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만덕산향우회

만덕산향우회 (토론 | 기여)님의 2026년 7월 13일 (월) 21:17 판 (제3장)

어흐

프롤로그

첫 번째 질문

"사랑은 선택일까요, 아니면 발견일까요?"

세상에는 답을 찾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있고, 답을 잃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있다.

호노카는 그 차이를, 스무두 번째 봄이 끝나갈 무렵에야 알게 되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가쿠슈인대학교.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벚꽃 잎이 흩날리고,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서는 신입생들이 동아리 홍보 전단을 나눠 주고 있었다.

도서관 앞 분수에서는 햇살이 부서졌고, 강의동으로 향하는 학생들은 각자의 미래만큼이나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유독 조용한 사람이 있었다.

호노카.

황실의 장녀.

신문은 그녀를 '황실의 보석'이라 칭송했고, 국민들은 그녀를 '국가의 얼굴'이라 불렀다.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한 번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호노카'라는 이름보다 먼저 따라오는 직함.

'전하.'

그 두 글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제나 보이지 않는 거리를 만들었다.

친구들도 조심했고,

교수들도 말을 골랐으며,

학생들은 그녀를 힐끗 바라본 뒤 시선을 거두곤 했다.

그녀에게는 늘 사람들이 있었지만,

정작 곁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새 학기 수강신청 화면에서 우연히 발견한 교양 과목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사랑과 인간관계의 철학』

호노카는 피식 웃었다.

사랑.

그녀와는 가장 먼 단어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 강의실에서 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제1장

사랑과 인간관계의 철학

"사랑은 선택일까요, 아니면 발견일까요?"

교수의 첫마디는 칠판보다 먼저 학생들의 마음에 적혔다.

강의실 안은 조용했다.

누군가는 노트북을 켰고,

누군가는 펜을 돌렸으며,

누군가는 아직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호노카는 아무 말 없이 공책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질문을 그대로 적었다.

"사랑은 선택일까요, 아니면 발견일까요?"

그 순간이었다.

철컥.

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

강의실에 들어온 학생은 짧은 검은 머리에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선이 머무는 사람이었다.

강의실에는 빈자리가 몇 없었다.

학생은 비어있는 자리를 창자 두리번 거리다가 호노카 옆자리에 앉았다.

"...실례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다시 보지 않았다.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첫 번째 수업은 플라톤의 『향연』이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플라톤은 사랑을 결핍에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동의합니까?"

학생들의 의견이 이어졌다.

"외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행복한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노카 옆의 학생을 바라봤다.

"당신은?"

학생은 잠시 생각했다.

"결핍은 시작일 수는 있지만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이해하려는 과정 아닐까요."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좋은 해석이군요."

호노카는 처음으로 옆사람을 바라봤다.

학생은 발표를 마친 뒤 괜히 연필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칭찬받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남았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하나둘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호노카도 가방을 메려다 문득 입을 열었다.

"...아까 발표."

학생이 돌아봤다.

"네?"

"좋았어요."

잠시 침묵.

그리고 아주 작은 웃음.

"고맙습니다."

"저는 호노카예요."

"...나츠메."

"철학 좋아하세요?"

"좋아한다기보다는…."

나츠메는 창밖을 바라보며 웃었다.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어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호노카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더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 괜찮으면…."

호노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학교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나츠메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사람들은 늘 호노카에게 먼저 다가갔다.

하지만 호노카는,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것처럼 나츠메는 미소 지었다.

"좋아요."

그날 두 사람은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철학.

음악.

영화.

어린 시절 읽었던 책.

좋아하는 계절.

좋아하는 커피.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해서.

신기하게도 대화는 한 번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그날 저녁.

어소로 돌아온 호노카는 공책을 펼쳤다.

첫 장에는 여전히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사랑은 선택일까요, 아니면 발견일까요?"

그녀는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오늘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몇 달 뒤,

그 문장 아래에는 전혀 다른 대답이 적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의 호노카는 아직 알지 못했다.

제2장

향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교수는 칠판에 단 한 줄을 적었다.

학생들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노트를 펼쳤다.

"지난주에는 플라톤의 향연을 읽어 왔습니다."

강의실 스크린에는 고대 그리스의 연회 그림이 떠올랐다.

"향연에서 사랑은 하나의 정의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사랑을 결핍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이라 말하며, 또 누군가는 영혼을 성장시키는 힘이라고 말하지요."

교수는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이번 과제는 간단합니다."

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두 사람이 함께 하나의 답을 만들어 오세요."

강의실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조는 제가 이미 정해 두었습니다."

프로젝터에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17조.

호노카.

나츠메.

호노카는 무심코 옆을 바라보았다.

나츠메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둘 다 웃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안도한 표정이었다.

"도서관에서 할까요?"

수업이 끝난 뒤 호노카가 먼저 물었다.

"좋아요."

"오늘 오후는 어때요?"

"비워 둘게요."

"원래 비어 있었던 거 아니에요?"

"...들켰네요."

처음으로 나츠메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가쿠슈인대학교 중앙도서관.

천장이 높고, 오래된 나무 책장이 끝없이 이어지는 공간.

둘은 철학 서가 앞에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췄다.

"향연은 몇 번 읽어도 어렵네요."

호노카가 책을 넘기며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세 번째 읽으니까..."

나츠메는 잠시 웃었다.

"...더 어려워졌어요."

호노카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답은 반칙 아닌가요?"

"철학은 원래 반칙이 많잖아요."

둘은 동시에 웃었다.

주변 학생들이 힐끗 바라볼 정도로.

호노카는 문득 깨달았다.

학교에서 이렇게 마음 놓고 웃은 적이 언제였더라.

아마.. 없었던거 같다.

과제는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책 이야기를 시작하면 영화 이야기로 흘러가고,

영화 이야기에서 음악으로,

음악에서 여행으로,

여행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로 이어졌다.

"나츠메는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요?"

"말이 없었어요."

"지금도 많지는 않잖아요."

"...그건 부정 못 하겠네요."

호노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친구는 많았어요?"

나츠메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몇 명."

"외롭진 않았어요?"

"...가끔."

호노카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그 대답이 이상하게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호노카는?"

"저도 비슷해요."

"안 믿기는데."

"왜요?"

"호노카라면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먼저 다가올 것 같아서."

호노카는 조용히 웃었다.

"다가오는 사람과 가까워지는 사람은 다르더라고요."

그 말에 나츠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에 작은 글씨를 적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이해받지 못할 때 외롭다.

호노카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며칠 뒤.

과제를 위해 둘은 미술관을 찾았다.

철학 교수는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 하나를 골라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추가 과제를 내주었다.

전시장 한가운데.

두 사람은 오래된 유화 앞에서 나란히 섰다.

손을 맞잡은 연인의 뒷모습.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왜 얼굴을 안 그렸을까요?"

호노카가 물었다.

나츠메는 그림을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넣을 수 있게."

"그럼..."

호노카는 조용히 웃었다.

"지금 저 그림 속 두 사람은 누구예요?"

나츠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호노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몇 초였을까.

아니면 몇 분이었을까.

호노카는 먼저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조금 빨라져 있었다.

저녁이 되자 둘은 캠퍼스로 돌아왔다.

벚꽃은 어느새 절반쯤 떨어져 있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호노카가 말했다.

"저도요."

잠시 침묵.

"다음 주에도..."

호노카는 말을 고르다 작게 웃었다.

"과제 핑계로 또 만날까요?"

나츠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핑계가 없어도 괜찮은데."

그 한마디에 호노카는 순간 말을 잃었다.

나츠메는 그 말이 얼마나 큰 의미로 들릴지 미처 깨닫지 못한 듯, 아무렇지 않게 앞을 향해 걸어갔다.

호노카는 한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봄바람이 불었다.

벚꽃잎 하나가 나츠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호노카는 무심코 손을 뻗어 꽃잎을 떼어 주었다.

두 사람의 손끝이 아주 잠깐 스쳤다.

"아."

"...미안."

"아니에요."

나츠메는 잠시 호노카를 바라보다 작게 미소 지었다.

"손, 따뜻하네요."

그 짧은 한마디는 그날 밤 내내 호노카의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그녀는 기숙사 책상에 앉아 과제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여전히 같은 질문이 적혀 있었다.

"사랑은 선택일까요, 아니면 발견일까요?"

그녀는 펜을 들었다가, 한참 동안 아무 글자도 쓰지 못했다.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제 철학이 아니라, 한 사람의 표정을 이해하고 싶어졌다는 것을.

제3장

타인의 얼굴

5월의 캠퍼스는 봄과 여름 사이 어디쯤에 머물러 있었다.

벚꽃은 모두 져 버렸지만, 나무들은 더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 갔다.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앞두고 도서관으로 향했고, 교정에는 처음보다 훨씬 편안한 웃음소리가 늘어났다.

호노카도 어느새 이 풍경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계절뿐만이 아니었다.

"...좋은 아침."

강의실 문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노카가 고개를 들었다.

나츠메였다.

언제나처럼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린 차림, 어깨에는 낡은 캔버스 가방이 걸려 있었다.

"좋은 아침."

호노카도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색한 침묵은 더 이상 없었다.

나란히 강의실로 들어가는 일도, 창가 자리에 함께 앉는 일도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오늘은 무슨 내용일까요?"

호노카가 노트를 꺼내며 물었다.

나츠메는 교탁 위에 놓인 책을 바라봤다.

"부버."

"나와 너?"

"응."

잠시 후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칠판에는 두 단어만 적혔다.

나(I)

너(Thou)

교수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사람을 '본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부버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상대를 목적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만나는 '나-너'의 관계, 다른 하나는 상대를 수단이나 대상으로 바라보는 '나-그것'의 관계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생각보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오늘 힘들었어?'라고 묻는 이유가 진심으로 친구를 걱정해서라면 그것은 '나-너'입니다. 하지만 시험 자료를 얻기 위해 일부러 친절하게 다가간다면?"

"나-그것."

"맞습니다."

교수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호노카는 무심코 펜을 멈췄다.

"사랑이란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만나는 용기입니다."

그 말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마음속에 남았다.

수업이 끝난 뒤, 교수는 새로운 과제를 공지했다.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과제입니다."

학생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주일 동안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 오세요."

"그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해석하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세요."

잠시 뜸을 들인 뒤 덧붙였다.

"우리는 생각보다 타인을 거의 보지 않습니다."

"관찰이라..."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호노카가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네요."

나츠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처음부터 의미를 붙이려고 하니까."

"그럼 나츠메는 누구를 관찰할 거예요?"

"...아직."

"저는 정했어요."

"벌써?"

호노카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비밀."

나츠메도 피식 웃었다.

"그 표정 보니까 아닌 것 같은데."

"들켰네요."

둘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호노카는 문득 깨달았다.

나츠메는 걸을 때 항상 상대의 보폭에 맞춰 걷는 사람이었다.

조금 느린 사람과는 천천히.

조금 빠른 사람과는 자연스럽게.

한 번도 의식한 적 없었는데, 오늘은 그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나츠메는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을 시작하면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커피를 마실 때는 늘 마지막 한 모금이 식을 때까지 천천히 마셨다.

도서관에서는 책장을 넘길 때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웃을 때는 눈부터 먼저 웃었다.

호노카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닌데."

"과제 때문이에요."

"과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츠메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응."

호노카는 차마 그 뒤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요즘, 자꾸 너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 말은 아직 마음속에만 간직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호노카는 기숙사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오늘의 과제 제목은 간단했다.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한참 동안 빈 종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첫 문장을 적었다.

"나츠메는 조용한 사람이다."

곧바로 줄을 하나 긋고 그 문장을 지웠다.

아니었다.

그것은 관찰이 아니라 평가였다.

다시 펜을 들었다.

"나츠메는 상대가 말을 끝낼 때까지 절대 끼어들지 않는다."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한 줄.

또 한 줄.

호노카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언젠가 사랑의 가장 조용한 시작이었다는 것을.

. . .

과제가 나온 지 사흘째.

호노카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을 행동들이 이제는 자꾸 눈에 들어왔다.

나츠메는 강의가 끝나면 가장 마지막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 의자를 원래 위치로 밀어 넣고, 창문이 열려 있으면 조용히 닫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늘 그렇게 행동했다.

'왜 저럴까.'

호노카는 이유를 찾으려다가 멈췄다.

평가하지 말 것.

해석하지 말 것.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반대로 나츠메 역시 과제를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학생을 관찰하려 했다.

학생회에서 늘 활발하게 웃는 학생.

도서관 사서.

같은 동아리 선배.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노트는 비어 있었다.

교수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당신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 가장 이해하고 싶은 사람을 바라보세요."

결국 나츠메의 시선도 한 사람에게 향했다.

호노카.

어느 날 오후.

도서관에서 과제를 마친 둘은 캠퍼스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오늘은 바람이 시원하네요."

호노카가 말했다.

"응."

"시험 준비는 잘 돼 가요?"

"그럭저럭."

언제나처럼 평범한 대화였다.

하지만 나츠메는 오늘 따라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학생들이 다가와 인사를 하면 호노카는 늘 웃으며 답했다.

교수와 마주쳐도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모든 사람이 떠난 뒤.

그 미소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피곤해?"

나츠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노카는 잠시 멈춰 섰다.

"...조금."

"무리하지 마."

그 한마디에 호노카는 웃었다.

하지만 이번 웃음은 조금 달랐다.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며칠 뒤.

과제를 위해 둘은 각자 작성한 메모를 보여 주기로 했다.

호노카는 망설이다가 노트를 내밀었다.

나츠메는 첫 줄을 읽고 미소를 지었다.

'나츠메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한 걸음 늦게 걷는다.'

"...이런 것까지 봤어?"

"응."

"부끄럽네."

"왜?"

"나도 몰랐거든."

호노카는 작게 웃었다.

"그래서 재미있었어요."

이번에는 나츠메 차례였다.

그녀도 노트를 건넸다.

호노카는 첫 문장을 읽다가 손을 멈췄다.

'호노카는 사람들 앞에서는 한 번도 한숨을 쉬지 않는다.'

그 아래에는 또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창밖을 오래 바라본다.'

호노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제 봤어요?"

"우연히."

"그랬구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츠메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미안."

"왜?"

"혼자 있고 싶었는데 내가 본 걸 수도 있으니까."

호노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 열었다.

"사실은."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누군가 알아봐 줬으면 했어요."

그 말이 끝나자 바람이 불었다.

초록 잎들이 흔들리는 소리만 둘 사이를 채웠다.

나츠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로도 하지 않았다.

조언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호노카 곁에 나란히 서 있었다.

한참 뒤.

호노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나츠메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수업 기억 안 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응."

"지금은 네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보다, 네 옆에 있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서."

호노카는 처음으로 그 말을 이해했다.

사람은 반드시 말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침묵도 누군가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날 해 질 무렵.

둘은 아무 말 없이 벤치에 앉아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나눴던 어떤 대화보다도 편안했다.

호노카는 문득 깨달았다.

철학은 정답을 가르쳐 주는 학문이 아니라,

누군가를 더 깊이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학문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나츠메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날 저녁.

호노카는 기숙사 창문을 열어 두었다.

늦봄의 바람이 커튼을 살짝 흔들었다.

책상 위에는 철학 과제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과제 제목은 간단했다.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한동안 펜을 들고만 있던 호노카는 천천히 첫 문장을 적었다.

나츠메는 상대가 말을 끝낼 때까지 절대로 끼어들지 않는다.

잠시 생각한 뒤 두 번째 줄을 썼다.

'웃을 때는 눈이 먼저 웃는다.'

세 번째 줄.

'혼자 있을 때도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한다.'

호노카는 펜을 멈췄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제를 쓰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츠메라는 사람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오후에 있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오늘은 네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보다, 네 옆에 있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서."

그 말을 떠올리자 가슴 한쪽이 조용히 따뜻해졌다.

호노카는 자신도 모르게 노트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첫 수업 날 적어 두었던 문장이 거기에 있었다.

"사랑은 선택일까요, 아니면 발견일까요?"

그녀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수업 첫날에는 철학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답을 찾으면 끝나는 질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나츠메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도서관에서 웃던 모습.

미술관에서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던 옆모습.

"핑계가 없어도 괜찮은데."

그 짧은 말.

그리고 오늘,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 주던 따뜻한 침묵.

호노카는 펜을 들어 질문 아래에 작은 글씨를 적으려다 멈췄다.

아직은 쓸 수 없었다.

정답을 적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녀는 대신 노트를 덮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은 모르겠어."

창밖에서는 초여름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바람보다 오래,

호노카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사랑은 선택일까요, 아니면 발견일까요?"

아직 그녀는 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이 언젠가 자신의 삶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아직은 알지 못한 채.

제4장

발견 이후의 선택

6월의 캠퍼스는 어느새 초여름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빗물이 마른 운동장에서는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고, 학생회는 중앙광장에 천막을 세우느라 분주했다. 도서관 앞 벤치에는 시험이 끝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고 있었고, 교정을 가로지르는 은행나무 잎은 햇빛을 받아 연둣빛으로 반짝였다.

호노카는 창문을 통해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나츠메는 아직 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강의 시작 10분 전에는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을 사람이었다.

'늦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조금 숨이 찬 목소리였다.

나츠메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괜찮아?"

호노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츠메는 숨을 고른 뒤 미소를 지었다.

"오는 길에 어린아이가 넘어졌어."

"그래서?"

"무릎이 많이 까졌더라."

"병원은?"

"근처 보건실까지 데려다주고 왔어."

그 말은 너무도 담담해서, 마치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듯 흘러나왔다.

호노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자연스러울까.'

누군가를 돕는 일이.

누군가의 곁에 머무는 일이.

나츠메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해 보였다.

그날 수업의 주제는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였다.

교수는 책을 덮고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칠판 위에 분필이 천천히 움직였다.

사랑은 감정일까요, 결단일까요?

학생들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다.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빠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사랑을 선택이라고 말했습니다."

호노카는 문득 첫 수업이 떠올랐다.

'사랑은 선택일까요, 아니면 발견일까요?'

처음에는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문장이 이전과 다르게 들렸다.

교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만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우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곁에 머물기로 하는 것은 의지입니다."

"사랑은 감정만으로 지속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매일같이 내리는 작은 선택들의 연속입니다."

강의실은 숨소리마저 조용해졌다.

호노카는 무심코 옆을 바라봤다.

나츠메는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한 줄.

그리고 또 한 줄.

수업이 끝난 뒤.

"뭘 그렇게 열심히 적었어?"

호노카가 물었다.

나츠메는 노트를 덮으며 웃었다.

"비밀."

"또?"

"응."

"나만 비밀 없는 것 같네."

나츠메는 잠시 생각하다가 노트를 살짝 돌려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발견은 우연이지만, 곁에 남는 것은 선택이다.'

호노카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조금 뛰었다.

"좋은 문장이네."

"교수님 말씀 듣다가 적어 본 거야."

"나는…."

호노카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직 잘 모르겠어."

나츠메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우연인지, 선택인지."

잠시 침묵.

나츠메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늘 그랬다.

쉽게 답을 내리지 않는 사람.

한참 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둘 다 아닐 수도 있어."

"그럼?"

"처음은 우연이고."

나츠메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다음부터는 서로가 만들어 가는 거 아닐까."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날 저녁.

호노카는 기숙사 방에서 혼자 차를 끓였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다가 책상 위 노트를 펼쳤다.

첫 장.

첫 수업 날 적었던 문장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랑은 선택일까요, 아니면 발견일까요?"

그녀는 그 아래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질문 옆에 아주 작은 화살표 하나를 그렸다.

화살표 끝에는 한 줄만 적혀 있었다.

"발견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지도 모른다."

펜을 내려놓은 호노카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는 아직 사랑을 정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츠메를 만난 이후,

그 질문은 더 이상 철학 수업의 과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하루를 시작하고 끝맺는 질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노트를 덮기 전 마지막으로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사랑은 선택일까요, 아니면 발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