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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만 보면 성조 또한 전형적인 선비처럼 보이지만,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도 익혔고 그 실력 또한 매우 유능하였고 정조와 더불어 지덕체를 모두 갖춘 황제라고 한다. | 이렇게만 보면 성조 또한 전형적인 선비처럼 보이지만,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도 익혔고 그 실력 또한 매우 유능하였고 정조와 더불어 지덕체를 모두 갖춘 황제라고 한다. | ||
특히 성조는 서양의 역사책 탐독을 좋아했는데 인물중에서는 러시아의 표토르 대제에 깊이 매료되었고, 전쟁사의 탐독에 굉장한 흥미를 보이며 군사교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 |||
=== | === 즉위와 어일신 === | ||
아버지 경조의 이른 사망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는데 당시 모후인 철순장황후와 조모인 조대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성조는 즉위하자마자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했다. 이는 조선 왕조에서 숙종의 친정과 함께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정통성을 떠나, 성조의 총명함과 결단력이 왕가의 어른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모두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 |||
성조는 즉위 교서에서부터 변함없는 경장을 선포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1873년, 성조는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단발령(斷髮令)을 반포하고 관복을 서양식 제복으로 교체한다. 당일부로 성조는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고 프로이센식 대원수 제복을 입기 시작했으며, 내무대신 박규수는 고시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칼과 가위를 가지고 도성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여 이를 직접 지도감독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당대의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이 이어지고 지방에서는 단발에 호응하지 않자, 성조는 격분하여 군수삭발령이라는 새로운 규정을 공포하고 반발하는 선비들을 보부상을 동원하여 진압하는등 우악스럽게 단발령을 관철시키고 만다. | |||
또한 1871년 보불전쟁으로 프랑스가 처참하게 패배하고 이에 감명을 받은 성조는 즉위 이후 서서히 프랑스식 군제를 버리고 프로이센식 군제를 도입한다. 1873년 전국을 6개 관구로 나눈 뒤 각 관구에 진대를 설치했으며 같은해 징병령을 선포하여 조선군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1885년에는 독일 육군 소령 야콥 맥켈을 위시한 독일 군사고문단을 초빙하여 독일군을 표본으로 삼아 조선 육군을 전면적으로 재조직했다. 조선 육군을 위해 강령과 조례를 만들고, 한성에 군사 학술원을 설립하였다. 성조의 애정어린 지원과 관심 하에 조선 육군 지휘부에 독일식 작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 |||
1874년에는 왕실 사무와 국무를 분리하여 각각 궁내부와 군국기무처로 분리한다. 군국기무처는 어일신을 총괄하고, 서구식 제도를 수용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의정부를 대신하는 새로운 권력의 중추였다. 이때 설치된 군국기무처의 수장은 총재이고, 총재의 산하에는 내부, 외부, 탁지부, 학부, 군부, 법부, 농상공부의 7개 부서가 설치되었고, 각 부서의 장을 대신이라고 하였다. 이는 훗날 대조선흠정헌법대강에 따라 대조선국 내각으로 개편되고, 오늘날 대한제국 내각의 전신이 된다. | |||
성조 즉위 초기 이러한 사회, 군사, 중앙행정기관의 개편과 함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양반중 일부를 공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새롭게 공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궁내부의 지배 아래로 두어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등이 있다. 다만, 이런 개혁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순도 적지 않았고, 양반들과 농민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때문에 성조는 이를 막기 위해 기존의 포도청을 영국의 런던경시청을 모티브로 개편, 경시청을 설립하여 이들 경시청의 경찰관과 보부상을 통해 철저하게 탄압한다. | |||
또한,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이루어진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신시대 '연수'의 분위기가 양성되었다. | |||
경제 산업분야에선, 부국강병, 식산흥업의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을 비롯한 관영공장이 만들어지는 등,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원'을 도입(1874년),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내셔널 뱅크)을 거쳐,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조선 은행을 설립(1882년) 하는 등,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제도, 전신망의 정비, 철도 및 선박 운수(민간 우편 기선 경부 회사와 국책 회사인 대조선 물류 회사의 경합을 거쳐 대조선 운수 회사가 되었다.) 등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실직한 대신 녹봉을 얻은 공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배경에 있었다. | |||
성조와 조정의 최대 목표는 구미 열강을 따라 잡는 것이기 때문에, 경조 시대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이 급선무로 여겨졌다. 영선사 사절단은 서구 여러 제도 조사도 목적이었지만, 조약 개정을 위한 사전 준비라는 면도 있었다. 실제로 교섭도 준비되었지만, 조선을 근대국가라고 보지 않는 구미제국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아직 시기 상조였다. 그 때문에, 우선 국내정책의 측면에서 국민들이 가진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제거하기 위해 외국인에 대한 공격을 법령으로 금지시키고, 만국공법을 수용하였으며 외국인이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치, 유럽화 정책 등여러 정책을 시도했지만, 조약 개정 자체는 반세기에 미치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 |||
=== 청과의 갈등과 성장 === | |||
=== 한청전쟁 === | |||
=== 칭제건원 === | |||
=== 의화단 반란 === | |||
=== 한러전쟁 === | |||
=== 천붕 === | |||
== 가족관계 == | == 가족관계 == |
2024년 1월 12일 (금) 15:3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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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 대한제국/정치 | 대한제국/역사 |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셩슈무강(聖壽無疆)ᄒᆞ샤 ᄒᆡ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ᄊᆞ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떨치샤 오 쳔만셰(於千萬歲)에 무궁(無窮)케 ᄒᆞ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이화에서"는 "현대까지 대한제국이 존속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
대한제국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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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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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초대 황제 성조 태황제 | 聖祖 太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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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0년 12월 21일 | ||||||||||||||||||||||||||||||
한양부 창덕궁 관물헌 (現 황성 한양부 창덕궁 관물헌 | |||||||||||||||||||||||||||||||
즉위 | 1867년 11월 3일 | ||||||||||||||||||||||||||||||
황성 한양부 경복궁 근정전 | |||||||||||||||||||||||||||||||
천붕 | 1910년 3월 23일 (향년 59세) | ||||||||||||||||||||||||||||||
황성 한양부 경복궁 태극전 | |||||||||||||||||||||||||||||||
능묘 | 홍릉(洪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 | ||||||||||||||||||||||||||||||
1862년 1월 9일 ~ 1867년 11월 3일 | |||||||||||||||||||||||||||||||
조선 국왕 | |||||||||||||||||||||||||||||||
1867년 11월 3일 ~ 1895년 1월 12일 | |||||||||||||||||||||||||||||||
대한제국 초대 황제 | |||||||||||||||||||||||||||||||
1895년 1월 12일 ~ 1910년 3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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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생애
출생과 유년기
1860년(경조 11년) 12월 21일, 경조와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만 12세) 때인 1873년(경조 24년) 9월에 아버지 경조를 잃었다. 아명은 '재성(載星)'였다.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항렬에 맞춰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가 피휘를 위해 '형(㷗)'으로 다시 개명했다.
성조는 어릴 적부터 이미 될성부른 떡잎을 보였다. 한번 잡은 책은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이는 성조는 암송할 때까지 책을 지독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습관 덕에 성조는 단군 이래 최고의 독서광으로 널리 알려져, 10살의 나이에 경조의 앞에서 경서를 비롯하여 경조 시대부터 유입된 서양 서적과 군사서적까지 방대한 분야의 책을 달달 외워 경조가 신하들에게 성조를 자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게만 보면 성조 또한 전형적인 선비처럼 보이지만,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도 익혔고 그 실력 또한 매우 유능하였고 정조와 더불어 지덕체를 모두 갖춘 황제라고 한다.
특히 성조는 서양의 역사책 탐독을 좋아했는데 인물중에서는 러시아의 표토르 대제에 깊이 매료되었고, 전쟁사의 탐독에 굉장한 흥미를 보이며 군사교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즉위와 어일신
아버지 경조의 이른 사망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는데 당시 모후인 철순장황후와 조모인 조대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성조는 즉위하자마자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했다. 이는 조선 왕조에서 숙종의 친정과 함께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정통성을 떠나, 성조의 총명함과 결단력이 왕가의 어른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모두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조는 즉위 교서에서부터 변함없는 경장을 선포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1873년, 성조는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단발령(斷髮令)을 반포하고 관복을 서양식 제복으로 교체한다. 당일부로 성조는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고 프로이센식 대원수 제복을 입기 시작했으며, 내무대신 박규수는 고시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칼과 가위를 가지고 도성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여 이를 직접 지도감독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당대의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이 이어지고 지방에서는 단발에 호응하지 않자, 성조는 격분하여 군수삭발령이라는 새로운 규정을 공포하고 반발하는 선비들을 보부상을 동원하여 진압하는등 우악스럽게 단발령을 관철시키고 만다.
또한 1871년 보불전쟁으로 프랑스가 처참하게 패배하고 이에 감명을 받은 성조는 즉위 이후 서서히 프랑스식 군제를 버리고 프로이센식 군제를 도입한다. 1873년 전국을 6개 관구로 나눈 뒤 각 관구에 진대를 설치했으며 같은해 징병령을 선포하여 조선군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1885년에는 독일 육군 소령 야콥 맥켈을 위시한 독일 군사고문단을 초빙하여 독일군을 표본으로 삼아 조선 육군을 전면적으로 재조직했다. 조선 육군을 위해 강령과 조례를 만들고, 한성에 군사 학술원을 설립하였다. 성조의 애정어린 지원과 관심 하에 조선 육군 지휘부에 독일식 작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1874년에는 왕실 사무와 국무를 분리하여 각각 궁내부와 군국기무처로 분리한다. 군국기무처는 어일신을 총괄하고, 서구식 제도를 수용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의정부를 대신하는 새로운 권력의 중추였다. 이때 설치된 군국기무처의 수장은 총재이고, 총재의 산하에는 내부, 외부, 탁지부, 학부, 군부, 법부, 농상공부의 7개 부서가 설치되었고, 각 부서의 장을 대신이라고 하였다. 이는 훗날 대조선흠정헌법대강에 따라 대조선국 내각으로 개편되고, 오늘날 대한제국 내각의 전신이 된다.
성조 즉위 초기 이러한 사회, 군사, 중앙행정기관의 개편과 함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양반중 일부를 공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새롭게 공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궁내부의 지배 아래로 두어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등이 있다. 다만, 이런 개혁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순도 적지 않았고, 양반들과 농민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때문에 성조는 이를 막기 위해 기존의 포도청을 영국의 런던경시청을 모티브로 개편, 경시청을 설립하여 이들 경시청의 경찰관과 보부상을 통해 철저하게 탄압한다.
또한,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이루어진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신시대 '연수'의 분위기가 양성되었다.
경제 산업분야에선, 부국강병, 식산흥업의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을 비롯한 관영공장이 만들어지는 등,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원'을 도입(1874년),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내셔널 뱅크)을 거쳐,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조선 은행을 설립(1882년) 하는 등,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제도, 전신망의 정비, 철도 및 선박 운수(민간 우편 기선 경부 회사와 국책 회사인 대조선 물류 회사의 경합을 거쳐 대조선 운수 회사가 되었다.) 등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실직한 대신 녹봉을 얻은 공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배경에 있었다.
성조와 조정의 최대 목표는 구미 열강을 따라 잡는 것이기 때문에, 경조 시대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이 급선무로 여겨졌다. 영선사 사절단은 서구 여러 제도 조사도 목적이었지만, 조약 개정을 위한 사전 준비라는 면도 있었다. 실제로 교섭도 준비되었지만, 조선을 근대국가라고 보지 않는 구미제국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아직 시기 상조였다. 그 때문에, 우선 국내정책의 측면에서 국민들이 가진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제거하기 위해 외국인에 대한 공격을 법령으로 금지시키고, 만국공법을 수용하였으며 외국인이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치, 유럽화 정책 등여러 정책을 시도했지만, 조약 개정 자체는 반세기에 미치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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