라도 사수하겠다는 아집 혹은 두려움 아래 수십 년 계엄령을 때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등 독재자로 군림해 국외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듯 북진통일을 위해 노력하며 제주도에서 말년을 보냈고 1965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약력
- 1896.11. 협성회 창립발기인, 서기, 회장
- 1898.1. 「협성회회보」 주필
- 1898.3. 독립협회 총대(總代)위원
- 1898.4. 「매일신문」 사장
- 1898.8. 「제국신문」 창간발기인, 논설위원
- 1898.11. 대한제국 중추원 종9품 의관
- 1902.12. 한성감옥 죄수 교사
- 1904.10.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
- 1910.10. 종로 기독교 청년회 총무 겸 학감
- 1913.8. 미국 하와이 한인기숙학교 교장 겸 한인기독학원 원장
- 1919.3. 대한국민의회 국무경
- 1919.4.11. ~ 1919.4.23.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 1919.4. 초대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 1919.9.11. ~ 1925.3.21.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 1924.11. 대한인동지회 종신총재
- 1932.11.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제연맹 특명전권대사
- 1933.3. 대한민국 임시정부 무임소 국무위원
- 1933.6.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 1934.4.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
- 1941.4.20.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
- 1941.6.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 1945.9.6. ~ 1946.2.19. 조선인민공화국 초대 주석[8]
- 1945.10.23.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 1945.12.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
- 1946.2. 초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 1946.6.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
- 1947.1.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최고고문
- 1948.5.31. ~ 1948.7.24. 제헌 국회의원 (초선 / 동대문구 갑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948.5.31. ~ 1948.7.24. 초대 국회의장
- 1948.7.24. ~ 1965.7.19.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52.3.20. ~ 1965.7.19. 자유당 총재
생애
유년 시절
젊은 개화파
독립운동가
해방정국 시기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9.15 후퇴와 제주 계엄령
결국 6.25 사변에서 패배한 이승만은 6.25 사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의 하야를 선언하였지만 격렬한 지지자들의 반대 여론에 힘입어 야당을 탄압하여 발췌개헌을 감행, 제주 계엄령과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하여 북진통일을 위한 철권 통치에 들어간다.
장제스는 6.25 사변의 패배 원인을 부정부패 척결 실패와 미흡한 전쟁 대비에 있다고 보면서 9.15 후퇴 이후에는 전쟁 대비와 부패문제에 있어서 철저하게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다. 9.15 후퇴 이후 미국을 압박하여 막대한 원조와 제주 국방군 20개 사단으로의 증원,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것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복지예산과 교육예산도 어느정도 확충시키고, 고금리 정책과 쌀, 밀가루, 돼지고기, 닭고기 같은 기초 식료품 가격 안정조치로 물가상승률을 한자리 수로 안정화시켰고, 저축률도 늘렸으며 부정부패척결도 어느정도 단행했다.
또한 1961년부터 본격적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중소기업과 국영기업 중심으로 경제성장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큰 성과를 내면서 제주는 1950년부터 20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연 평균 8%대의 고도경제성장을 누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비교적 빠르게 향상되었으며, 빈부격차도 영미권에 비해서 크게 낮아졌다. 이를 제주의 기적이라고 불렸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다. 당시 조선이 천리미운동과 8월 종파사건으로 경제/사회적인 혼란, 침체가 극심하여 제주와 조선은 큰 대조를 이루었다. 이러한 제주에서의 경제 발전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현재까지 본토의 공산정권에 대한 체제 우월성, 본토수복 노선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제주 내부에서 제기되는 민주화 요구를 모두 강경하게 탄압하는 독재자였다. 1950년대에 정치적 탄압으로 인한 사망자만 6천명에 달했다. 또한 대한민국 자유지구에서 3개의 강제 수용소가 존재하였으며 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이러한 정적과 재야인사에 대한 탄압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이승만에 대해서 비판적인 여론이 있었지만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도 있고 조선에 대한 견제도구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점도 있기에 현재까지 제주에 대한 지원은 계속되는중 이다.
이승만은 조선이 외교적으로도 중국과 소련과의 사이가 소원해지자 미국의 지원을 통해 권토중래를 노렸다. 실제로 북진통일을 시행한다는 국광작전을 세우고 스파이들을 조선으로 보내봤지만 조선의 안보는 흔들리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되려 반격만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이승만의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물론 당대 조선의 민심을 보았을 때 비록 공산당에 대한 실망감이나 반감이 커지던 상황이라서 전면전을 벌일 때 제주에게도 일단 승산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가 너무도 작았기 때문에 출혈이 만만치 않았고, 미국은 이승만이 조선과 전쟁을 벌이자고 할때마다 이를 반려했다. 결국 이승만은 권토중래를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았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도 제주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1964년 6월 말 갑작스런 급성 위장 출혈로 쓰러진 후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제주도 전시연합대학병원에서 향년 90세로 일생을 마쳤다. 이때 남긴 마지막 기도와 유언은 이렇다.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 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굳게 서서 국방에서나 경제에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승만의 마지막 기도 |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 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이승만의 유언 |
7월 21일 제주 경무대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7월 27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망
사후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사상
일민주의
여담
- 미식가였다. 음식 중에선 현미떡국을 특별히 즐겼다고 하며 미국에서 오래 생활을 했다 보니 입맛이 미국인과 흡사해져 그의 식단에도 타락죽을 제외하면 샌드위치, 햄버거, 와인, 커피, 콜라, 등의 서구 음식들이 주로 들어갔다고 한다.
- 따로 자녀가 없었던 터라[9] 해피(Happy), 스마티(Smarty), 프리티(Pretty)라는 이름의 애완견을 상당히 예뻐했다.
가족 관계
어록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같이 살 수 없다.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1950년 11월 9.15 후퇴 직후 |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유언 |
각종 매체에서
영화
소설
방송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48 | 제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 서울 4[10] | 무투표 당선 | 당선 (1위) | 초선[11] | |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180 (91.84%) | 초선[A] | |||
1952 | 1952년 제주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자유지구 | XXX (XX.XX%) | 재선[A] | ||
1958 | 1958년 제주 대통령 선거 | XXX (XX.XX%) | 3선[A] | |||
1964 | 1964년 제주 대통령 선거 | XXX (XX.XX%) | 4선[13]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897 - 1898 | 개화파의 영향을 받아 정계 입문 | |
1898 - 1909 | 독립협회 강제 해산 | |
1909 - 1924 | 입당 | |
1924 |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인한 탈당 | |
1924 - 1925 | 입당 | |
1925 | 흥업구락부 창당을 위한 탈당 | |
1925 - 1938 | 창당 | |
1938 - 1945 |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인한 정당 해산 | |
1945 - 1946 | 창당 | |
1946 - 1951 | 창당[14] | |
1951 | 탈당 | |
1951 - 1965 | 창당 사망 |
저서
- 《독립정신 (獨立精神)》
-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
둘러보기
| ||||||||||||||
[ 펼치기 · 접기 ]
|
| ||
- ↑ 음력 5월 1일.
- ↑ 국문으로 된 제주 정부의 공문서에는 위에 있는 한문 휘호로 서명하였고, 보고서에는 '晩'자를 흘려써서 서명하였다.
- ↑ 양녕대군파 16대손, 시조 40세손 승(承)○ 항렬.
- ↑ 두 형이 이른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이승만이 사실상 장남이었다.
- ↑ 호적말소
- ↑ 중혼
- ↑ 10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 ↑ 다만 이는 명목상의 직책이었으며 추대 당시 해외에 있던 이승만 본인은 귀국 직후 주석직 취임을 거절했다.
- ↑ 그의 유일한 친자손은 10살 때 디프테리아로 요절했으며 이인수는 이승만의 양자였다.
- ↑ 당시 행정구역 기준 동대문구 갑. 관할 모든 동들이 서울 확장으로 인한 분구와 구간 경계 조정을 거치면서 다른 구역으로 이관 되었다. 현재 기준 서울 종로구역 창신동, 숭인동 및 성북구역 돈암동, 성북동.
- ↑ 1948.7.20. 초대 대통령 당선 및 취임에 따라 사퇴.
- ↑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
- ↑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
1965년 7월 19일 사망. -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와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