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설중매)

솔피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7월 21일 (일) 03:17 판
[ 소개 ]
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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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경희궁
慶熙宮 | Kyŏnghŭi-Place
파일:경희궁
형태 궁전
개축 1909년 (연수 15년)
소유주 인덕황제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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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한성부 종로구 경희궁로 1
전화번호 +82 01-3213-1111
역사 1623sus (수상관저)
1961년 4월 22일 (신축 관저)
2012년 12월 26일 (리모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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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자정전

개요

황성 한성부 종로구 경희궁로 1에 있는 대한제국황궁 중 하나이자 이궁이다. 인경궁, 자수궁과 함께 광해군 재위 기에 새로 지은 3궁 중 한 곳이며 인조 시기부터 철종 시기까지 이궁으로 기능했다.

상세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했다.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 + 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렀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했고, 황성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성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 경희궁은 한성의 궁궐 중 유일하게 흔적도 없이 완전히 파괴 된 적이 있다. 성조 시절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고, 이후 경희궁 터에 방치되어 있던 잔여 전각 5개만이 남아있어 경희궁터가 사실상 허허벌판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09년, 허허벌판이던 경희궁터를 동궁으로 사용하고자 서양식 네오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서의 대대적인 증건이 시작되었다.

역사

조선 후기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1]을 짓게 했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양궐체제하의 이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인조반정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경조, 성조는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성조의 이후에는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훼철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대량 철거

1875년(성조 4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2] 원래 경희궁에는 전각 100여 동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헐려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 자재로 쓰였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영건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興政堂)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직후인 1875년(성조 4년) 4월에서 8월까지 동안 경희궁 훼철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철거된 경희궁 부지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1868년(고종 5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한 후 경희궁, 용동궁, 수진궁, 어의궁 등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밭을 개간될 수 있도록 분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70년(고종 7년)에 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했고 2년 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에도 경희궁이 거의 완전히 훼손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개화기 당시 한성에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 길모어라는 서양인이 쓴 《서울풍물지》에는 1883년(성조 11년) 경희궁 터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콜로네 브라운이 작성한 지도에 경희궁 위치에 '옛 왕궁' 내지는 '뽕나무 궁궐'이란 표기가 있다. 또한 실제로 조선 말의 경희궁 지역 사진을 보면, 건물이 몇 동 안 남아 있고 전각 주변은 허허벌판임을 확인할 수 있다.[3]

1901년 이전에 촬영된 경희궁 숭정전 사진
(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

이처럼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대부분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전각 5채는 이후 사신 접대 등 행사 용도로 간간히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숭정전의 경우에는 창살로 장식된 문들을 모두 떼어내 수원화성의 연무대(동장대)처럼 군사사열이나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기도 했다.이 시기 버려진 경희궁은 호랑이와 표범들이 몸을 숨기던 주요 서식지 중 하나였다.

1904년(연수 10년) 2월 29일에 경운궁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경운궁 전역이 전소되었다. 당시 궐내(闕內) 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바람을 타고 화재가 일어났던 것. 그 결과 중화전, 중화문을 비롯한 주요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경복궁까지 헐어가며 애써 지은 궁궐이 2년만에 다 불타버린 것이다. 원래 남아있던 2채인 즉조당과 석어당도 이때 소실 되었다.

대화재로 경운궁이 사실상 소실되자 성조와 내각은 경희궁의 잔여 전각들을 경운궁으로 옮겨 조속히 경운궁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경희궁 전각은 경운궁으로 옮겨지며 100% 완전히 원래 자리에서 사라졌다.

대대적인 중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허허벌판으로 방치되던 경희궁은 1900년대 후반, 동궁이자 제국의 국격에 걸맞는 거대한 서양식 궁전을 짓기 위해 주목받기 시작한다. 본래 처음에는 경운궁에 지으려 했으나 경희궁이 경운궁과 가깝고 다섯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부지가 비어있었기에 경희궁터가 새로운 서양식 궁전 부지로 낙점된다.

이렇게 중건된 궁전은 유럽의 정통 네오 바로크 양식에 가까우며,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 영국의 버킹엄 궁전을 참고했다고 한다. 대한 근대 건물들은 크게는 유럽식에 가까워도 세부적인 장식을 보면 나름대로 대한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취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정통 유럽 양식의 건물은 대한에서 보기 드물다. 다만 대한의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나가며 서양화와 부국강병을 향해 나아가잔 의미를 담아 정면 현관의 지붕 장식이나 내장 무늬 등에 전통적인 궁궐 장식이 있는 등, 부분적으로는 한국적인 장식을 혼합했다.

건축 당시에 쓰인 물건들에서 태피스트리는 국산을 사용했으나, 의자와 같은 가구의 상당수는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 수입한 것을 사용했다.

새로운 이궁

이렇게 새로이 건축된 궁전은 초기에는 외면받는다. 성조는 새로운 경희궁이 너무 사치스럽다며 거주하는 것을 꺼렸다고도 한다. 당시 황태자였던 선종도 거주하기에 불편하였는지 동궁이라고 했지만, 경희궁에 자주 머무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희궁 중건 초기 외면 받던 것과는 달리 혜종을 시작으로 여러 황제가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혜종은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고, 1939년에는 소련군의 폭격에 대비해 왕과 왕비의 처소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위치에 방공호를 대규모로 축조했다.지상부는 폭격을 견딜 수 있도록 두께 3m에 달하는 콘크리트 외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대형 돔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덮었으며, 지하 2층 터널형 구조이다. 총 면적은 1379m²로, 길게 뻗어나 있는 통로 양옆으로 방 10여 개가 나란히 있다. 다만, 한소전쟁이 1939년에 종전되며 이 방공호가 실제로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경희궁의 방공호 황제의 유사시 제1대피소로 사용되고 있기에, 민간에 공개된 적은 전무하다.

현대 시기

혜종 사후 소황제도 이곳을 선호했기에 경희궁의 중요성은 나날이 커져갔다. 그러나 고조가 즉위하고 경희궁이 너무 크고 화려하다며 창경궁의 장서각을 문성전으로 개칭하고 편전이자 침전으로 삼으며 중요성이 일시적으로 하락하기도 하였지만 황태자인 이광이 동궁으로 경희궁을 택하면서 그 중요성이 다시금 높아졌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인덕황제는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하고 법궁인 경복궁은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에만 찾고, 침전 겸 편전(사무실)으로 사용허는 중이다.

일반참하

시설

건축물

기타


  1. 경희궁의 원래 이름
  2. 1860년(경조 11년)에 경조가 경희궁에 6개월간 머물렀다는 기록이 경희궁의 마지막 사용 기록인데 적어도 이때까지는 경희궁이 온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3. 1900년대 초까지의 사진상으로 보이는 남아있던 전각들을 나열해보자면, 정문인 흥화문과 금천교. 정전인 숭정전. 편전으로 많이 활용된 흥정당. 중궁전(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된 회상전이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