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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 高麗大學 KOREA UNIVERSIT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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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 자유 · 정의 · 진리 LIBERTAS · JUSTITIA · VERITAS | |||
상징 | 교수 | 호랑이 | ||
교목 | 잣나무 | |||
교색 | Crimso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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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조선 | |||
분류 | 국립대학, 4년제 종합대학 | |||
개교 | 1905년 5월 5일 (119주년) 보성전문학교 | |||
총장 | 제21대 김동원 | |||
당비서 | 김정숙 | |||
대학병원 | 고려대학 안암병원 고려대학 구로병원 고려대학 안산병원 | |||
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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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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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7명 (2022년) | ||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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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47명 (2022년) | |||
교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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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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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0명 (2022년) | ||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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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0명 (2022년) | |||
주소 | 서울시 성북구역 안암로 1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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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공식 홈페이지 | |||
SNS | | | | |
개요
고려대학의 경관, 홍보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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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高麗大學)은 서울시 성북구역 안암동에 위치한 국립 종합대학이다.
1905년 충숙공 이용익이 고종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근대적 사립 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 1932년 인촌 김성수가 학교를 인수했고 해방 후 1946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며 고려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1950년 통일 이후 국립대학으로 전환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약칭은 고대(高大)이며, 영문명 Korea University의 약칭은 KU이다.
상징
교명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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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 고려대학 |
영어 | Korea University |
중국어 | |
일본어 | |
러시아어 | Университет Корё |
독일어 | Korea University |
프랑스어 | Université de Corée |
스페인어 | Universidad de Corea |
한문 | 高麗大學 |
과거에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을 교명으로 사용했으며 여기서 보성이란 고종이 직접 하사한 명칭으로 '널리 사람다움을 열어 이루게 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보성이란 명칭은 1905년부터 1946년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고려대학(高麗大學)'에서 고려는 1932년 보성전문대학을 인수해 현 고려대학을 설립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 인촌 김성수의 발상이다. 이에 대한 그의 지론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가 만드는 대학은 반드시 우리나라나 민족을 대표하는 대학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는 만큼 교명도 반드시 그러한 뜻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야 하겠는데, '조선'이나 '한국'은 역사상 이민족에게 수모를 당한 일이 있어서 싫고, '고려'도 실은 여진, 몽고 등의 시달림을 받은 일은 있지만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하여 좋다. 우리나라의 외국어 명칭인 Korea, Corea, Corée도 고려의 음을 표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유진오, 『양호기(養虎記)』, 231~232쪽 |
이에 대해선 아래와 같은 기록도 남아있다.
보성, 조선, 고려 등 세 대의 명칭을 가지고 논하되 보성은 전문학교 때의 이름이니 대학이 되면 갈아야 하고, 조선은 개국 당초부터 끝까지 국토 내에서만 우물쭈물 하였고 세력이 밖에까지 미쳐보지 못했으나, 고구려는 한때 요동에까지 세력이 팽창하였던 것이니 그 웅대 활달한 기상과 자주 불패의 정신이 취할 만하나, 다만 삼자명은 불편하니 '句'자를 약하여 '고려'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리은상, 「아 인촌은 가시다」, 『신생공유(新生公論)』, 1955.6. |
1950년 통일 이후엔 고려대학이란 명칭을 구상한 인촌 김성수가 왜정시대 당시 일제에 협력한 이력을 들어 그 명칭이 바뀔 뻔 했으나 학생과 교수진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 이는 무산되어 현재까지도 고려대학이란 명칭이 교명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교장(校章)
고려대학 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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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1958년 제정) | 글로벌 심볼 (2005년 제정) |
고려대학의 교장은 1958년 처음 제정되었으며 교장에서 붉은 크림슨색 방패는 활기와 정열을 상징하는 빛깔로 고려대학의 학풍과 기질을 상징하며 상단의 3권의 책에는 본교의 교육이념인 '교육구국'의 건학정신과 자유, 정의, 진리의 3대 이념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아래의 호랑이는 용기, 결단, 민활, 위엄을 표현해주고 있다.
2005년에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교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심볼이 제정되었다. 현재는 교장보다 글로벌 심볼이 더욱 자주 사용되는 추세다.
한편 제주에 위치한 고려대학교는 기존 보성전문학교 시절 사용한 이화문을 개조한 문장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교가
고려대학 교가 (1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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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개교 50주년에 맞춰 제정되었다. 조지훈 교수가 작사하고 윤이상이 작곡하였다. 다른 대학보다 유독 모교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고려대학의 교풍 덕에 고려대학의 학생들은 다른 대학의 학생들보다 교가를 더욱 특별하게 생각하고 이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 안암의 언덕에 퍼져나는 빛을 보라. 겨레의 보람이요, 정성이 뭉쳐 드높이 쌓아 올린 공든 탑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2. 자유를 위하여 물결 치는 가슴이여. 정의를 위하여 굳게 잡은 신념이여. 불타는 정성이라 그 뜻을 받아 아득히 우러르는 큰 리상 자유 정의 진리의 한빛이 있다. 3. 그윽한 수풀은 우리들의 요람이요. 저 넓은 벌판은 우리 힘의 소망이라. 드는 이 나가는 이 돌려서 지켜 힘차게 이어가는 이 정신 자유 정의 진리의 큰길이 있다. 후렴. 고려대학 고려대학 마음의 고향 고려대학 고려대학 영원히 빛난다. |
한편 제주에 위치한 고려대학교는 춘원 이광수가 작사하고 김영환이 작곡한 구 교가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2]
호랑이
1963년에 세워진 호상, 교정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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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의 교수[3]. 1930년대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상징으로 사용했으며 현재도 교정 여기저기에 호랑이 상징물이 세워져 있다. 특히 1917년 실시된 해수구제사업으로 호랑이를 비롯한 조선반도의 각종 동물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한 일제에게 호랑이를 학교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일제에게 전면적으로 맞선다는 항일정신의 의미도 담고 있다.
크림슨색
Crimson (#862633)
고려대학의 교색. 밝은 빨강과 약간의 파랑이 섞인 진한 크림슨색은 강렬한 이미지를 안겨줌과 동시에 권위있는 느낌을 준다.
이는 1952년부터 약 13년 간 총장으로 재임한 유진오 총장이 제정한 것으로 그는 고려대학에 어울릴 만한 상징색을 찾기 위해 세계 각지의 대학을 둘러보았으며 그렇게 그가 '가장 좋은 색'으로 칭하며 결정한 교색은 바로 크림슨색이었다. 크림슨색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학 중 하나인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를 비롯한 전 세계의 권위있는 대학 여럿이 사용하는 색이며 한편 빨간색은 파리 코뮌 성립 이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진보, 혁명, 좌파를 상징하는 색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도 크림슨색은 '혁명적인 색'으로 받아들여졌기에 크림슨색은 손쉽고 빠르게게 학교 내에 정착할 수 있었다.
역사
보성전문학교
이 학원에서 배움을 받는 준재 여러분은 나라와 겨레를 이끌 독립과 자주를 이룩하기 바란다. 그리고 지난날에는 그저 외국어의 습득에만 급급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신문화의 창조를 위해 모든 분야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이에 법률경제 등의 새 학문을 닦아야 한다. 이용익, 보성전문학교를 건립하며 |
고려대학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5월 5일 대한제국의 탁지부대신을 지낸 충숙공 이용익이 고종에게 내탕금을 지원 받아 건립한 고등교육기관이다. 학교가 처음 설립됐을 당시에는 법률학전문과와 이재학전문과 총 2개가 존재했는데 이는 기존의 전통적인 인문학이 아닌 서구의 실용학문을 받아들여 근대적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취지가 담겨진 것이었다. 초기에는 관립한성아어학교의 교정을 일부 할당받아 교정으로 사용했으나 1906년부터는 아어학교에 이웃한 김교현의 기와집 200여채를 매입해 해당 건물을 교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인 1907년 이용익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암살당하게 되며 학교는 그의 손자인 이종호에게 넘어간다. 이종호는 독립운동을 진행하며 보성전문학교를 함께 경영하였다. 한국통감부는 보성전문학교를 일제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 이종호에게 접근해 각종 술책을 벌인다. 학교 경비의 부족액을 통감부에서 전액 기부하겠다는 회유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종호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이종호는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하기 난처한 상황에 처해 결국 학교를 천도교 인사였던 의암 손병희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손병희는 보성전문학교를 천도교 계열의 학교로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덕에 천도교의 금전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돼 기존 사용하던 기와집 교정을 허물고 서구식 교정을 새롭게 짓게 되었다. 1918년엔 낙원동으로 교정을 이정했으며 1922년엔 송현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그 후 천도교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학교는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1932년 인촌 김성수가 학교를 인수하면서 학교는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1934년엔 현재의 안암동으로 교정을 이전했다. 이때 새로 이전될 교정의 건물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화강암으로 지어진 석조전 본관과 현재 대학원 건물로 사용되는 도서관 건물은 당시 조선 최고 수준을 자랑하였다. 심지어 이 건물들은 모두 김성수의 사비로 지어진 것이었다. 거기에 보성전문학교는 당시 교수 1인당 1 구실을 제공하였는데 이는 그 시대 일본 본토에 위치한 대학보다 더욱 좋은 연구 환경이었다. 이는 당시 유일한 공인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에게 물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밀리지 않는, 조선인의 기개와 자존심을 지켜줄 자랑스러운 민족학교를 건설하기 위한 김성수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1944년 일본이 본격적인 총력전 체제에 돌입하면서 보성전문학교는 그 명칭이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개칭되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고려대학
1945년 해방 이후엔 교명이 다시 보성전문학교로 환원되었으며 1946년엔 보성전문학교의 건물, 대지, 교수진, 재정 등을 기초로 하여 4년제 종합대학인 고려대학이 그 문을 열었다. 초대 총장으론 기당 현상윤이 올랐으며 개교 직후의 고려대학은 정법대학, 경상대학, 문과대학 총 3개의 단과대학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정법대학은 법과대학으로, 경상대학은 현재의 경영대학, 정경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문과대학은 현재까지도 그 전통을 잇고 있다.
1950년 조국해방전쟁이 발발하였다. 약 3개월 간의 전쟁 끝에 조선은 조선반도를 완전히 통일하였다. 통일 직전 고려대학은 제주도로 수도를 옮기는 대한민국 정부를 따라 제주도로 학교를 이전하느냐, 조선반도에 그대로 남느냐로 그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 갈등은 조선인민군이 부산 경무청에 람홍색공화국기를 꽂기 직전까지 합의가 나지 않아 결국 고려대학은 대한민국을 따라 제주도로 이전한 고려대학교와 조선에 그대로 남은 고려대학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당시 고려대학을 운영하던 고려중앙학원은 제주도로 내려가 현재까지도 고려대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나 조선반도에 남게 된 고려대학은 그대로 국립대학으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이후 조선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제외한 모든 대학을 단과대학으로 바꿔버리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학생과 교수진의 완강한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고려대학도 경영만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고려경영대학으로 개편되어버렸다. 이 시기에 고려경영대학에서 수학한 유명인이라 하면 리명박 현 국가주석이 가장 유명하다. 이 시기의 고려경영대학은 다른 대학들보다 유독 반정부 성향이 강해 정부가 골머리를 썩혔다. 1972년 일본과 국교를 체결할 당시 고려경영대학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를 대표한다.
1983년 신사고정책이 시행되면서 고려경영대학은 다시 종합대학인 고려대학으로 환원되어 현재까지도 조선 최고의 대학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