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대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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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5대 황제 숙조 인황제 | 肅祖 仁皇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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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면(李矏) | ||||||||||||||||||||||||||||
자 | 안천(安天) | ||||||||||||||||||||||||||||
출생 | 1935년 1월 19일 | ||||||||||||||||||||||||||||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 |||||||||||||||||||||||||||||
붕어 | 2016년 4월 13일 | ||||||||||||||||||||||||||||
황성 한성부 덕수궁 석조전 (향년 80세) | |||||||||||||||||||||||||||||
즉위 | 1972년 11월 27일 | ||||||||||||||||||||||||||||
황성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
재위기간 | 대한제국 황태형 | ||||||||||||||||||||||||||||
1972년 9월 19일 ~ 1972년 11월 27일 | |||||||||||||||||||||||||||||
대한제국 제5대 황제 | |||||||||||||||||||||||||||||
1972년 11월 27일 ~ 2013년 11월 27일 | |||||||||||||||||||||||||||||
대한제국 태상황 | |||||||||||||||||||||||||||||
2013년 11월 27일 ~ 2016년 4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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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숙조 인황제 이면(肅祖 仁皇帝 李矏)은 대한제국의 제5대 황제이며 승경선절대원왕의 차남이다.
본래 승경군의 차남이었으나, 1936년 창순군 이재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창순군이 죽은 이튿날에 양자로 입적하여 한경군(漢景君)에 봉해졌다.
숙조는 유년기부터 재주가 출중하고 유능하여 황실의 촉망받는 인재였고 숙조는 혜종에 청하여 군인이 아닌 관료가 되어 성상을 보필하겠다며 종친사환금지법의 제약 없이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달라 청하였고, 혜종의 윤허를 받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경찰청 커리어로써 재직하였다. 이후 경찰을 떠나 황족 의원의 자격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1970년 헤종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정보를 총괄하는 정보대의 수장인 정보사가 되었다.
정보사 재임 시절 숙조는 9.18 총격 사건을 통해 조카 뻘 나이의 6촌 친척인 소황제를 압박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2] 이후 숙조는 대신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황태형[3]에 봉해졌고,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다시금 승경대원왕의 아들로 입적 되었다.[4][5] 3개월 후 두려움에 떨던 소황제가 자신이 앓고 있던 병을 명분으로 황태형에게 양위 하였고, 황태형이었던 이면이 연호를 성녕(咸寧)으로 하여 대한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숙조는 즉위 이후 기존의 기득권을 견제하기 위해 황제 중심의 정치를 강화하고 함흥부와 전주부를 각각 상경 함흥부, 남경 전주부로 승격시켰다. 또한 3S정책과 범죄와의 전쟁 선포를 통해 민심을 얻었고, 나토를 모티브로 동북아시아의 친미 국가들의 군사동맹기구인 NEATO[6]를 창설하고, ECSC와 코메콘을 모방한 아세아경제발전공동체(AEDC)를 창설하여 대한제국을 동아시아의 안보와 경제의 중심으로 성장시켰다.
숙조는 고령을 이유로 2013년 손자 이연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황으로 물러났다. 즉위식 당시 태손인 이연이 아직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태손의 계급인 원수 계급장이 부착된 제복을 착용했는데, 숙조가 자신이 입은 제복의 대원수 견장을 손수 떼어 태손의 견장 자리에 달아주고 자신이 쓰던 원수봉을 태손의 손에 들려준 후에 절하며 "황상, 이 대한을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예를 갖추니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과 장성이 감격하여 엎드려 통곡했지만, 이연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위엄을 지키기 위해 울음을 꾹 참아 화제가 되었다.
숙조는 이연이 황제가 된 이후로도 군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었고 일부 분야에 대해서도 대리청정을 하였다. 또한 숙조는 중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적극적으로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네아토 구성국과의 결속을 위해 여러번 순방을 다니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또한 즉위 1개월 뒤 이연은 상황이라는 칭호로는 숙조의 공적을 기릴 수 없다며 태상황으로 격상시켰다. 이렇게 숙조는 태상황이 되어서도 대한제국의 안정과 손자 이연의 황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계절에 따라 황성과 서경, 남경과 동경을 오가며 당구와 사냥을 즐기는 등 즐겁게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이연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순방 도중 일본의 내대신 도쿠가와 이에히로가 이연을 극찬하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
이렇듯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퇴위 2년차부터 갑자기 몸이 안좋아지더니 퇴위 3년 만인 2016년 4월 27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붕어했다. 사후 이연은 혜종 사후 혼란했던 나라를 다시 일으키시고, 대한을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흥시킨 공적을 기리기 위해 숙조(肅祖)로 묘호를 제안했고 대신들이 이를 받아들여 숙조로 결정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여담
가계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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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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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전한 시호는 숙조선덕수공이민온은장우태고철용어위확렬정례열각도량무공양류예결성막흠절신목대녕통청소흥성현사덕기상광정인황제(肅祖宣德修恭夷敏溫隱莊友太高哲勇御魏確烈掉禮易恪掉良武共襄類譽潔成幕欽節神穆戴寧通淸昭興聖商思德祈商光定仁皇帝)이다.
- ↑ 현재까지도 황실과 대한제국 정부는 9.18 총격 사건이 제경군과 연관된 정치자금 수사를 위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충돌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외에서는 당시 황실 여론상 황위 계승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던 숙조가 9월 19일에 공포하기로한 (사실상 제경군으로 결정된) 황속(皇續) 책봉 공포를 무산시키고 황위를 차지할 목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제경군과 경신순황후등 자신과 정적 관계에 있었던 반대파들을 제거한 뒤 소황제를 반강제로 퇴위시킨 일종의 친위 쿠데타로 간주한다.
- ↑ 본래는 숙조는 황위 계승자를 뜻하는 황속(皇續)으로 책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사례처럼 왕위를 찬탈하는 방식보다는 그나마 정당한 혈통의 계승이라는 것을 대내외에 공포하기 위해 숙조가 임의로 만든 칭호로 황위를 물려받기로 정해진 친재종형을 의미하는 칭호이다. 그래서 황태자(子)가 아닌 황태형(兄)이며 유사한 칭호로 당 선종이 사용한 황태숙이 있다.
- ↑ 본래 숙조는 창순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황속으로써 황위를 계승할 경우 향렬과 촌수 문제가 숙조의 발목을 잡았다. 사실 숙조는 국가와 군대를 완벽하게 장악했기에 이러한 문제를 무시해도 그만 이었지만 사실상 황위 찬탈의 형식으로 황위를 계승하였기에 정통성에 민감했고, 이러한 재 입적까지 단행한 것 이었다.
- ↑ 이에 따라 은언궁가의 봉사손으로는 숙부인 (이광과 숙조는 1살 터울로 유년기부터 사실상 형제처럼 지내 친분이 돈독했다.) 이광이 낙점되었고, 창순군의 아들로 이광이 입적되어 이광의 후손들이 은언궁가를 계승하고 있다.
- ↑ 공식 명칭은 동북아시아 조약 기구, (Nor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로 영어 발음은 네아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