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홍 Dong Fang Hong (The East is Re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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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대체역사 | ||
기획 | 《동방홍》련재위원회 | ||
운영 | |||
연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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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 벨지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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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시작일 | 2022년 6월 4일[1] (연재 시작일로부터 +900일, 2주년) (연재 시작일로부터 +317일, 0주년) | ||
상징 색 | 홍색 (#E31225) | ||
흰색 (#DECCBE) | |||
저작권 | [3] | ||
개요
东方红,太阳升。 동방이 붉어지며, 태양이 떠오르고 中国出了个毛泽东。 중국에 마오쩌둥이 나타났네. 他为人民谋幸福。 그는 인민의 행복을 도모하네. 呼尔嗨哟,他是人民大救星! 에헤라디야! 그는 인민의 위대한 구세주라네! 동방홍 |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장편 세계관.
상세
1945년 일본의 패망과 8년 항쟁의 종료 이후 제2차 국공합작을 맺었던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미국의 주선 하에 중국 내 정치의 민주화와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부강한 중국의 건설을 위한 협정인 쌍십협정(雙十協定)을 1945년 10월 10일 체결, 초당적 정치협의체인 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會議)를 개최하였지만 수십년 전부터 이어져 온 국공 간의 갈등은 이러한 협정으론 중단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미 국무장관 마셜의 출국 직후 국공간의 전투는 또 다시 발발하게 되었다. 제2차 국공내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원조 중단을 인질 삼은 미국의 초공 중단 요구로 인한 초기 골든타임 내 초공 실패와 소련으로부터 일본제 무기를 인도받아 무장하고 전력을 재정비한 공산당과 홍군의 역공, 심리전에서의 대규모 실패와 군 내 각종 비리로 인해 국민당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으로부터 끊임없는 패배를 거듭하게 되었다. 이 기세에 올라탄 공산당은 1949년 1월 31일엔 베이징을 정복하였으며 4월 23일엔 중화민국의 수도이자 국민당의 본거지였던 난징을, 5월 27일엔 상하이를 함락시켰다.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은 마침내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개국대전, 開國大典)하였다.
한편 국민당은 연속적인 패배로 인한 사기 하락과 상술한 여러 대규모 리스크로 인해 끊임없는 패배를 지속하고 있었으며 10월 14일엔 광저우가, 11월 30일엔 8년 항쟁 당시 임시 수도였던 충칭이 함락되었다. 결국 장제스와 국민당은 12월 7일 중화민국 정부를 일본에게 이양받은 타이완으로 옮기게(국부천대, 國府遷臺) 되었다. 결국 12월 27일, 국민당 최후의 본거지였던 청두까지 함락되어 중화민국은 결국 중원 내에서의 모든 통치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중원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장제스와 국민당은 타이완을 임시 근거지로 하여 권토중래를 노렸으나 오히려 공산당은 하이난에 보란듯이 상륙하여 하이난을 점령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 공산당은 국민당이 대륙에서 패주, 몽진하면서 남기고 간 미제 군사품을 기반으로 1950년 6월 진마지구를 시작으로 대규모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명분 삼아 동아시아에서의 개입 자제를 선언한 토머스 E. 듀이의 소극적 군사 개입과 비슷한 시기에 발발한 조선반도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소규모의 군으로 중화민국과 대한민국 두 국가를 지켜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군 내에서 당시 해군 총사령관이던 구이융칭이 주도한 백색테러로 충성심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천샤오콴과 정이딩의 전향에 백색테러의 피해자인 준장 웨이지민을 필두로 복건군벌을 포함한 해병 장병들이 대거 호응하며 일으킨 9.7 사건으로 인한 내부 병력 소모와 지휘체계 혼란으로 인해 국민당은 인민해방군보다 더욱 우월한 해군 전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 해협에서의 인민해방군 간 전투에서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펑후에서의 인민해방군 상륙을 시작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차츰차츰 타이완을 점령해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1950년 9월 16일, 인민해방군이 타이난에 상륙하면서 인민해방군이 타이완에 입성하였으며 9월 28일엔 가오슝을 점령, 타이완 남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타이완 중부에서 발발한 원주민 반란으로 인해 이러한 인민해방군의 타이완 점령에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10월 26일엔 인민해방군이 타이중에 진입하였으며 12월 4일엔 먀오리와 신주에 진입하였다. 국민당은 근거지를 다시 이란으로 옮긴 뒤 단수이 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공산당을 최대한 막아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전황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1951년 1월 4일 타이베이는 함락당했으며 단수이 방어선이 돌파당하자 우궈전 등 자유파 인사들이 중화인민공화국 측으로 전향해왔다.
1951년 1월 26일, 총통 대행으로 재차 취임한 리쭝런이 당시 타이완 내 인민해방군을 이끌던 총사령관 린뱌오에게 투항하며 1927년 8월 1일부터 시작된 기나긴 국공내전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그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리쭝런은 투항 이후 공산당의 밑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지내게 되었으며 국민당의 수장 장제스는 대륙으로 압송당한 이후 베이징 대학 사서로 근무하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명의 린치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장웨이궈는 전투 도중 전사했으며 국민당의 비서장이었던 정옌펑(鄭彥棻)과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는 제주도로 수도를 옮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렇게 대만을 해방시킨 마오쩌둥은 중국의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천수를 누린 뒤 사망, 그 후임으론 마오쩌둥이 공인한 후계자 왕훙원과 당 원로들의 당쟁과 협의 끝에 국무원 총리 화궈펑이 올라선다. 왕훙원을 차기 주석으로 임명한다는 조건 하에 대만의 해방자인 '위대한 인민영수' 마오쩌둥이 직접 점찍은 후계자를 등에 업은 화궈펑은 아무리 그보다 더 오래 공산당에 몸담았던 덩샤오핑이라도 순식간에 허수아비로 만들어 정권을 장악하기엔 무리인 존재였다. 그 결과 덩샤오핑은 당내 투쟁에서 밀려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렇게 당 주석에 오른 '영명한 인민영수' 화궈펑은 1987년까지 정권을 유지하면서 중국을 통치하였으며 그가 건강 문제로 사임한 1987년이 되어서 후야오방 등과 합작해 군중파를 지도하던 왕훙원이 정권을 잡아 본격적인 통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오늘날 중국은 화궈펑-왕훙원 체제가 확립한 신민주주의 노선이 현재까지 안정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후진타오를 거쳐 시진핑과 보시라이, 리커창의 후계자를 둔 당쟁 끝에 보시라이가 주석으로 취임했다. 주석이 된 보시라이는 현재까지 안정적으로 중국을 통치하고 있으며 반제국주의의 선봉이자 유능한 중재자로서 국제 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영향을 받은 매체
- 이브위키 내
- 민국 38 - 신단, 공산1968
- 천안문, 5월 35일 - 공산1968
- 이브위키 외
여담
- 첫 연재 시작일이 천안문 6.4 항쟁이 끝을 맺은 날짜인 6월 4일이다. 다만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세계관 출범 5일 만에 무기한 휴재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다시 연재를 재개하기까지 약 1년 7개월 4일, 일수로 환산하면 583일이란 시간이 걸렸다.
- '대만을 정복한 중국'이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대체역사 세계관이기에 그 고증과 내용이 현실성과 매우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6] 그렇기 때문에 동방홍은 현실적인 고증과 핍진성 위주가 아닌 재미와 흥미 위주로 세계관이 진행되니 동방홍을 읽는 독자들은 이러한 점을 사전에 숙지하고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방홍》련재위원회
2024년 8월 4일 동방홍이 신이브인민전선의 하위 세계관으로 편입되면서 신설된 연재자 조직이다.
닉네임 | 합류 날짜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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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지엄 | 2022년 6월 4일 | 팀장 |
핫산 | 2024년 8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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