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대황제 | |||||||||||
---|---|---|---|---|---|---|---|---|---|---|---|
[ 펼치기 · 접기 ] |
열종 문황제 관련 틀 |
---|
[ 펼치기 · 접기 ] |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열종 문황제 | 烈宗 文皇帝 | |||||||||||||||||||||||||||||||
---|---|---|---|---|---|---|---|---|---|---|---|---|---|---|---|---|---|---|---|---|---|---|---|---|---|---|---|---|---|---|---|
이름 | 이선(李壇) → 이청(李壇) | ||||||||||||||||||||||||||||||
출생 | 1879년 10월 23일 | ||||||||||||||||||||||||||||||
한성부 제중원 (現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 |||||||||||||||||||||||||||||||
붕어 | 1943년 10월 18일 (향년 64세) | ||||||||||||||||||||||||||||||
황성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 |||||||||||||||||||||||||||||||
재위기간 | 대한제국 황태자 | ||||||||||||||||||||||||||||||
1895년 5월 14일 ~ 1919년 9월 26일 | |||||||||||||||||||||||||||||||
대한제국 황태자 | 대한제국 대황제 섭정 | |||||||||||||||||||||||||||||||
1919년 3월 5일 ~ 1919년 9월 26일 | |||||||||||||||||||||||||||||||
대한제국 제2대 황제 | |||||||||||||||||||||||||||||||
1919년 9월 26일 ~ 1943년 10월 18일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 휘는 청(壇)이며, 연호는 광형(光亨), 묘호는 열종(烈宗), 시호는 문황제(文皇帝)이다.
본래 자유주의 성향이 강해 부황과 갈등을 빚었으나, 한노전쟁에서 군공을 세워 부황의 인정을 받았고, 성조가 고령으로 쓰러지자 섭정으로써 계엄령을 선포하고 3.1 폭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여 성조의 부재로 인한 제국과 조공국들의 혼란을 봉합해 제국의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받았고 성조가 붕어하자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이후 의회제도를 무력화 하고, 황제 중심의 전제정을 확립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
이렇듯 열종의 치세는 어일신 이후 팽창한 국세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로, 국가적으로 위세를 떨쳤다는 것과 문화적으로 번성하여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살기 좋은 시대였다.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이 시대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으며, 광형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살린 창작물들도 많이 나오는데 이를 광형 낭만이라고 한다.
생애
출생
1879년 성조 태황제 이엽의 장남이자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만 2세의 나이에 왕세자에 봉해졌다. 어린 시절 부터 아버지 성조가 다혈질인것에 비하면 온후하고 점잖아 성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성조가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문신에 가까운 타입으로 경전과 서양의 지식, 잡기에 모두 능했으며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높았다고 한다. 이는 열종의 아들들인 신종 효황제와 익종 환황제 또한 비슷했다.
어린 열종은 강학원에 입학하여 기초 군사학을 익혔다. 7살 때는 성조 앞에서 군복을 빼입고는 거수 경례를 하며 군대식 보고를 하는 시늉을 하며, 부황을 기쁘게 했다. 열종은 프랑스어에도 능통했으며, 수학과 과학, 지리학, 역사, 예술도 빠르게 깨우쳤다.
청년기
열종은 젊었을 때부터 군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프로이센식 군주정을 외면했고, 당연히 성조와 사이가 서먹했다. 하지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남다르다더니 아라사를 상대로 잇따라 전쟁을 벌일 때, 열종은 그의 군사적 능력을 마음껏 입증해 보였다. 전쟁이 끝나고 황궁으로 돌아와 성조를 처음으로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관대한 전후처리를 주장해 성조의 속을 긁었다.
이처럼 부황과는 다른 서구식 사고를 가진 열종은 자신이 황위에 오르면 자유로운 입헌군주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런데 토막파 잔당들이 내지에 잠입하여 성조의 암살과 테러를 시도하고, 여기에 휘말린 성조가 저격당해 쓰러지자, 일본과 외지에서 대규모 반정부 폭동이 발생하였고, 성조의 저격 미수와 연이은 혼란의 책임을 둘러싼 내각과 의회의 극한 대치로 대한제국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성조가 쓰러진 직후 열종은 섭정의 자격으로 대한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때 열종은 아버지와 제국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며, 열종이 그토록 기피했던 전제국가의 차기 황제로써의 역할을 뽐낸다. 열종은 섭정에 취임한 즉시 어전회의를 소집하고, 내지와 외지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지에 잠입한 토막파 잔당들의 테러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또한 주일제국군을 통해 무자비한 토막파 진압에 나서는 한편, 5개 사단을 일본에 증파하여 3.1 폭동을 조기에 진압하는데 성공하는 등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여주며, 제국의 후계자로써 전세계에 자신의 명성을 각인 시켰다.
이렇게 열종은 자신의 능력을 냉혹하게 증명했고, 황태자가 너무 유약하다며 우려하던 중신들도 열종이 3.1 폭동 진압에서 보여준 냉정하고 행동력 있는 모습에 열종이 성조의 뒤를 이을 전제군주라는 점을 실감했다.[2] 이후 같은해 9월 성조가 저격 사건의 휴유증으로 사망하고 열종은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이 때부터 열종은 변하기 시작한다. 위 사건으로 열종은 자신의 감정보단, 제국을 지키기 위해선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제거해게 된다. 부드럽고 관대했던 황태자 시절과는 전혀 다른 비정하고 냉혹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즉위
수신제가
1919년 9월 26일, 열종은 연호를 주역에 나오는 합홍광대 품물광형(含弘光大 品物咸亨. 품은 것이 크고 넓으니, 만물은 모두 형통하다.)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광형'으로 정하여 즉위했다.
열종이 보위에 올랐을 때 사정은 불안한 점이 많았다. 3.1 폭동의 여파로 번국인 일본은 혼란스러웠고, 내지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각은 제국의회와의 갈등 탓에 잔뜩 위축되었고, 제국의회는 정쟁으로 마비되었고, 권신들은 유능했지만 자신들의 이권 확대에만 몰두했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열종은 무자비하게 대응했다. 온갖 꼬투리를 잡아 권신들을 탄압하고, 제국의회 의원들을 숙청하였으며, 열종 치하에서 정치인 및 권신들이 대규모로 의문사 당하였다. 열종은 이렇게 정적들을 탄압하고 유배시키는 등 어쩌면 악랄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황권을 강화했다.
열종은 관료들을 황제의 통치를 위한 것, 철저히 왕권에 필요한 소모품 정도로 봤다. 그래서 대신들과 권신들이 크게 반발하였지만, 반발했던 권신들은 죄다 찍어 눌렀고,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유배당하거나, 의문사 하였기에, 관료들은 철저하게 열종의 말에 복종했다.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열종은 대한에서도 신해혁명과 10월 혁명과 같은 국체를 부정하는 불온한 움직음 우려하여 치안유지법을 제정한다. 초기에는 공산당이 적용의 대상이었으나 점차 사회주의와 좌익, 노동 운동과 종교계, 민주주의 단체로까지 그 적용대상을 넓혀 갔다. 결국에는 이 법령은 그 어떤 형식의 반정부운동도 탄압하는 구실로 적용되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은 열종의 과격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대한은 끊임없이 성장했다. 열종은 1925년에 한인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보험법을 제정하면서 체제부정세력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은 노동자들을 포섭해 체제안정을 도모했다.
체제안정을 도모하던 열종은 조선 말 잦았던 재해의 극복을 위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시행했다. 열종의 칙령으로 대규모 치수공사가 진행되었지만, 1925년 7월에 발생한 광형 6년 폭우 사태 당시 4차례의 대규모 폭우를 막을 수 없었다. 이때 이재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나,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기도 했다.
다만 열종의 숙청은 중요 관료가 아닌 실무자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끝났다. 숙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황권 확보였기에, 왕권을 침범할 가능성이 없거나 그럴 야망이나 능력 자체가 없는 자들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 최소한의 신뢰성은 확보할 수 있었다.
치국평천하
외치에서는 부황 성조가 직접 한청전쟁, 권비의 난 진압과 한노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을 감행하고 외정에 직접 관여하여 성과를 내면서 내치도 돌본 것에 비교하면 철저하게 내치와 문치(文治)에 비중을 두며 동아에 대한의 질서를 뿌리내려 확장에서 수성으로 전환하는 시기가 되었다.
열종은 즉위 직후 혼란을 수습한 직후, 번국의 질서를 바로세운다. 우선 3.1 폭동이 진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막파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기 위해, 서수평정작전을 단행하여 2년만인 1921년에 마무리했다. 열종실록에 따르면 토막파 세력이 잔존하는 것으로 의심되던 부락을 완전 초토화 시키켰다고 한다. 이때 초토화된 부락에는 한국의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이주하여 일본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1차대전 참전의 보상으로 남양군도를 식민지로 삼는데 성공한다.
다만 열종의 외치는 서백리 출병의 실패로 인해 고평가를 받지 못한다. 당시 열종은 서백리의 광활한 영토를 점령하나 미국의 견제, 병력 손실과 사기 저하, 파르티잔의 저항으로 1922년 연해주에 괴뢰국인 아라사국을 세우는 것에 만족하고 사할린 북부를 제외한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1925년 사할린에서도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나 엄청난 전비와 대군을 투입하였음에도, 3,000~5,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유일한 성과인 아라사국은 대한제국의 철군 이후 손쉽게 무너져 열종도 실패를 시인했다.
협화만방
1929년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증가하자 열종은 대공황 시기 긴축 재정을 유지하며 산업 합리화를 추진하였다. 1931년 대한은 영국에 이어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원화 약세와 함께 무역을 확대하고 식민지 및 종속지역과의 무역을 급속히 확대함으로써 대공황 이전의 GDP 수준을 회복하였다.이를 통해 서구 열강에 비해 일찍 경기를 회복했지만, 그 과정에 서구의 블록 경제와 대립하는 측면이 있어서 열강의 비판과 제약을 받았다. 이에 열종은 이른바 자력갱생 운동을 전개하여 경제블럭을 공고히 하였다.
이 당시 대한은 경제적 혼란으로 영토 팽창론과 극우파가 부상하여 5.16 사건처럼 테러나 정변 시도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이 여럿 발생했다. 물론 열종은 광형옥사로 극우파들을 무지막지하게 숙청하고, 영토 확장론을 일축했다. 이에 따라 2차대전이 발생할 당시 열종은 엄정 중립을 선언하고, 열종 사후 신종이 전쟁 막판에 미국에 줄을 서서 연합국 쪽에 붙었다.
사망
열종이 어지간하면 내각에서 처리하던 일도 편집증적으로 자신이 전부 처리하였기에 열종의 몸은 엉망이었다. 게다가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정치 혼란, 사회 문제들을 자신이 일일히 수습하며 열종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말년엔 순현문황후와의 다툼으로 육체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더더욱 정무에 열을 올렸다.
결국 1943년 10월 11일 인정전에서 집무를 보던 중 쓰러졌고, 10월 14일 다시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자 마자 다시 밀린 정무를 보며 이미 쇠약해진 몸이 더욱 위독해져 10월 17일 다시 쓰러져 10월 18일 오후 3시경 창덕궁 대조전에서 향년 64세를 일기로 황후와 황태자를 비롯한 황족들이 보는 앞에서 붕어한다.
평가
열종은 외치보다는 내치에 집중하여 외적으로 보여준 성과가 부황에 비해 미비하고, 치세 중에 일으킨 숱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당대부터 명군으로 평가받았다. 열종의 치세에서 잔혹한 숙청은 빈번했지만, 성조 시기 과팽창 되었던 식민지들을 안정화 시켰고 국제정세에 대한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무리한 군국주의와 팽창보다는 내치에 힘써 성조 사후 단명할 수 있었던 대한의 패권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열종의 치세는 오로지 열종 본인과 같이 유능한 황제가 국가의 모든 사무를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전제 왕권과 열종 본인의 능력에만 너무 의존한 정치였다는 게 오늘날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부 경조와 성조가 막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전제군주로 인식되는 것과 달리. 경조는 왕 - 의정부(대신) - 삼사(대간)로 대표되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를 복원하였고, 성조는 이를 대한의 상황에 맞추어 황제 - 내각 - 제국의회로 개편하여 삼각 상호 견제 체제를 완성한 것과 달리 열종은 3.1 폭동을 거치며 이러한 통치구조에 대한 불신을 가졌고, 결국 과거 명, 청 시대의 천자들처럼 황제가 국가의 모든 사무를 직접 결정하는 독재군주정으로 변모시켰다.
물론 열종 개인의 능력에 의존한 체제인 만큼, 열종 본인이 황제로 재위하던 당시에는 정상적으로 기능하여 광형 낭만이라는 대한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재군주정은, 후손들 가운데 열종 본인에 준하는 능력의 황제가 나오지 않는 이상, 측근이나 외척들이 발호하기 너무나도 유리한 구조였다. 물론 열종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어서 비서성을 대폭 확장하여 전제황권을 보위하게 했지만, 아들이자 후대 황제인 신종의 말기 국정에 손을 놓자 관료들의 기강이 무너졌고 비선 실세들이 등장하며 정치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러한 문제는 고종대에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정치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야 겨우 해결된다.
여담
열종의 휘인 '壇'은 흔히 단 단자로 읽어지며 대부분의 백과사전도 '단'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단'이라는 발음은 태조의 휘인 단(旦)과 발음이 같아 성조가 열종의 휘를 정할 때, 아에 같은 한자를 쓰는 '소제할 선'이라는 한자로 정하였고, 즉위 이후 피휘를 위해 '소제할 선'의 발음을 '청'으로 고쳤다. 이는 당대부터 사전의 주석에 실렸으며, 이에는 어휘(御諱)라는 주석도 달려있다. 이는 피휘의 전례로 보건데 '선'이라는 발음이 들어간 단어를 전부 개칭하려 했으나 선이 들어간 단어가 너무 많아서 결국 그냥 열종이 소제할 선자의 피휘를 위해 '선'이라는 발음을 '청'으로 고쳤다. 즉, 열종은 피휘를 위해 단에서 선으로, 선에서 청으로 두번이나 한자를 고친 셈이다.
열종 즉위 당시 피휘 문제를 둘러싼 이후에도 대한제국에서 피휘는 계속 유지되었으나, 복잡하고 번거로운 관례에 학을 떼던 고조가 즉위하고, 피휘가 너무 번거롭고 행정적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아에 피휘라는 제도 자체를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피휘러 가장 불편할 시민들이 '아름다운 고금의 전통을 페지하지 말아 달라'며 대규모 집회와 만인소, 유소를 벌이자, 어쩔 수 없이 피휘중 가장 수위가 약한 방식을 적용하여 어휘(御諱)의 음만 바꾸어 읽는 형태로 피휘의 관례를 수정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예를 들자면 고황제의 휘인 旦(단) 자를 피휘하지 못하는 경우, 같은 뜻인 朝의 발음인 조로 읽는 경우가 빈번한 것처럼 말이다.
가계
- 증조부 : 풍계대원왕(豐溪大院王, 1783년 ~ 1826년)
- 증조모 : 광산대원비(光山大院妃, 1803년 ~ 1864년)
- 정후 : 순공문황후(純恭孝皇后, 1874년 ~ 1898년)
- 계후 : 순현문황후 (純賢孝皇后, 1876년 ~ 1942년)
- 딸 : 선경공주(善敬公主, 1909년 ~ 1975년)
- 아들 : 신종 효황제(理宗 順皇帝, 1915년 ~ 1970년)
- 며느리 : 경신효황후(敬神孝皇后, 1913년 ~ 1998년)
- 아들 : 익종 환황제(翼宗 桓皇帝, 1912년 ~ 1979년)
- 며느리 : 승명환황후(勝明桓皇后, 1920년 ~ 1988년)
- 아들 : 선정의녕대원왕(宣靖懿寧大院王, 1920년 ~ 1955년)
- 며느리 : 단온의성대원비(端溫義成大院妃, 1917년 ~ 1967년)
- 아들 : 제경군(堤敬君, 1925년 ~ 1985년)
- 며느리 : 제경군부인(堤敬君夫人, 1928년 ~ 1995년)
- 딸 : 선의공주(善義公主, 1927년 ~ 2010년)
대중 매체에서
어록
개인적인 감정은 없소. 경덕, 엄연한 나랏일이잖소. 열종이 어전회의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죽여버리겠다고 할 당시 총리였던 이완용이 나랏일은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서는 안 된다며 조언하자 한 말 |
관련 문서
둘러보기
대한제국 황실 | |||||||||||||||||||||
---|---|---|---|---|---|---|---|---|---|---|---|---|---|---|---|---|---|---|---|---|---|
[ 펼치기 · 접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