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크라이나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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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 제1·6·10대 총리 페디르 페도토비치 다닐렌코 Федір Федотович Даниленко | |
출생 | 1875년 7월 8일 |
러시아 제국 체르니히우 현 두보비 하이 | |
국적 | 러시아 제국 → 녹우크라이나 |
사망 | 1949년 12월 11일 (향년 74세) |
대한민국 한성부 고려대병원 | |
묘소 | 녹우크라이나 볼로디스히드 성 안드레아 사도 국립묘원[1] |
임기 | 제1대 녹우크라이나 총리 |
1918년 4월 17일 ~ 1920년 4월 5일 | |
제6대 녹우크라이나 총리 | |
1930년 5월 2일 ~ 1932년 4월 14일 | |
제10대 녹우크라이나 총리 | |
1937년 7월 9일 ~ 1938년 5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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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녹우크라이나의 동양학자이자 정치가. 흘루슈코-모바 정부, 안드루셴코 정부, 흐레샤티츠키 정부에서 제1·6·10대 녹우크라이나 총리를 역임했다. 녹우크라이나 총리들 중 유일하게 여러 번에 걸쳐 총리를 역임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 녹우크라이나 1공화국 역사를 논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청년기
참으로 지긋지긋하고도 비참한, 가난에 찌든 두보비 하이에서의 어린 시절이었다. 떠올리기도 싫지만 자서전에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아예 안 쓰는 건 부적절하다고 봐 몇 자 적는다. 페디르 다닐렌코, <페디르 다닐렌코 자서전> (1939), 청소년기를 회상하며 |
극동 이주 이전의 생애까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닐렌코 본인의 자서전에도 짤막하게만 언급되어있다.
다닐렌코는 1875년 러시아 제국 체르니히우 현의 두보비 하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머리가 좋았는지 해당 지역의 농업학교에 진학하여 중등교육을 이수한 그는 졸업 후 러시아령 극동의 하바롭스크 지역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 가난에 찌든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싫다며 제대한 후 연고도 전혀 없는 극동의 하바롭스크[3]에 정착해버렸다.
다닐렌코는 그를 도와줄 친족도 친구도 없는,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뻔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보다 먼저 극동에 정착한 우크라이나인들이 만든 우크라이나 커뮤니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커뮤니티의 주선으로 극동 개척 사업에 참여해 아무르 강 유역 포야르코베 인근에 약간의 농토를 얻게 되었다. 다닐렌코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를 하였고, 주경야독의 노력 끝에 러시아 제국 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4]에 수립한 고등교육기관인 동방연구원에 1907년에 입학했다. 다닐렌코는 동방연구원[5]에서 중국 연구부에 속해 공부하였고 이 시기에 결혼도 했다. 1911년에 연구부 차석으로 동방연구원을 졸업하였다.
다닐렌코는 동방연구원 연구과정을 수료한 이후 자신의 농토로 돌아왔고, 포야르코보 지역 우크라이나인 농민 대회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농민대회 대표로서 농업학교 시절 배운 지식을 활용해 농업 투자를 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증대된 농업 생산량은 우크라이나 농민들에게 큰 이익을 안겨주었고, 다닐렌코 그 자신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동방연구소 수료라는 학업적 성취와 농민대회 대표로 얻은 지역 주민들의 지지는 의도치 않게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민족운동에 투신하다
왜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을 해야 하냐고요? 당신이 바로 우크라이나인이니까요. 페디르 다닐렌코, 1908년, 학생회보에 |
다닐렌코는 동방연구원에 입학한 1907년, 우크라이나인 동기인 코스트 안드루셴코, 보리스 보블리 등과 같이 블라디보스토크 우크라이나인 학생회를 만들어 첫 1년간 회장 자리를 맡았다. 다닐렌코는 우크라이나인 학생회에서 동료 회원들에게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을 잃지 말 것과 우크라이나 문화와 언어 보존 운동을 펼칠 것을 격려했다. 학생회는 약 2년간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다닐렌코가 회장 자리에서 물라난 이후인 1909년 러시아 제국 교육부에 의해 불온단체로 지정되어 강제로 해산당했다.
동방연구원 졸업 후 포야르코베로 돌아온 다닐렌코는 지역 농민회를 통해 우크라이나 교과서를 출판하고 이반 프란코 등 우크라이나인 문학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는 등 계속해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을 지속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요주의인물로 지정되었고, 포야르코베 우크라이나인 농민대회 역시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이미 민족주의를 추구하던 블라디보스토크 우크라이나인 학생회를 강제로 해산당한 경험이 있는 다닐렌코는 줄타기를 하며 러시아 당국의 의심을 무마하려고 했고, 덕분에 포야르코베 우크라이나인 농민대회는 해산당하는 신세까지는 면할 수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전체가 혼란에 빠지자 한국은 시베리아 출병을 통해 북방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이에 극동의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자들은 한국의 북방 진출을 돕는 대가로 극동에 우크라이나 민족국가를 건설하고 궁극적으로는 본토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통일을 이루려 하였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다닐렌코 등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하바롭스크에서 건국을 위한 통일된 민족조직인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대회를 조직하였고, 다닐렌코는 대회 부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대회는 극동에 우크라이나 민족국가를 건설할 것과, 임시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조직하기 위하여 빠른 시일 내에 제헌의회 선거를 치를 것을 결의하였다.
1918년 1월, 제헌의회 선거인 제1대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의원 선거가 치러지자 다닐렌코는 자신의 농토가 있는 지역이자 자신이 농민대회 의장을 맡았던 곳인 포야르코베 지역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최고의회에서 교육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맡게 된 그는 그 직후 제헌의원들의 투표에 의해 제헌의회 부의장으로 당선되었고, 이반 하자만 최고의회의원이 주도한 임시헌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총리를 세 번 역임하다
나 페디르 다닐렌코는 녹우크라이나의 총리로서 조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를 보호하고 조국의 영광과 통일을 위해 헌신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엄숙히 맹세합니다. 페디르 다닐렌코의 초대 총리 취임사 |
1918년 6월 최고의회에서의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된 유리 흘루슈코-모바[6]는 최고의회에서의 임명 동의안 가결 가능성을 고려해, 당적도 없고 정치색도 아주 옅은 다닐렌코를 총리로 지명하였다. 1918년 6월 11일, 최고의회에서 다닐렌코 총리 임명안에 대한 표결을 진행한 결과 과반의 찬성으로 안건이 가결되었고, 그 해 6월 17일 다닐렌코는 녹우크라이나의 초대 총리에 취임하였다.
다닐렌코는 이후 약 2년간 총리로 재직하면서 녹우크라이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국가 행정조직을 설계하고 중앙은행 설립을 주도했으며 우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가 많은 성과를 낸 것은 교육 분야로, 그는 전국민 보편교육제도를 설계하고 우크라이나어 교과서 보급을 주도하는 등 교육 역량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약 2년간의 총리 재직 후 제2대 최고의회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총리에서 사임했다. 다만 흘루슈코-모바 대통령에 의해 교육부장관에 임명돼 약 1년간 더 녹우크라이나의 교육정책을 담당했다. 교육부장관의 자리에서 퇴임한 다닐렌코는 그가 수학했던 동방연구원에서 이번엔 가르치는 역할인 교수에 임명되어 1922년부터 중국학 등을 가르쳤다.
풍성하던 시절의 다닐렌코[7] |
대공황의 혼란과 경제 붕괴 속에서 치러진 1930년 대선에서 당선된 코스트 안드루셴코는 여소야대 상황의 최고의회에서 총리 임명 동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정치색이 옅으며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던 다닐렌코에게 총리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다닐렌코는 이를 수락하였다. 1930년 4월 말에 최고의회에서 임명 동의안이 가결되었고 그 해 5월 2일 다닐렌코는 제6대 총리에 취임해 그의 두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다. 이 시기 다닐렌코는 붕괴된 경제를 수습하려 애쓰며 안드루셴코의 온건 사회주의적 정책에 전반적으로 협조하면서도 여권인 인민전선의 과격파의 준동을 제지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였다.
1932년 총선에서 여권 정당연합인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안드루셴코는 사회주의 성향의 하우릴로 크리첸코-모힐라를 총리에 임명하기 위해 다닐렌코에게 사임을 부탁했고, 다닐렌코는 이를 받아들여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다닐렌코에게 미안했는지 안드루셴코는 두 번째 총리 직책을 내려놓은 다닐렌코를 동방연구원장에 임명했다.
1938년, 다닐렌코는 또다시 총리직을 맡게 되었다. 구소련군이 국경을 넘어 녹오-한국 연합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베네딕트 야코벤코 총리가 구소련의 정보기관인 KGB에 의해 암살된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흐레샤티츠키는 야코벤코의 암살로 공석이 된 총리 자리를 한동안 맡아줄 후보를 물색했고, 경험 많고 여야의 지지를 두루 받을 수 있는 다닐렌코에게 총리 자리를 제안했다. 다닐렌코가 이를 수락하면서 그는 제10대 총리가 되었고, 총리만 세 번을 역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세 번째 총리직을 맡은 다닐렌코는 안드루셴코 때와 마찬가지로 흐레샤티츠키의 정책에 전반적으로 협조하였다. 다만 그는 구소련의 위협을 과소평가하였는데, 이는 훗날 치명적인 실수가 되고 말았다. 대공황의 여파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자 흐레샤티츠키는 군비 증강을 원했지만 다닐렌코는 경제 부양이 우선이라며 흐레샤티츠키의 정책을 막아섰다. 결국 다닐렌코는 군사정책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인해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지 1년도 안 되어 사임하였다.
전쟁, 망명 그리고 사망
10대 총리 자리도 내려놓은 다닐렌코는 건강이 악화되어 우수리 강변의 별장에서 요양하였다. 그러다가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닐렌코는 충격으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녹우크라이나의 패색이 짙어지자 다닐렌코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족과 함께 국경을 넘어 한국으로 피난하였고 녹우크라이나가 구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자 한성에 자리를 잡아 말년을 보냈다. 그는 구소련의 침략 가능성을 과소평가해 나라가 망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다른 망명 우크라이나 고위층과는 다르게 외출을 끊고 자택에 칩거하였다. 계속된 자책과 단절된 인간관계로 인해 우을증에 걸리고 만 그는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보냈고 결국 1949년 한성 고려대학교병원에서 급성 간염으로 사망했다.
여담
- 대중적으로는 학자 다닐렌코보다 정치인이자 만년총리 다닐렌코가 더 유명하지만, 정작 다닐렌코 본인은 생전에 스스로를 정치인이 아니라 학자에 더 가깝다고 여겼다. 또 녹우크라이나 총리를 세 차례 역임한 사실보다 동방연구원 원장을 역임한 사실을 더 자랑스레 여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유지에 따라 성 안드레아 사도 국립묘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약력란에 ‘녹우크라이나 총리’는 작은 글씨로, ‘동방연구원장’은 큰 글씨로 쓰여있다.
대중매체에서
선거 이력
선거 | 정당 | 연합 | 선거구 | 득표율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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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총선 | 무소속 | 무소속 | 포야르코베 지역 | 1차: 42.9% (1위) |
당선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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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61.2% (1위) |
소속 정당
소속 정당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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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 1917 - 1949 | 정계입문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