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금의 시대 (개화)

Curio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월 20일 (월) 18:35 판 (황금의 그림자)

한국의 시기별 현대사
개화정기 천금의 시대 대공황기

개요

아, 대한의 거리마다 새 아침의 빛이 가득하다. 전차가 질주하고, 전등이 밤을 밝히니, 백성들의 얼굴엔 희망이 넘친다. 배움의 길로 나서는 발걸음이 경쾌하고, 새 시대의 바람이 모든 것을 깨운다. 민국이여, 이 빛나는 길이 너의 영광이 될지어다.
이광수, 「민국 30년」

천금의 시대(the Golden Era / 千金時代)는 한국에서 전반적으로 대전쟁기와 대전쟁 이후에 일어난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과 더불어, 갑신혁명 이래 정부에서 내걸은 표어인 서구화, 근대 시기의 낭만주의 등이 어우러지던 시기로, 당대를 살아가던 한국 대중들 입장에서도 혁명 이래 최고의 호황과 더불어 다양한 예술, 문화의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세계대공황이 발생한 1929년까지 약 15년간의 시기를 천금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배경

1884년 갑신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개화정부는 급진적인 서구화 및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국가 전반에 걸쳐 30여년간 서구 기술과 제도의 도입으로 빠른 성장을 거듭히였다. 또한 제1차와 제2차 극동전쟁이라는 두 차례에 걸친 국운을 건 전쟁에서 승리해 중국과 러시아를 제압한 결과,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다음가는 준열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국은 기존의 한영동맹에 따라 협상국의 편으로 대전쟁에 참가하였다. 한국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교주만에 대한 공략전에 참가하여 교주만을 점령하는 등 동맹국과 직접적인 충돌을 벌였으나 그 규모는 매우 작았다. 대전쟁의 주전장은 유럽이었고 머나먼 극동에는 그 포화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 덕에 한국은 전장으로부터 헌 발짝 비껴서서 대전쟁의 피해는 입지 않고 대전쟁의 이익만을 취하며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무역과 산업의 성장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의 경제는 전례없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전쟁으로 촉발된 전쟁특수 덕이면서, 동시에 신흥공업국인 한국의 기초역량이 튼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금의 시대 당시 한국은 경공업, 중공업, 화학공업, 무역업, 유통업, 금융업 등 농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업이 골고루 빠르게 성장하였다.

• 무역과 운수
천금의 시대의 경제호황은 기본적으로 수출 붐에 의해 촉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유럽 각국은 전쟁을 위해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였고 이로 인해 유럽에서의 각종 소비재 생산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더군다가 전쟁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의 탄약과 의약품 등의 수요량이 급증하였지만, 유럽국가들은 전례없이 엄청난 양의 수요를 감당할 만큼의 생산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 일본과 함께 유럽 시장에 생사, 면포, 포탄, 의약품 등 온갖 종류의 상품을 수출하였다. 이 덕분에 기존에는 매년 약간의 적자를 기록하던 한국의 무역수지는 1914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흑자로 돌아섰다. 또한 유럽의 시장 지배력이 현저히 역해진 틈을 타, 한국의 수출기업들은 남미와 호주 등의 새로운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유럽으로의 전쟁특수무역을 통해 한국이 얻은 것은 비단 무역수지의 흑자 뿐만은 아니었다. 유럽 국가들의 상선이 군에 징발되어 수송선으로 쓰이면서, 한국의 해운업 회사들은 해운 운임만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벌어들이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유럽의 식량 생산량이 감소하자 한국의 상사들은 만주[1]로부터 각종 곡물을 헐값에 수입해 유럽에 되파는 중계무역을 통해 중간에서 큰 이윤을 낼 수 있었다. 또한 수출품을 수송하기 위해 전국의 철도 총연장이 50% 이상 증가했으며 님포항, 군산항, 부산진항 등이 크게 성장했다. 이렇듯 대전기 한국의 대유럽 무역은 한국의 유통업과 해운업 그리고 기반시설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한우선, 대동상회, 장통상회 등의 운수, 유통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대기업의 반열에 든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 경공업
19세기 말부터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경공업은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그 성장속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하였다. 한국의 경공업 제품들은 성정하는 국내시장과 더불어,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 시장을, 그 이후에는 광란의 20년대를 보내던 미국 시장을 주 고객으로 삼았다. 당시 한국의 경공업 붐을 대표하는 업종은 섬유공업으로, 경성방직 등의 방직산업체들는 국내시장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중국 등 국외로 진출하면서 경공업 부흥을 이끌었다. 당대의 섬유공업 생산량은 전체 공업생산량의 4할을 차지하였다. 섬유공업의 약진에 힘입어 1915년 한국의 공업생산량은 농업생산량을 추월하였으며, 1918년에는 공업생산량이 농업생산량의 두 배에 달했다.

한국의 경공업은 비단 섬유, 의류산업 외에도 각종 소비재 분야에서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국내적으로는 새로이 생겨난 중산층이 각종 소비재의 고객이 되었고, 국외적으로는 총력전 체제로 인해 우선순위에서 밀려 소비재 생산량이 하락한 유럽국가들이 한국의 소비재 시장이 되었다. 이 시기의 비누와 치약, 라디오, 화장품 등으로 대표되는 소비재는 한국 국민들의 생활수준 상승과 중산층을 대표하는 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외에도 녹오의 풍부한 목재를 수입해 가구 등으로 가공하는 목제품업, 마찬가지로 녹오의 목재를 수입해 펄프로 가공하고 펄프를 또다시 종이로 가공하는 제지업 등이 천금의 시대에 크게 성장한 대표적인 경공업 업종이다.

• 중공업
천금의 시대 전까지는 한국 공업에서 경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정대적이었지만 천금의 시대를 거치면서 중화학공업이 성장하면서 공업에서 그 비중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다. 공업 발전의 기초가 되어 '공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제철업이 대표적인 예시다. 공기업인 한국철강이 건설한 관영 포항제철소와 비사제철소 뿐만 아니라 삼화의 삼척제철소, 부경의 원산제철소, 대동의 정주제철소 등이 새로 건설되거나 확장되었다. 이는 각종 중공업의 발전으로 인한 철강 수요량의 증가, 만주 지방의 철광 개발로 가능해진 값싼 철광석 공급, 철강업 부흥을 위해 입법된 정부의 제철지원법 등의 덕이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인하여 유럽의 기존 민간선박과 신규 선박생산이 민수에서 군수로 대거 전환되었고, 이로 인한 유럽의 선박 부족과 이를 파고든 한국 해운회사들의 대규모 사업확장으로 말미암아 선박 수요량이 폭증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여러 기업들이 앞다투어 조선업에 뛰어들거나 조선소를 확장했다. 대표적인 조선소로 거제조선소, 흥남조선소, 해주조선소 등이 확장되었고 이외에도 여러 소규모 조선소가 건립되었다. 엄청난 물량의 배를 수주받아 건조한 한국의 조선회사들은 선진적인 조선기술을 보유하게 되었고, 조선기술과 조선용량의 발전은 한국의 건함능력을 제고, 전간기 한국이 독자적으로 중순양함을 건조할 정도의 역량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 에너지·화학공업

당시 한국 최대의 화학공장이었던 흥남질소비료공장

경공업와 중공업의 부흥은 동력과 원료를 제공해 이를 뒷받침하는 전력공업과 화학공업의 성장을 불러왔다. 전력공업은 한국전력공사 등의 국영기업 위주로, 화학공업은 여러 민영기업 위주로 발전하였다.

공업의 비약적인 성장은 전력 수요량의 급증을 불러왔다. 이에 정부는 전력공급책을 강구하였고, 상공성 산하에 전력국과 한국전력공사를 설치해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정부는 산과 강이 많은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 수력발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압록강, 낙동강, 대동강 등 전국의 강에 보와 수력발전소를 설치하였다[2]. 한편 만주 지역으로부터 석탄을 수입하고 국내 무연탄광을 개발해 화력발전으로도 상당한 양의 전력을 생산하였다. 1917년 건설된 마포화력발전소를 시작으로, 1929년까지 전국에 17개소의 화력발전소가 건설되어 산업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화학공업은 모든 산업분야에 걸쳐서 각종 원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농업에 비료를, 제철업에 코크스를, 소비재산업에 초자(유리)를, 기계공업에 카바이드를, 식료품업에 설탕을, 건설업에 시멘트를, 제약업에 무수주정을 공급한다. 기존에는 대부분의 화학공업제품이 외국, 특히 유럽에서 수입되었지만 유럽이 대전쟁의 전화에 휩싸인 사이에 한국의 자본가들은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화학공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특히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가 국내에 풍부하게 매장되어있었기에 시멘트 공업이 빠르게 발전했다. 이외에도 비료공장, 제당공장, 유리공장 등 각종 화학공업공장이 전국 빠르게 증설되었다. 화학공업으로 흥한 기업으로는 제약회사인 동화약품, 화장품회사로 시작한 두산, 자기제조업에서 유리공업 등으로 확장한 최장수기업 삼천리 등이 있다.

• 기계공업
대전쟁은 한국 기계공업이 본격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경제적 계기를 제공했다. 세계 전쟁으로 인해 서구 열강의 제조업이 전쟁 물자 생산에 집중되면서 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반 기계 수요가 급증했다. 한국은 이 틈을 활용해 농업 기계와 공업 설비의 국산화를 추진하며 기계 부품 제작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농업기계류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농업 기계화와 함께 기계공업의 토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조립 기술과 부품 국산화가 이루어졌고, 이는 전쟁 후 한국이 독자적인 제조 역량을 확보하는 데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대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공황이 발생하기까지 한국의 기계공업은 아시아에서 유례없는 성장세를 보였다. 가장 두드러진 발전은 철도 차량 제조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1910년대 후반 한국의 국영철도기업인 한국철도공사는 최초의 완전한 국산 증기기관차를 제작하며 철도 산업에서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철도 관련 부품이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철도망의 확장은 기계공업을 더욱 활성화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동시에 금속 가공과 공작 기계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중소규모의 기계 공장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다. 선반[3], 밀링 머신 등 공작 기계의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른 제조업 분야의 효율성을 높였고, 이를 통해 전체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었다. 또한 1920년대 초중반부터는 계측기 등의 정밀기계의 국내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기계공업의 영역이 더욱 확장되었다.

산업용 기계 제작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선술한 섬유공업과 제지공업의 성장과 함께 관련 기계를 제작하는 전문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공장 설비의 국산화율이 높아졌다. 또한 발전소 설비와 같은 대형 기계의 제작 기술이 도입되면서 대규모 공업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압록강 수력발전소와 같은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는 한국 기계제조업의 기술 수준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한국산 기계제품이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본과 중국, 더 나아가 남미 등의 국외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 금융업
각종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과 유럽의 전쟁특수에 의한 엄청난 무역흑자는 국내의 자본 총량을 폭등시켰다. 이에 따라 그 자금을 관리하는 금융업도 크게 성장했다. 당대 3대 은행이었던 한성은행, 천일은행, 대동은행의 예치금은 1913년 대비 1915년에는 세 배, 1918년에는 다섯 배까지 불어났고 시중은행의 수도 늘어났다. 거기에다 전쟁으로 길잃은 유럽의 민간자본까지 안정적인 한국으로 유입외면서 한국의 자본시장은 활황을 맞이하였다. 은행들은 불어난 예치금으로 각종 산업에 투융자를 제공하였고 이는 산업 발전을 촉진했다.

• 여가산업
천금의 시대 동안의 여가산업의 발달은 무엇보다 도시화와 중산층 증가에 기인했다. 전간기 동안 한성, 평양, 동래 같은 대도시들이 근대적 인프라를 갖추며 성장하자, 새로운 소비 계층으로 등장한 중산층은 여가와 오락을 통해 현대적 여가를 즐기고자 했다. 이들은 주로 극장, 다방, 영화관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여가시설을 이용했는데, 이는 당시 도시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특히 극장에서는 전통적인 판소리나 창극뿐만 아니라 서구식 연극과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졌으며, 도시 시민들은 이러한 새로운 예술을 통해 여가 시간을 보냈다.

영화는 여가산업의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르러 영화관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카페와 다방은 당대 여가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서양식 카페는 단순히 커피와 차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사교와 담론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며, 문학과 음악 등 예술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4] 체육과 스포츠 역시 여가산업의 주요 부분으로 성장했다. 1920년대 이후 축구 등과 같은 서양 스포츠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며 스포츠 관람과 참여가 여가 활동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음악과 무용 같은 예술적 여가 활동도 대중화되었다. 전통적인 국악과 서양식 클래식 음악이 함께 공연되며 다양한 음악적 취향을 충족시켰다.

의회정치의 안착

선거제 개혁으로 참정권 확대

사회의 변화

• 서구적 가치관의 확산

민권이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연의 권리로, 누구도 이를 침해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 인간은 권리를 부여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권리를 가진 존재로 태어난다. 고로 민권의 창달은 단지 법과 제도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스스로의 존엄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된다.
안중근

서구적 가치관은 한국에서 19세기 말 갑신혁명과 민국창건, 개화정부의 급진적 개화정책 등을 거치며 점차 유입되기 시작했지만, 천금의 시대 동안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국제적인 교류 확대와 경제와 전반의 변화와 맞물려 발생했으며, 전텅적인 유교적 가치관과는 차이가 있는 새로운 사회적 인식을 형성했다. 이러한 가치관의 확산은 민주주의, 개인주의, 평등사상, 여성의 권리, 과학적 사고 등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와 의회정치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참정권 확대화 대중의 정치참여 증가로 이어졌다. 이는 천금의 시대동안 한국이 의회정치의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은 이른바 '신여성'이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계층을 만들어냈고, 자유로운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여성 권리 증진과 여성 참정권 운동이 전개됐다.[5]

과학적 사고방식과 실증주의의 확산도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였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유교적 가치관에 기반해 사회적, 자연적 현상을 설명하려 했으나, 서구적 과학기술과 이론이 유입되면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방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핟문적 발전에 그치지 않고, 산업화와 경제 정책에서도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서구적 가치관의 확산의 반대급부로, 기존의 유교적 질서는 힘이 크게 꺾였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공공연히 유교를 폄하하였고, 이승만 등 일부 기독교도 출신 정치인들은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 윤리를 토대로 한 서구적 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기독교입국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도시에서 서구 사상의 전파가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도시 지역에서는 기존의 유교적 질서가 붕괴하는 수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골 지역에서는 옛 유교적 질서가 상당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도시의 자유주의적 신질서와 농촌의 잔통적 구질서 사이의 충돌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 중산층의 증가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 사회는 전통적인 농민-양반 계층 구조에서 탈피해 새로운 사회적 계층, 즉 중산층이 빠르게 형성되었다. 중산층의 형성은 주로 산업화와 경제 구조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한국 경제가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으며, 이를 통해 기술자, 공장관리자, 전문 서비스업 종사자 등과 같은 새로운 직업군이 나타났다. 특히 기계공업, 조선업, 철도산업 등 공업의 성장과 함께 기술직과 전문직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노동자 계층과는 구별되는 중산층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했다. 또한 금융업과 무역업의 발달로 인해 은행원, 회계사, 무역상과 같은 상업 분야의 전문직도 크게 증가했다.

교육의 확산 역시 중산층 형성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와 대학이 설립되며 중등 및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이전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직업적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술학교나 전문학교에서 기계공학, 농업, 상업 등을 배운 졸업생들은 공공기관, 기업체, 학교 등에서 근무하며 전문성을 가진 새로운 계층으로 성장했다. 특히 1920년대에는 여성 교육도 활성화되어 여교사, 간호사, 은행원 등 여성 중산층 직업군이 등장했다.

도시화는 중산층의 생활 양식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간기 동안 한성, 평양, 동래와 같은 도시들이 산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중산층이 밀집한 지역이 되었다. 도시에서는 전통적인 농촌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생활 방식이 나타났는데, 중산층 가정은 근대적 주택에서 생활하며 전기, 수도, 가구 등 당대의 기준으로는 혁신적인 생활 편의시설을 이용했다. 이들은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며 현대적인 문화와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카페나 극장 같은 장소에서 여가를 즐기는 등 새로운 소비 문화를 주도했다.

• 교육의 확산과 고도화

1898년 평양에 설립된 대성중학교

전국적으로 기술학교와 전문학교가 설립된 것은 산업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한국은 철도, 조선, 전력, 기계공업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에 필요한 전문 기술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공업학교를 확충했다. 예를 들어, 평양과 한성에는 여러 대규모 기술학교가 설립되어 기계공학, 전기공학, 화학공학 등을 가르쳤으며, 이곳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은 전국의 공장과 발전소, 공공기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농업학교 역시 농업의 현대화와 농촌의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설립되었으며, 선진적 농업기술을 교육했다. 이러한 교육기관은 당시 한국이 자립적 산업국가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문교육 외에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초교육 역시 강화되었다.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소학교와 중학교의 수가 급증했고, 이는 전체 문해율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국가에 의한 청소년기 의무교육은 민족성을 확립하고 개화사상을 전파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또한 교육의 정점이라고 할 수 았는 고등교육기관의 설립도 두드러진다. 1897년 한성민국대학교가 개교한 이후로 전국에 6개의 민국대학교가 추가로 개교하였고, 이는 한국 고등교육의 기초를 이루었더. 대학교에서 배출된 고학력의 졸업자들은 수준 높은 지식을 가지고 인텔리 계층이 되었고, 장래에 한국을 이끄는 사회지도층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또한 국비유학생 선발을 텅해 매년 100명 이상의 학생이 서구 대학에서 유학하였고, 이들은 발전된 서구 학문을 한국에 들여오게 된다.

남녀 모두 교육기회 확댜의 혜택을 입었지만, 일부 교육 내용은 성별에 따라 달랐다. 남학생은 주로 수학, 과학, 공업기술과 같은 근대적이고 실용적인 과목을 중심으로 배우며 산업화의 기술적 요구에 부응하는 인재로 양성되었다. 반면 여성교육은 초기에는 주로 가사나 가정과 같은 전통적 여성 역할을 강화하는 과목이 중심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학생들은 간호, 교직, 회계 같은 직업적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며 근대적 직업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얻었다.

• 인구의 성장

금년 본국 인구는 삼천만에 이르러, 이는 25년 전보다 배가 된 수치입니다. 현 추세를 유지할 경우, 금후 40년 내로 인구는 억 단위에 달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인구의 급증은 노동력 확보와 같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여지가 있으나, 말튜스[6]의 논지에 의거하면 극심한 식량 부족과 같은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 미리 대책을 강구함이 가할 줄 보고드립니다.
재무성 월례보고서, 1918년 12월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경험했다. 1910년에 2200만명이었던 한국 인규는 20년이 지난 1930년에는 그 두 배에 가까운 4200만 명에 육박해 있었다.[7][8] 수도 한성의 인구는 1910년 40만 명에서 1930년에는 107만 명까지 치솟았다. 이는 근대적 의료기술과 공중보건 체계의 도입, 농업생산성 향상, 도시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의료기술과 공중보건의 발전은 인구증가의 핵심 원인이었다. 서구적 의학과 위생개념이 도입되면서 전염병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졌고, 유아 사망률은 크게 감소했다. 정부는 전국적으로 근대적 병원을 설립하고 의학 교육을 통해 의료 인력을 양성했다. 이와 함께 백신 접종과 상하수도 건설, 위생 캠페인 등이 대중화되며 콜레라,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의 확산이 억제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농촌지역에서 두드러졌는데, 전통적으로 높은 유아 사망률과 감염병으로 인해 낮았던 인구 증가율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외에도 경제성장을 통한 생활수준의 향상과 각종 캠페인을 통한 식습관의 개선 등 역시 인구증가에 영향을 주었다.

인구의 전반적인 증가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곤강과 영양상태 역시 개선됐다. 신기술을 도입한 식량 증산과 국제무역을 통한 식량 수입의 증가로 식량의 수급이 안정화되었고, 곡식 위쥬의 전통적 식단이 각종 반찬들을 포함한 균형잡힌 식단으로 변화하면서 단백질과 비타민, 지방 등의 섭취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 덕분에 구루병과 야맹증 등 영양결핍에 의해 유발되는 질병들의 발병률이 크게 감소했다. 또한 정부 주도의 소학교 무료급식제도가 도입되고[9] 이것이 전국의 소학교에서 시행되었다. 각 학교에 영양사가 파견되어 정부의 지침에 따른 맛은 보장하지 못해도 영양학적으로 균형잡힌 급식을 학생들에게 제공했고, 성장기 어린이에게 필요한 칼슘과 단백질 등의 영양소 공급이 원할해지면서 청소년들의 영양과 발육상태가 큰 폭으로 개선되었다.

• 도시의 성장• 교육의 확산과 고도화

한성 명동거리

한국의 도시 증가는 산업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은 공업화의 촉매제가 되었고, 전간기 동안 철강, 기계공업, 조선업 등의 주요 산업이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했다. 한성, 평양, 동래, 인천과 같은 기존의 대도시는 공업과 상업의 허브로 성장했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해 교통망과 통신망이 확충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산업도시와 무역도시가 형성되었는데, 광업과 중공업 중심의 흥남, 울산, 송림, 포항과 같은 도시들과 무역으로 흥한 목포, 남포, 군산 등이 그 예이다. 이외에도 나주, 대구, 의주, 함흥 등의 전통적 지역중심지들도 공업도시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도시들은 주변 농촌 지역의 과잉 인구를 흡수하며 노동력을 제공받았고, 이는 도시로의 인구 이동을 가속화했다.

도시의 확장돠 성장은 시 정부와 부 정부가 주도한 인프라 정비사업의 증가를 불러왔다. 전통적으로 궁궐과 관청 주변에 형성된 도시들은 공업화와 교통의 발전에 따라 그 중심이 철도역 인근 등으로 이동하거나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한성은 철도와 전차망이 확충되며 중심지가 옛 한양도성 내에서 용산 등 도성 밖으로 확대되었다. 도시 내에서는 근대적 주택과 초보적 형태의 아파트가 들어서고, 공공시설과 상업시설이 확충되며 도시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문화의 부흥

돈이 있는 곳에 문화가 있다.

천금의 시대는 1884년 갑신혁명부터 이어진 정부의 서구화 정책이 절정에 달한 한편, 대중문화 및 예술의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당대 주변의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안정성과 자유도가 높았던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은 이러한 풍조에 불을 지른 격이 되었는데, 한편으론 과도기적 시대의 특징상 일부 측면에선 한국적인 특징이 나타나는 문화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는 후대에서 "천금풍"으로 불리는 예술풍조가 자리잡는데에도 영향을 줬다.

• 영상매체
영화, 애니 1920년대는 한국 영화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영화 제작사로는 한성영화사, 조선영화주식회사, 동아영화사 등이 설립되어 국산 영화 제작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들 제작사는 초기에는 일본, 독일, 미국에서 도입한 기술과 장비를 사용했지만, 점차 한국 자체의 제작 기술을 발전시키며 독립적인 영화 산업을 구축했다. 영화 상영 공간인 영화관도 이 시기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1896년 인천에 설립된 최초의 영화관인 협률사를 시작으로 1914년에는 전국의 극장이 7개관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천금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 수가 폭증, 1929년에는 전국에 총 22개 관의 영화관이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초보적인 수준의 야니메이션이 제작되었으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 인쇄매체
라디오, 신문, 만화 제지기술의 발달과 상술한 제지업의 부흥으로 종이값이 하락하면서 신문과 서적 등의 인쇄매체가 널리 보급되었다. 신문사는 1910년 17개사에서 1920년 66개 사로 10년 사이에 4배 가까이 증가하였으며 신문 인쇄부수는 같은 기간동안 세 배 증가하였다. 신문의 확산은 정보 전달의 전국화와 소시민의 정치참여 증가에 기여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황색언론의 출현으로 가짜뉴스와 자극적 기사의 범람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엔 현재까지도 한국 최대의 출판사인 익문사 등 여러 대형출판사가 출현했우며 각종 서적 출판량도 수 배 증가하였다. 각종 전문서적과 기술서적의 발행 증가는 지식의 확산에 기여하였으며 외국의 문학과 철학, 사상서에 대중이 접근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시기다.[10]

• 스포츠
근대적 스포츠의 도입은 학교 교육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축구는 서구식 교육과정을 채택한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체육과목의 종목 중 하나로 선정되어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다.[11] 이외에도 페구, 배구 등의 간단한 구기종목들이 정규 교육과정에 편입되었다. 부유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일부 사립학교의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농구, 야구, 펜싱 등의 종목이,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배드민턴, 테니스, 발리볼 등의 종목이 확산되었으나 대중화되는 수준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1921년부터는 매년 전국 각지의 민국대학교의 축구대표팀 간의 축구 토너먼트(전국대학교축구대힝전)가 개최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으며, 이와 함께 대학교별 학생응원단도 생겨났다.

정부 역시 체육의 발전을 위해 상당한 투자를 하였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공립 종합움동장이 건설되었고 매년 중앙정부의 대한체육회 주도 하에 전국체전이 개최되었다. 뿐만아니라 정부는 1917년 대한올림픽위원회를 설립하고 한국 체육인들의 국제무대로의 데뷔를 후원했다. 한국의 올림픽국가대표팀은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이후 모든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국제 대회 경험은 스포츠 기술의 발전뿐 아니라 국민들의 애국심과 자부심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여러 기업들은 광고 효과를 노리고 여러 스포츠구단을 인수하거나 후원하였고, 이를 통해 유입된 자본 덕에 전문 운동선수와 프로 스포츠단, 스포츠 산업이 태동하였다.

• 의복

한국 최초의 양장점인 정자옥의 의류 광고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인의 의복은 크게 변화했다.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불리게 만든, 흰 색으로 염색한 한복은 점차 사라지고, 서양식 의복과 개량된 한복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남성복에서는 한복과 서구식 정장의 조화가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났아. 도시의 중산층 남성들은 주로 정장과 모자를 착용하며 근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추구했으며, 관공서와 회사에서는 양복이 필수 복장으로 자리 잡았다. 노동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개량한복이나 셔츠와 함께 빵모자(플랫캡)를 쓰는 문화도 생겼다. 또한 상황에 따라 한복과 양복을 번갈아 입거나 둘을 혼합해 착용하기도 하였다. 남성용 개량한복의 경우, 과도하게 넓었던 소매가 좁아지는 등이 변화가 생겼다. 한편 여전히 잔통적 문화가 상당히 남아있던 농촌에서는 한복을 변형해 실용성을 높인 작업복 스타일이 등장하며 의복의 기능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여성 의복은 전통 한복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개량이 이루어져 새로운 미적 기준을 제시했다. 치마 길이는 짧아지고 간소화된 저고리는 몸에 더 밀착되며 실루엣이 강조되는 디자인이 유행했다. 이는 여성의 활동성을 높이는 실용적 변화로도 설명되었으나, 동시에 현대적 미와 여성적 매력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더 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 여성상이 아닌 신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었다. 한편, 서구적 패션 요소도 여성복에 점차 영향을 미쳤다. 도시 여성들 사이에서는 서양식 블라우스나 치마, 모자와 같은 아이템이 인기를 끌었다. 저고리와 치마에 레이스나 새틴과 같은 서양식 장식이 더해지거나, 양말과 하이힐 같은 서구적 아이템을 한복과 함께 혼용하는 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 문학

문학이란 게 참 묘하지 않습니까?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낭만이니 현실이니, 온갖 사조의 이름이 머릿속을 가로지르더군요. 어떤 이들은 사랑을 찬미하고, 또 어떤 이들은 가난을 절규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 모두가 인간의 안간힘으로 보입니다. 삶을 붙잡으려는 낙관주의의 손길이나, 그 삶의 부조리를 까발리려는 신경향파의 손길이나 결국은 하나의 몸짓이지 않겠습니까. 그 틈에서 나는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는 그렇게 쓰고자 하는지 홀로 묻고 있습니다. 사영[12], 당신의 붓끝이 그리는 선처럼 나도 내 글로 세상의 선을 그릴 수 있을까요?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상이 구본웅에게 쓴 편지 중 일부. 당대 문학의 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대 한국 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사조는 낭만주의와 낙관주의였다. 이러한 문학적 경향은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강조하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근대적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이 사조를 따른 주요 문인으로는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이상화 등이 있다. 특히 이광수는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이자 국가발전에 대한 열망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무정》을 완성하여 새로운 문학적 경향을 이끌었으며, 김동인은 100냔 후의 유토피아적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 《아름다운 나라》를 집필해 한국의 첫 SF소설을 만들어냈다. 당대 낙관주의 문학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은근히 민족주의적, 애국주의적 뉘앙스가 작품에 내포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낙관주의가, 빛나는 황금기를 구가하던 민국에 대한 애국심과, 민국은 지나(중국)[13]나 아프리카 등과 달리 문명국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는 사회진화론적 우월감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분히 민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작품들도 등장했다.

경제적 호황과 도시화의 영향으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경제적 번영 속에서 풍요로움과 자유를 탐구했으며, 인간의 욕망과 관계를 과감히 다루는 경향도 나타났다. 도시 중산층의 형성과 소비문화의 확산은 인간의 사랑과 원초적 욕망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다만 이는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퇴폐적이고 저급하며 사회 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런 부류의 소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았기에 작가들은 대부분 가명을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대부분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정확한 저자를 알 수 없다.

한편 당시 비주류 문학이았던 신경향파 문학은 낙관주의, 퇴폐주의 문학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도시 빈곤층의 고통과 산업화의 부작용을 묘사하며,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을 비판하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같은 작품은 도시 빈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산업화 이면의 어두운 현실을 조명했다. 신경향파 문인 중 최서해, 한설야 등 일부는 사회주의 문인으로 변신해, 프로문학[14] 단체인 카프를 조직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문학은 노동자와 농민 계층의 각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통해 계급적 갈등과 약자의 연대를 강조했지만, 이는 1920년대 문학계에서 비주류, 소규모의 흐름으로 남았다.[15]

• 천금풍
천금풍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외부로의 진출

• 서구 열강과의 관계

• 북방으로의 진출
만주 출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중일과의 줄다리기

황금의 그림자

천금의 시대가 한국 역사에서 손에 꼽는 황금기였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황금의 찬란한 빛이 닿지 못하는 어두운 그림자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도시와와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업과 농촌은 후순위로 밀리게 되었다. 도시의 공장노동자는 분명히 힘든 일자리였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보수를 노동자들에게 약속했다. 이로 인해 많은 시골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고 농촌 지역의 인구 증가율은 하락했다. 이런 이촌향도 현상은 식량문제와 도시빈민문제를 야기했으며, 식량문제는 급격한 통화량 증가와 더불어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 농업·식량문제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농촌의 청년 인구 증가가 정체되변서 식량 증산에도 차질이 생겼다. 더군다나 국가 전체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였기에 식량 생산량에 비해 그 식량을 필요로 하는 인구는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1910년대의 전반적인 식량 가격은 상승세를 그렸다. 이는 전체 소득에서 식료품 소비비의 비중이 높은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식량부족과 식량가격의 상승은 정부 당국과 경제계에게 있어서도 심각한 문제였다. 식량가격이 오르면 노동자들의 생활비가 상승해 임금 증가 압력이 생기고, 이는 값싼 노동룍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에 타격이 될 것이 분명했다. 또한 식량가격의 상승과 이에 따른 임금의 상승은 사회 전반에 걸친 인플레이션을 촉발해 정부의 경제관리에도 큰 어려움을 줄 것이었다. 게다가 심한 경우 농민 소득과 도시노동자의 소득역전이 발생해 도시노동자가 농촌으로 돌아가는 역도시화 현상까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는 공업국가화 정책을 추진하던 정부에게 있어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상황이었다. 한편 정치인들에게 있어서도 식량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민중의 생활비 압박은 자신들의 표에 직결되는 사안이었기에 정치인들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였다.

정부는 농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에 자본을 투입하여 '산미증식계획'이라는 이름의 영농개혁에 착수했다. 농회, 산업조합, 산림회, 금융조합 등을 통합하여 농업협동조합(농협)을 만들고 그 산하에 농협은행을 설립해 농민들에게 저금리로 대출을 제공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국내 기계공업계와 화학공업계로부터 각종 영농기계와 화학비료를 도입하여 농업의 효율성을 제고, 식량증산을 이룩하는 것이 정부 정책의 골자였다. 또한 양곡관리법을 제정, 국가가 적정가격으로 양곡을 수매해 저가로 도시 시민들에게 공급하였다.[16] 정부 정책의 결과로 전반적인 식량 생산은 증가하였다. 호남과 해서, 관서 지방 등 비옥한 토지를 가진 지역에서는 농업이 노동집약적 영농에서 자본집약적 영농으로 전환되고 근대적 부농이 탄생하였다. 또한 도시 지역에서는 양곡가격이 하락하면서 전반적인 식량가격도 안정세를 보였다. 하지만 제한된 경작지에 비해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었기에, 식량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곳은 아니었다. 이는 한국이 훗날 곡창지대인 만주를 확보하기 위한 만주 출병을 단행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 도시빈민문제
도시 빈민의 주거 문제는 당시 도시화의 가장 큰 부작용 중 하나였다. 한성, 평양, 동래와 같은 대도시에는 급격히 증가한 인구를 수용할 적절한 양과 질의 주택이 부족했으며, 이에 따라 빈민들은 판잣집이 즐비한 달동네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임시 주거지는 제대로 된 건축 자재 없이 조립된 경우가 많아 안전성이 크게 떨어졌고, 화재와 붕괴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다. 또한, 공간이 협소하고 환기가 어려운 환경에서 다세대 가족이 밀집해 생활하면서 개인의 사생활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다. 이러한 주거 문제는 도시 빈민의 삶의 질을 심각하게 저하시켰다.

주거 환경의 열악함은 도시 위생 문제를 악화시켰다. 대부분의 빈민지역은 상하수도 시설이 부족하거나 전혀 없는 상태였으며, 쓰레기와 오물이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는 하천 오염과 전염병 확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판자촌에서는 특히 콜레라와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질병이 빈번히 발생했으며, 위생설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도시 빈민들은 이러한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열악한 주거환경은 치안문제와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빈민가에서는 절도, 폭력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으며, 공권력의 개입도 제한적이었다. 경찰력이 빈약한 상황에서 이러한 지역에 종종 법의 사각지대가 생겨 우범지대가 되었다. 우범지대의 출현은 도시 전체의 치안에 악영향을 주었다.

정부도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에 단기대책과 장기대책을 마련하고 실행하였다. 정부의 단기대책으로는 위생시설 설치와 경찰력 추가 배치가 있다. 정부는 각 지방정부를 지원해 빈민촌에 간이 변소와 샤워장을 설치하고 급수차를 파견해 깨끗한 물을 공급하였다. 한편으로는 빈민가에 기존보다 더 많은 경찰인원을 배치해 빈민가의 치안 문제를 누그려트리려 하였다. 이 덕에 문제의 심각성은 역화되었지만 일시적인 해법이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빈민촌을 철거하고 공동주택을 건설해 빈민촌 거주민들을 수용하는 장기대책을 채택했다. 공동주택에는 최소한의 상하수도가 갖춰져 있었기에 위생문제가 적었고, 공동주탹의 특징 덕에 범죄율오 하락했다. 다만 정부의 공동주택 공급량은 언제나 수요량에 미치지 못했고, 빈민촌 철거가 상당히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에 정부의 도시빈민촌 대책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물가문제

사회운동의 대두

천금의 시대 동안의 자유로운 사회분위기에 힘입어, 각계각층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보수성향 일간지 경향신문은 1922년 3월 16일호 사설에서 이러한 운동들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여 '4대 운동'이라고 이름붙였는데, 각각 노동운동, 농민운동, 참정운동, 여성운동이다.

• 노동운동

• 농민운동

• 참정운동

• 여성운동

황금기의 종말

관련 문서

각주

  1. 당시 만주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이었지만 중앙정부로부터의 통제는 느슨했다.
  2. 이는 가뭄과 홍수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었다.
  3. shelf가 아닌 Lathe로, 일종의 공작기계다.
  4. 특정 다방에 어떤 문인이 자주 나타난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를 만나려는 출판사 관계자와 기자, 그리고 독자들이 그 다방에 죽치고 앉아있기도 하였다.
  5. 의회민주주의의 발전은 <의회정치의 안착> 항목에서, 여성권 운동에 대한 내용은 <사회운동의 대두> 항목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6. 맬서스 트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토마스 맬서스를 의미한다.
  7. 이는 새로 병합된 영강 지역의 화인들은 제외한 수치다.
  8. 갑신혁명이 발생한 1884년의 인구는 약 1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9. [학교급식법, 1915년 제정]
    유럽에서의 대전쟁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는 것을 본 한국 정부는 유사시 균인으로 징집가능 여부를 판뵬하기 위해 청년층 남성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신체검사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상당수의 청년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체격을 가진 것을 확인한 정부는 청소년들의 영양상태와 발육을 개선하기 위해 소학교에서 급식제도를 도입했다.
  10. 이 시기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자본론 등의 사회주의 서적과 노동운동에 대한 자료가 들어오면서 한국의 사회주의 세력과 노동운동이 태동하였다. 후술된 사회주의 성향의 문인회인 카프도 이러한 시류 속에서 결성되었다.
  11. 축구는 필요한 비품이 골대 두 개와 축구공이 전부이기에 적은 비용으로 수업할 수 있어 교육당국의 선호를 특히 많이 받았다.
  12. 사영은 구본웅의 자(字)다.
  13. 당시 민간에서는 중국을 보통 지나(支那)라고 불렀다.
  14. 프롤레타리아 문학
  15. 프로문학이 국민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류 문학사조로 떠오른 것은 대공황이 발생한 1929년 이후의 일이었다.
  16. 이로 인해 정부의 재정부담이 증가하였으나, 당시 국가 전반적인 경제 활황으로 세수가 증가했기에 정부는 이를 부담할 여력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