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크라이나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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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 제7대 총리 하우릴로 페트로비치 크리첸코-모힐라 Гаврило Петрович Криченко-Могила | |
출생 | 1889년 6월 15일 |
러시아 제국 프리코르스키 지방 체르니히우카 | |
국적 | 러시아 제국 → 녹우크라이나 |
사망 | 1941년 월 일 (향년 52세) |
녹우크라이나 하바리우스크 직할시 하바리우스크 시립병원 | |
임기 | 제7대 녹우크라이나 총리 |
1932년 4월 15일 ~ 1934년 3월 3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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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녹우크라이나의 예술인이자 정치인.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 좌익의 거두로, 수 년 간 사회혁명당을 이끌면서 안드루셴코 정부에서 녹우크라이나의 제7대 총리를 역임했다.
생애
배우 시절의 크리첸코-모힐라 |
모힐라는 1889년 러시아 제국령 극동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에서 우크라이나계 개척민 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교육만 겨우 수료한 그는 10대 중반에 극동 지역 최대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그곳의 한 극장에서 배우로 일했다. 1910년 그는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에 입당하고 우크라이나인 공동체 창립에 관여하였다. 이 시기 그는 우크라이나인 정착촌들을 돌아다니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을 하다가 당국에 체포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징집되어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기까지 약 3년간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으로 복무했다.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자 모힐라는 극동으로 돌아와 하바롭스크에 정착했다. 달변 덕에 대중적 인기를 얻은 그는 하바롭스크 시의회 선거에 출마해 시의원에 당선됐고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의 노동자 대표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후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제헌의회의원 선거에서 하바롭스크 지역에 사혁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사혁당 및 인민전선의 중진이 된 모힐라는 정통 노선인 순정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수정 노선인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주의를 주장하던 코스트 안드루셴코와 경쟁하였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터지자 집권 세력이었던 국민전선과 대통령 모졸레우스키의 지지율이 폭락했고, 모힐라는 인민전선의 우위가 명백했던 1930년 대선에 사혁당 후보로 출마했다. 선거 결과 그는 결선 진출에 실패했고, 경쟁자인 안드루셴코가 1위를 기록해 결선에 진출했다. 모힐라는 안드루셴코의 경쟁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거운동을 지원했고, 이 덕에 안드루셴코의 배려로 하바리우스크 직할시장과 총리를 역임했다.
총리 퇴임 후에는 정계 1선에서 물러나 하바리우스크로 돌아갔다. 하지만 완전히 정계에서 은퇴한 것은 아니었어서 사회당 등 사회주의 정당들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3차 극동전쟁 당시 소련군의 공습으로 인해 자택이 무너졌고, 파편을 맞은 모힐라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끝내 사망했다.
사상 및 이념
소속 정당
소속 정당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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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19337 | 입당 | |
1937-1947 | 합당 |
소속 정당연합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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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1941 | - |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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