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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임시 정부(알바니아어: Qeveria e Përkohshme e Shqipërisë 체베리아 에 퍼르코흐슈메 에 슈치퍼리서) 혹은 체말리 정부(알바니아어: Qeveria Qemali 체베리아 체말리)는 1912년 12월 4일 블로러 회의에 의해 구성된 알바니아의 첫번째 정부이다. 이스마엘 체말리는 수상과 블로러 회의의 의장 또한 겸임했다. 임시 정부는 블로러에 임시 수도를 두었으며, 열강은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14개월 동안 임시 정부는 사실상 알바니아의 미래를 열강의 손에 맡겼고, 이 때문에 임시 정부는 소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임시 정부의 소극적인 행보는 일부 인민과 정치인, 귀족 집단과 괴리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초기에 블로러, 베라트, 피에르 등 4,000km²에 불과한 영토만을 통치할 뿐이며, 오스만 군대 잔당의 행정과도 혼용되었다. 런던에서의 회의로 알바니아의 독립이 결정되었고, 런던 조약과 피렌체 의정서를 통해 알바니아의 국경이 결정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알바니아는 알바니아인이 다수인 서부 코소보, 서부 마케도니아, 남부 이피로스 등의 영토를 잃었으나, 열강은 외교적·군사적 위협을 통해 결정된 경계 내부에 있는 타국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외부적 위협은 해결되었으나 내부적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쉬레야 블로라와 그 지지자들은 임시 정부와 별개의 집단을 이루고자 하였고, 미르디타 등 북부 카톨릭 세력은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임시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북이피로스에는 피렌체 의정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가장 큰 위협은 슈코드라 공방전 이후 칭왕하였다가 임시 정부에 등용되었던 에사드 톱타니로, 1913년 10월 14일,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선포했다. 1913년 말에서 1914년 사이, 임시 정부와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은 엘바산 지역에서 가시적인 충돌을 보였고, 국제 통제 위원회의 개입을 통해 일단락이 되었다. 또한 그 무렵, 아흐메트 이제트를 알바니아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청년 튀르크당과 베키르 피크리의 음모가 국제 헌병대에 의해 발각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수 많은 갈등에 직면한 임시 정부는 사실상 해체 수준에 이르렀고, 1914년 1월 15일, 사임을 발표함과 동시에 1월 22일, 국제 통제 위원회에 공식적으로 권력을 위임하며 해산한다.
정부 구성
1912년 11월 29일, 이스마엘 체말리는 수상으로써 첫번째 인사 구성안을 발표한다. 그러나 해당 인사 구성안은 오로지 무슬림 인사로만 구성되었고, 블로러 회의의 대표들은 이를 거부한다. 며칠 간의 토론 끝에 12월 4일, 정부인사가 구성된다. 이스마엘 체말리는 수상과 동시에 외무부장관을 겸임했으며, 부수상은 로마 카톨릭 성직자인 니콜 카초리가 맡았다. 메흐메트 데랄라, 무피드 리보호바, 아브디 톱타니는 무슬림, 페트로 포가, 루이지 구라쿠치, 판델리 찰레, 레프 노시는 카톨릭[1], 미드하트 프라셔리는 벡타쉬 종단이었다. 1912년 12월 초, 이스마엘 체말리는 외교 채널을 통해 코소보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인 하산 프리슈티나와 메흐메트 네지프 드라가에게 정부 직책을 제안했지만 세르비아군에 의해 체포돼 직책을 수행하지 못했다.
동시에 장로회의와 이사 볼레타니 등이 이끄는 국가 민병대 등이 하지 베흐비 아골리의 주재로 결정되었다.
1913년 3월 말, 임시 정부의 첫 대규모 개편이 이루어 진다. 이스마엘 체말리는 런던에서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알바니아를 떠난 사이, 내부 반대파에 의해 부수상 니콜 카초리와 공공사업부장관 미드하트 프라셔리가 축출되고 그 자리를 각각 프렌크 비버 도다와 판델리 찰레로 대체했다. 1913년 7월 2일, 두번째 개편이 이루어져 내무부장관 무피드 리보호바가 에사드 톱타니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1913년 8월 1일, 에사드 톱타니는 내무부장관에서 사임하고 반정부 세력을 구축한다. 1913년 8월에는 첫 계획대로 이사 볼레타니가 전쟁부장관에 임명된다.
임시 정부의 구성은 계속해서 바뀌었고, 장관들은 이스마엘 체말리에게 불만을 품었다. 1913년 10월, 재무부장관 아브디 톱타니가 알바니아 은행의 설립을 둘러싼 비리로 사임했고, 1913년 7월 29일, 내무부장관 무피드 리보호바가 국제 통제 위원회의 대표로 선출되어 사임했다.
해산
임시 정부와 관련해 다소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독립 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1913년 11월 28일, 블로러 정부 청사에서 대규모 축하 행사가 열렸다. 이스마엘 체말리의 정부 인사들, 국제 통제 위원회 대표들, 블로러 연안에 정박해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이탈리아 왕국 군함의 장교들, 지역 인사들이 참가한 초대 연회가 열렸다. 이스마엘 체말리는 초대 연회가 열리는 그의 집 발코니에서 군중에게 연설했다. 군중은 알바니아의 국기를 들고 블로러 거리를 행진했다. 열강의 군함은 21발의 축포를 쏘았다.
1주년 행사의 화목함과는 별개로 임시 정부는 사실상 실패했으며, 알바니아 인민의 지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1913년 9월 2일, 부수상이자 미르티다 지도자 프렌크 비버 도다는 레자에서 알바니아 북부 카톨릭 지도자들을 만나 정부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 북이피로스의 그리스군은 열강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거부했다. 1913년 10월 14일, 에사드 톱타니는 두러스에서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선포했고, 두 정부는 엘바산 인근에서 무력 충돌의 가능성을 보았다. 1914년 1월 9일에는 청년 튀르크당과 베키르 피크리의 주도로 아흐메트 이제트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반란이 일어나 국제 헌병대가 진압했다.
1914년 1월 15일, 이스마엘 체말리는 국제 통제 위원회에 임시 정부가 사임하고, 빌헬름 추 비트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실권을 국제 통제 위원회에 넘길 의사가 있다 밝혔다. 1월 22일, 국제 통제 위원회 대표들은 공식적으로 임시 정부의 권력 위임에 서명했다. 임시 정부 해산 이후 이스마엘 체말리는 프랑스 니스로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