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중화민국 총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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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합중국 제11대 농무장관 헨리 아거드 월리스 Henry Agard Walla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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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88년 10월 7일 |
| 미국 아이오와주 오리엔트 | |
| 사망 | 1965년 11월 18일 (향년 77세) |
| 미국 코네티컷주 댄버리 | |
| 국적 | |
| 정당 | 공화당 (1909-1924) 틀:진보당 (미국)(1912) 틀:진보당 (미국)(1924-1932) 민주당(1936-1947,1964-1965) 틀:진보당 (미국)(1947-1950) |
| 서명 | |
| 재임기간 | 초대 총통 |
| 1933년 3월 4일 ~ 1941년 1월 20일 | |
| 학력 |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
| 종교 | 성공회 |
| 부모 | 아버지 헨리 C. 월리스 |
| 배우자 | 일로 브라운 월리스 |
|}
개요
총통 자리를 47년간 독점했던 것에 비추어 중화권에서는 마오 총통(毛總統)으로도 통한다. 북양정부 개혁파 출신으로 중화민국의 통일을 완수한 인물로, 독자적인 후난 개혁파 세력을 구축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 황고둔 사건으로 북양정부 실권자 장쭤린이 사망하면서 발생한 권력 공백을 파고들어 중앙 권력을 장악했으며, 같은 해 12월 장쉐량의 귀순으로 중국 통일을 완수했다. 1929년 1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민국 총통 취임을 선언하고 1976년 사망할 때까지 47년 8개월간 종신 집권했다.
생애
유년기 및 청년기
1893년 12월 26일 호남성 상담현 소산구 출신.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친 마오순성은 비교적 형편이 괜찮은 중농으로, 마오쩌둥은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열중했다. 스스로도 나중에 "나는 책을 읽을 수 없게 되면 그날부터 죽은 목숨"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잠시 학생 의용군에 투신했다가 이내 학업으로 복귀했다. 1913년 후난 성립 제1사범학교에 입학해 1918년 졸업했으며, 이 당시 스승 양창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졸업 후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 보조로 근무하면서 리다자오, 천두슈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접촉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나, 1921년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는데, 훗날 소련 코민테른의 직접 지도를 받는 공산당 노선 대신 중국 현실에 기반한 독자 개혁 노선을 추구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후난 기반 구축과 북양정부 편입
마오쩌둥은 고향 후난으로 돌아가 창사를 거점으로 농민, 노동자 조직화에 집중했다. 농민 야학과 문화서사 네트워크를 광범위하게 확장하며 후난성 내에서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키워나갔다. 어느 군벌 파벌과도 공식 연대를 맺지 않는 중립 노선을 유지한 것이 마오쩌둥의 핵심 전략이었다.
1925년 쑨원 사망 이후 국민당이 분열에 빠지고 장제스의 북벌이 1927년 북양정부 연합 세력에 의해 좌초되면서, 국민당 좌파 잔존 세력 일부가 마오쩌둥 진영으로 흡수되었다. 같은 해 북양정부는 후난성 장악을 위해 마오쩌둥 세력과의 협상을 시도했고, 마오쩌둥은 후난성 내 자치적 개혁 권한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북양정부에 명목상 편입되는 것을 수용했다.
북양정부 실권자 장쭤린과는 표면적으로 협력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세력을 조용히 확장했다. 장쭤린이 마오쩌둥을 직접적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을 영리하게 활용한 것이다.
황고둔 사건과 권력 장악
1928년 6월 4일, 일본 관동군이 장쭤린이 탑승한 열차를 폭파하는 황고둔 사건이 발생했다. 북양정부 실권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중앙 권력에 거대한 공백을 만들어냈는데, 기존 군벌들이 후계 권력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마오쩌둥이 즉각 움직였다. 그동안 조용히 구축해온 후난, 호북, 강서 일대의 광범위한 농민, 노동자 조직 기반과 북양정부 온건 관료들과의 네트워크를 동시에 가동하며 중앙 정치의 중심으로 치고 올라갔다.
1928년 12월 29일, 봉천군벌을 계승한 장쉐량이 마오쩌둥에 복종을 선언했다. 부친 장쭤린을 암살한 일본에 대한 복수심과 마오쩌둥의 반제국주의 노선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는데, 이로써 중국 대륙은 마오쩌둥 주도의 북양정부 아래 명목상 통일을 달성했다.
1929년 1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민국 총통 취임을 선언했다.
집권 초기 및 안정기
집권 초기 마오쩌둥은 토지개혁과 농민 자치 확대를 핵심 정책으로 추진했다. 군벌 체제 하에서 소작농으로 착취받던 농민층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정책은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으며, 이 시기만큼은 마오쩌둥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진심 어린 것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트로츠키의 소련의 팽창 압박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독자 노선을 유지했는데, 이념적으로 소련과 친밀하면서도 직접적 종속은 거부하는 줄타기를 이어갔으며, 미국 루스벨트 행정부와의 실무 접촉도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마오쩌둥 정권을 소련의 팽창을 막는 실질적 방파제로 활용하는 실용적 노선을 취했고, 마오쩌둥 역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외교적 균형을 모색했다.
중일전쟁과 대약진운동
1937년 일본의 중국 전면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마오쩌둥은 항일 저항의 구심점으로서 국민적 지지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일본군에 맞선 조직적 저항이 이어지면서 마오쩌둥의 정치적 위상은 사실상 절대적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 집권 9년차에 접어든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을 강행했다. 농업 집단화와 철강 생산 목표를 무리하게 밀어붙인 결과는 처참했다. 전쟁 중에 농업 생산력이 집단화 실패로 추가 붕괴하면서 대기근이 발생했고, 1939년부터 1941년 사이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사상 최악의 인재가 벌어졌다. 전시라는 특수 상황이 피해 규모를 더욱 키웠으며, 일본군의 침략과 대기근이 동시에 덮친 중국 농촌의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문화대혁명
집권 17년차인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맞물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선포했다. 표면적인 명분은 봉건 잔재와 부르주아 문화의 청산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당내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핵심이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다.
홍위병들이 전국을 휩쓸며 지식인, 교수, 의사, 예술가 등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탄압하는 적색 테러가 벌어졌다. 학교가 문을 닫았고, 병원에서는 의사가 화장실 청소를 하고 청소부가 환자를 돌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수천 년의 중국 문화유산이 파괴되었으며, 무고한 시민들이 군중 앞에서 공개 비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마오쩌둥이 사망하는 1976년까지 무려 30년간 지속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개요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2000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
|---|---|---|---|---|---|---|---|---|
윌키 52인 (14.9%) ✔ (85.1%) 452인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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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일시 | 1940년 11월 5일 | |||||||
| 투표율 | 62.5% ▲ 5.6%p | |||||||
| 선거 결과 | ||||||||
| 후보 | 민주당 |
공화당 | ||||||
| 홈스테이트 | 윌키 뉴욕 바클리 켄터키 |
쿠퍼 몬태나 반덴버그 미시간 | ||||||
| 승리 주 | 8 | 42 + D.C. | ||||||
| 선거인단 | ||||||||
| 79인 | 452인 | |||||||
| 전국 득표 | ||||||||
| 19,329,606 38.7% |
30,332,082 60.8% | |||||||
| 당선자 | ||||||||
| 공화당 게리 쿠퍼 | ||||||||
개요
1940년 11월 5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게리 쿠퍼와 부통령 후보 아서 반덴버그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웬델 윌키와 부통령 앨번 W. 바클리를 꺾고 미국의 제33대 대통령과 제33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다시 8년만에 공화당 정권이 들어선 선거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와 맞물려 세계 대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배경
경선
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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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경선은 민주당과 달리 시작 전부터 사실상 승부가 정해져 있었다. 현직 대통령인 댄 퀘일이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당내 뚜렷한 대항마가 없는 상태에서 사실상 단독 후보로 경선에 임했다.
일부 당내 인사들 사이에서 퀘일의 재지명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존재했으나, 현지 대통령에 맞서 당내 경선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수반하는 선택이었기에, 결국 이렇다 할 도전자 없이 퀘일이 압도적인 대의원 수를 확보하며 재지명되었다.
퀘일은 1996년 대선에 이어 제임스 스톡데일 부통령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다만 그가 매우 고령이라는 점이 지속해서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전쟁 영웅이자 명예훈장 수훈자로서 상당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만, 정치에서의 대중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대해서는 재임 4년 내내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당 일각에서는 새로운 얼굴로의 교체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퀘일은 그냥 무시하고 지명을 선택했다.
민주당
| Tomorrow Begins Today 미래는 오늘 시작된다 2000 케네디-브로 티켓 슬로건 |
퀘일 행정부의 낮은 지지율로 민주당은 이번 대선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선거라고 보았다. 민주당 내에서는 일찍부터 후보군에 대한 하마평이 무성했는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부상한 인물이 존 F. 케네디 주니어였다.
케네디는 1994년 뉴욕주 상원의원 당선 직후 부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압도적인 이름값과 대중적 인지도, 그리고 젊고 호감형인 이미지로 인해 당선 직후부터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어 왔다.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전국 순회 강연, 지역 당 조직과의 교류 등을 통해 민주당 내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다.
케네디에 맞선 주요 경쟁자로는 뉴저지주 상원의원 빌 브래들리, 코네티컷주 상원의원 조 리버만, 그리고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이자,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인 마이클 듀카키스가 있었다.
케네디는 아이오와 코커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를 포함한 초반 경선 일정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하며 사실상 경선을 조기에 종결시켰다. 슈퍼 화요일 이후 브래들리와 리버만은 잇따라 경선 중단을 선언했으며, 듀카키스 역시 뒤이어 완주를 포기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케네디는 사실상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
케니디는 부통령 후보로 루이지애나주 연방 상원의원인 존 브로를 지명했다. 뉴욕 상원의원이자 북동부, 도심 지역 기반의 진보적 이미지가 강한 케네디와 달리, 브로는 딥사우스 출신의 중도실용주의 협상가로서 오랜 상원 경력을 통해 초당적 조정 능력을 인정받아온 인물이다. 이 지명은 케네디의 상대적 약점으로 지적되던 남부 지역 기반과 국정 경험 부족을 동시에 보완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