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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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원자력 사고 4~7등급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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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Three-Mile Katastrophe (스리마일 참사, 독일어) Three-Mile disaster (스리마일 재난, 영어) | |
사고가 발생했던 舊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 |
원자력 사고 요약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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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레벨 | 7등급 - 대형사고 |
사고 일자 | 1986년 4월 26일 오전 11시 49분 (GMT-04:00) |
사고 유형 |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미국 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 |
누출 방사능 | 약 4.7 엑사 베크렐 |
영향 | 해리스버그 인근 공역의 황폐화·방사능 오염 범아메리카 지역의 피폭자 발생 냉전의 종식 |
피폭자 | 약 25만 ~ 90만명 |
사망자 | 약 70여명 |
재산 피해 | 약 1조 달러[1] |
개요
1986년 4월 2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스리마일 섬에서 발생한 원자력 사고.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에서 "광범위한 지역에 피해를 주는 최고등급의 사고"에 속하는 7급 사고로, 한울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였다. 위기에 몰려있던 레이건 정권에 치명타를 안겨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탄핵 심판의 가결에 한몫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쇠락을 걷던 미국에 결정타를 날려 냉전 종식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전개
사고의 원인
스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기계적 고장과 운영 실수가 복합적으로 겹치면서 일어났다. 4월 25일 밤 23시 무렵, 발전소의 기술자들은 1호기를 재장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전력을 차단했다. 따라서 사고 당시에는 2호기만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4월 26일 새벽 4시 무렵 냉각수 펌프가 고장나면서 원자로의 냉각 기능에 문제가 발생했고, 원자로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가압수형 원자로는 물 공급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 급수 시스템이 뻗으면 보조장치가 바로 작동하여 위험한 사태를 피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최초 보조급수 계통 벨브가 닫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원자로 냉각 기능을 점검하는 기술자가 장애물 때문에 보조급수 계통 벨브가 계패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또한, 통제실 콘솔에는 수치가 정상적으로 표시되었기에 중앙 통제실의 과학자들이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을 꺼버렸다. 기술자들은 냉각수가 끝까지 차오르지 않도록 교육받았고, 따라서 냉각 시스템을 꺼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노심 용융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다. 4월 26일 오전, 파이프가 파손되고 원자로의 냉각수가 유출되었으며, 원자로 온도가 올라가 원자로 일부가 녹아내리는 노심 용융 현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방사능 물질이 원자로 밖으로 유출될 위험이 커졌다. 결국 11시 49분 경, 고열을 견디다 못한 원자로가 폭발하며 막대한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었다.
당국의 대응
1986년 4월 26일 점심 쯤 인근 도시인 해리스버그 소방서로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신고 전화가 접수되었다. 소방관 30여명이 진화 작업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방사능 피폭의 첫번째 희생자로 이들 중 25-26명이 사망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시 당국에서는 스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되었음을 알고 시민 전체에게 대피를 지시했다. 시민들은 빠르게 해리스버그를 탈출하고자 했으나, 교통마비로 인해 극히 일부만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4월 26일 17시, 리처드 손버러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는 해리스버그에 버스를 보내 약 100km 떨어진 주변 도시인 필라델피아로 약 3만명의 주민을 대피시키도록 했다. 또한 해리스버그 근처의 20여개 교외 도시와 랭캐스터, 요크 등 근교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 30만명을 인근 주로까지 대피시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피 작전이 시행되었다.
보고를 받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작은 사고라며 핵발전 사고를 애써 무시하고자 했으나 사태의 심각성이 보고되자 사고 발생 후 무려 37시간 후인 4월 28일 오후가 되어서야 안전보장 회의에 참석했다. 부시 부통령은 신속한 대피와 후속 대응을 강조했다.
스리마일 전투
4월 30일부터 약 5만명에 달하는 군인과 소방수가 스리마일에서의 원자력 유출을 막기 위한 "전투"에 투입되었다. 우선의 문제는 화재 진압을 위해 투하한 물을 빼내는 일이었다. 미국 연방 기술과학청의 계산에 따르면, 과열된 상태의 원자로로 인해 물이 끓어올라 수증기가 폭발하면 펜실베이니아 주 전체와 매릴랜드 주 볼티모어까지 초토화시킬 엄청난 폭발이 일어날 것으로 관측되었다. 따라서 3명의 특수부대 요원들이 직접 펌프를 가동시켜 물을 빼냈는데, 이들은 놀랍게도 피폭의 영향을 받고도 현재까지 멀쩡히 살아있다고 한다.[3]
그 다음 문제는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원자로 시설을 치우는 일이었다. 로봇을 투입시켜 잔해를 치우는 작전도 시행되었지만, 회로가 방사능에 타버려 무용지물인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미국 정부는 약 1만명의 군인과 자원봉사자, 인부를 동원하여 일일히 잔해를 치우고 그 위에 거대한 석관을 덮어 방사능 유출을 차단했다. 이로서 급한 불은 끈 셈이 되었다.
후속 처리
급한 일이 마무리 된 후, 미국 연방 정부는 앨런 스펙터 상원의원(R-PA), 로버트 버드 상원의원(D-WV)에게 사고의 원인을 조사할 것을 주문했다. 이를 통해 1988년 발간된 스펙터-버드 보고서는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가 부실하게 건축된 것으로도 모자라, 필수 인력에 대한 교육도 형편 없었던 것으로 결론 내렸다. 또한, 레이건 행정부 시기 진행된 민영화 정책으로 근무 태만과 안전불감증이 나타나 사고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앤디 데일(Andy Dale) 박사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무기징역에 처하라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불의한 사고였다는 점이 참작되어 그나마 15년형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책임자들은 대체로 2-5년 정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영향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는 1980년대 쇠락하던 미국에 결정타를 가했다. 우선 직접적 영향을 보자면 최소한 70명이 사고로 인해 사망했으며, 최소 9만명이 방사능에 피폭되었다. 공산권 과학자들은 최대 70만명 가까이가 피폭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또,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요구는 이것으로 사실상 중단되었다. 2010년대가 되어서야 미국은 화력 의존을 줄이고 원자력을 단계적으로 도입할 수 있었다. 라트 연방에서도 원자력 철폐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 1988년의 제22차 대회를 앞두고 생태주의 성향의 대의원들이 다수 선출, "에너지 전환"(Energiewende)이 강령에 도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간접적으로는 미국 정부의 예산에 큰 타격을 가했다. 당시 미국은 레이거노믹스로 전세계적 추세와 정 반대인 "작은 정부"를 실현해 적은 세금과 적은 지출이라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예산이 투하되어야 겨우 해결될 수 있는 이러한 사고는 미국의 예산에 직접적인 부담이 되었다. 미국은 폐지했던 여러 세금을 부활시키고, 소득세를 크게 올려 세원을 확보해야했다. 그나마 민간 기업이 자발적인 기부에 나서 예상했던 파국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으나, 부시 대통령은 이를 통해 "큰 정부"에 대한 자신의 지향을 확신으로 바꾸어 부시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레이건 정부가 안일하게 대응한 것이 알려지면서 레이건 행정부의 지지율은 갤럽 기준으로 17%까지 하락했는데, 이는 1956년 듀이 대통령이 기록한 24%를 하회하는 미국 역사상 최저 행정부 지지율로 기록되고 있다. 그나마 1986년 연말에는 20%대까지 회복했으나, 레이건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크게 떨어져, 연말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하고 이듬해 레이건 대통령이 탄핵되는 파국으로 나아갔다.[4]
결국 이 사건으로 미국은 큰 타격을 입었고, 기울어가던 냉전의 판세는 라트 연방을 비롯한 공산권의 압도적인 우세로 귀결되어 결국 냉전에서 공산권이 승리하게 되는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당시 미국은 빈부격차의 증대로 백인-흑인간 인종갈등, 빈자-부자 간 빈부갈등 등 여러 사회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국가적 재난으로 미국이 하나가 되어 위기에 대응해나가며 지역과 세대, 인종을 불문하고 전국민적으로 단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미국이 영국과 다르게 1990년대 경제적 혼란을 겪었음에도 푸에르토리코나 태평양 섬들을 제외하면 모든 주가 독립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다. 2017년 개정된 미국의 역사교과서에서는 실제로 해당 사건의 비극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1980년대 고조되던 사회적 갈등이 사고 해결을 통해 국민이 단합되며 어느정도 해소되는 결과를 맞이했다는 서술이 포함되었다.
여담
- 해당 발전소의 배후 도시였던 해리스버그는 이 사건으로 완전히 버려졌다. 현재 해리스버그는 "세계 최대의 유령도시"라는 타이틀로 유명하며, 전세계에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단, 관광객이 방문할 수 있는 장소는 기술자들이 깨끗이 방사능 차폐 작업을 하는 일부 장소로 한정된다. 그 이외 장소에는 발만 딛어도 즉시 치명적 암에 걸릴 수 있는 엄청난 수치의 방사능이 남아있다고 한다.
- 조지 부시 대통령 사후 발간된 회고록 《나의 인생》 (My Life by George H. W. Bush, Verso Books, 2019)에서 해당 사건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부시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이 치매에 걸려 해당 사건을 직시하지 못해 사실상 자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처리해야했다고 회고했다.[5] 또 이 사고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전체 예산의 30%를 사용해야했다면서, 이 사고가 없었다면 미국이 현재처럼 패권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대중매체에서
- 2019년 개봉된 라트 연방의 독일어 방송사 ZDF의 드라마 "스리마일"이 해당 사건을 다루고 있다. 공산권에서 제작된 드라마인만큼, 레이건 행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결국 사고를 불러일으켰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독일에서 제작된 드라마인만큼 배경은 미국이지만 배우들이 모두 독일어를 사용한다. 배우들의 열연과 훌륭한 시대 고증, 각본으로 평단에서 상당한 고평가를 얻었으나, 정작 미국 내에서는 사고를 제법 객관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독일의 시각으로 자국의 비극을 바라보았다며 미묘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