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라트 연방의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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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사하로프 Andrei Sakharo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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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 |
197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
본명 | 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사하로프 (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Са́харов) |
출생 | 1921년 5월 21일 |
러시아 제1공화국 모스크바 | |
사망 | 1991년 12월 10일 (향년 70세) |
러시아 모스크바 | |
국적 | 러시아 제1공화국 → 라트 연방 ( 서러시아 SAR) |
학력 | UniKM 베를린 (물리학 / 학사) UniKM 베를린 물리 연구소 (물리학 / 박사)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소속 정당 | 무소속 |
수상 | 리프크네히트상 (1954년) 룩셈부르크상 (1958년) 룩셈부르크훈장 (1960년) 노벨물리학상 (1963년) 노벨평화상 (1975년) 최고영웅훈장 (2002년, 사후 수여) |
개요
라트 연방의 핵물리학자, 인권운동가, 정치가. 몇 안되는 노벨상 2회 수여자이다.
생애
핵물리학자로서
1921년, 러시아 공화국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사하로프는 1938년 모스크바의 물리 대학교에 진학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2학년에 수학을 중단하고 서부전선에 투입되었다. 1942년, 민스크 전투 도중 포로로 잡혀 한동한 프로이센의 감옥에 갇혀있다가 1945년 포로 교환 협상을 통해 석방되었다. 그러나 라트 연방 측에서 학비를 전액 대주겠다는 제안을 하여 1946년 모스크바를 떠나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 베를린의 물리학과로 편입하였다. 1948년, 마르크스 대학교 물리학부 대학원에 진학했다. 1952년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베를린 에너지 연구소(BEI)에 들어갔다.
1948년부터 1968년까지 약 20년 동안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했고, 라트 연방 핵무기 계획에 참여, 라트 연방 최초의 수소폭탄인 RDS-6s와 세계 최강의 단일 핵무기로 유명한 카이저 봄베를 설계했다. 당시 그가 핵개발에 끼친 공로는 지대해서,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렸으며, 일찍이 라트 연방 내에서 주목받아 3차례나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을 수여받고 그 외에도 룩셈부르크상, 리프크네히트상, 룩셈부르크훈장까지 수여받았다. 1963년, 그는 물리학자로서 최고 영예인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반체제 인권 활동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공산권의 모범적인 애국자였는데, 100메가톤 수소폭탄을 장착하고 적 항구로 돌입하여 폭발해 적 함대와 항구, 인근 해역을 동시에 날려버리는 "원자력 추진 순항핵어뢰"를 만들자고 해군 제독에게 주장했다가 "그건 너무 무자비한 대량학살무기"라는 비판을 듣고 부끄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점차 관료주의화 되어가는 라트 연방의 모습에 실망하고 체제에 비판적이게 되었다. 점차 체제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던 그는 괴벨스에 반대하는 "200인의 편지"에 서명했고(1954년) 3년 후인 1957년에는 너지 임레의 헝가리 개혁에 지지를 보냈다.
다른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핀란드 북극지대로 유배를 보내거나 스웨덴, 유고슬라비아 등지로 망명을 할 수 있도록 당에서 손을 썼겠지만 워낙 유명한 인사였던지라 당에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로 추방하자니 주요 핵기술자를 쫓아내는 것은 안보적인 측면에서 리스크가 컸다. 그렇게 당과 사하로프 사이에 마찰이 심화되던 중, 1968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사하로프는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며 자신이 가르치던 대학생들과 함께 당을 비판하는 가두행진을 벌였다.[1] 분노한 당 지도부는 그를 당에서 제명했고 그동안 수여된 상과 훈장을 박탈했다. 또한, 벨라루스에 있는 안전가옥에 연금시켰다.
정신박약아이자, 극좌적 선동꾼인 사하로프는 자신의 모든 반역행위로써 자신을 인민과 국가의 반역자로 몰아넣었다. 『전진』, 1969년 10월 10일 호 |
인민의 이성이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인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의 이름으로 기록된 모든 역사의 의지는 그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한자도 남겨 두기 않고 지워버릴 것이다. 『인민의 관찰자』, 1970년 2월 7일 호 |
복권과 메모리알 활동
이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대학생들의 큰 반발을 샀으며 결국 1974년 헤르베르트 프람 서기장은 그에 대한 연금 조치를 취소하고 그의 취소된 수훈을 복구시켰다. 하지만 사하로프 본인이 복당을 거부했다. 그는 1972년 베를린 관구를 대표하는 최고 라트 의원으로 출마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는데, 당적이 없는 무소속 후보자 중에서는 최고 득표율이었다고 한다. 이후 1976년 재선하였다. 1975년,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1976년 헤르베르트 프람에 의해 과학기술개발부 장관으로 지명되지만, 당 내에서 충분한 득표수를 얻지 못해 정작 인준에는 실패했다. 그만큼 당 내에서 그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다는 뜻이다. 실망한 그는 의원 직위를 사임하고 인권단체 메모리알을 설립하였다. 메모리알은 처음에는 학계에서의 인권 침해를 다루는 단체였지만, 이후 공산권 전체에서 수정주의와 관료주의에 의해 희생된 인민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세계 최대의 인권단체로 도약하게 된다.
말년과 사망
1980년 보수파 에리히 호네커가 집권하자 그의 활동에는 다시 제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같은 좌파 성향이었던 헤르베르트 프람 시기에는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호네커는 슈타지를 통한 도감청으로 그를 괴롭혔다. 감시도 시작되었다. 사하로프는 베를린 미테구에 있는 그의 자택을 드나들때 이전에 의식하지 못했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는 1982년 베를린을 떠나, 크림 국립대학교의 교수 직위를 수락하는 핑계로 서러시아 SAR의 그로즈니로 이주했다. 사실상 변방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두번째 유형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서도 감시는 그치지 않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메모리알 활동을 이어갔고, 호네커의 공격적 대외정책에 반대하는 단식 투쟁을 벌였다.
1988년, 보이트케 야루첼스키가 집권하자 그에 대한 처우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 냉전에서 승리하면서 라트 연방 지도부의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수십년만에 러시아로 이주해[2] 모스크바에서 칩거하며 살다가 1991년 사망했다.
평가
그가 사망한 후, 사하로프에 대한 활발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사하로프가 지지한 1968년 혁명의 세대는 그가 사망한 이후인 1990년대 사회의 주류 세대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사하로프에 대한 평가도 뒤바뀌게 된 것이다. 1998년, 니콜라스 네메트 서기장은 당의 이름으로 사하로프에 행해진 모든 불법적인 사찰과 감시, 인권 침해에 대해 사과하면서, 역대 라트 연방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메모리알 본부에 방문하였다. 2002년, 당은 그에게 "최고영웅훈장"을 사후 수여했으며, 묘지를 베를린 영웅묘지로 이장했다. 다만 이 결정은 가족의 반대가 있었기에 논란이 있었다.
물론 과학자로서의 업적도 매우 훌륭하며, 핵물리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9년, 그는 ARR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라트 연방의 인물" 5위로 선정되었다. 이는 과학자이자 러시아계로서 가장 높은 수치이다.
여담
- 러시아에서의 평가는 다소 미묘한 편이다. 본인이 러시아계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갖지 않은데다 어쨌든 2차 세계대전에서 조국을 멸망시킨 독일로 이민을 가 그곳을 위해 복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국에 비해 호불호가 조금 더 갈린다는 것일 뿐이고 러시아에서도 위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마찬가지라 "로씨야 2" 선정의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 투표에서 47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