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호네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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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 연방 최고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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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서기국 서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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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서기국 서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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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지도자 · 의장 (국가원수) · 서기장 (정부수반) · 당대회 의장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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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지도자 · 의장 (국가원수) · 서기장 (정부수반) · 당대회 의장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중앙서기국 서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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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라트 연방의 정치가.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제15대 중앙서기국 서기장과 당 의장을 지냈으며, 라트 연방의 7대 최고지도자를 역임하였다. 재임 도중 미국과의 파워게임을 통해 미국과 제국주의 진영을 굴복시키고 사회주의 진영의 승리로 냉전을 끝낸 지도자로 기억된다. 그의 정책은 데탕트와 장기적 침체 국면에 빠져 있던 라트 연방에 다시 활기를 가져왔다고도 평가받지만, 엄격한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와 보수적 통치로 인하여 부정적인 평가 역시 병존하고 있다.

생애

젊은 사회민주주의자

1912년 8월 25일 독일제국 자를란트 주 노이엔키르헨에서 광부이자 공산주의자인 빌헬름 호네커(Wilhelm Honecker, 1881–1969)와 카롤리네 카타리나 바이덴호프(Caroline Catharina Weidenhof, 1883–1963) 부부의 4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6남매 중 첫째인 카타리나(Katharina, 1906–1925), 둘째인 빌헬름(Wilhelm, 1907–1944), 막내인 카를로베르트(Karl-Robert, 1923–1947)는 다들 요절했고 셋째인 프리다(Frieda, 1909–1974)와 다섯째 게르트루트(Gertrud, 1917–2010)만이 에리히와 함께 오래 살아남았다.

그는 유년기에 1919년 독일 혁명을 경험했으며,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따라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지지자로 거듭났다. 또 그가 어린 시절 프랑스 정부가 베르사유 조약 미이행을 이유로 루르 지역을 무력으로 점거해 광부인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 역시 그의 강경한 마르크스주의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0살 생일 직후 스파르타쿠스 연맹 비벨스키르헨(Wiebelskirchen) 지구 소년단에 들어갔다. 1926년, 14살의 나이로 사회민주당의 청년 조직인 젊은 사회주의자(Jusos)에 입단했고 2년 후인 1929년에는 정식 사회민주당이 되었다.

청년 조직에서 활동

1930년대부터 사회민주당에서 촉망받는 젊은 정치가로 주목받았던 호네커는 당 내에서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좌파로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때 참전하여 정치장교로 동부전선에서 싸웠는데, 우크라이나 서부 공세 도중 러시아군의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그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2년간 시베리아의 강제 형무소에서 러시아의 잔혹한 고문과 강제노동에 시달렸지만, 그것은 호네커의 의지를 꺾지 못했고, 오히려 꺾이지 않는 신념과 의지로 감옥에서 동료 독일인들에게 귀감이 되기도 했다. 호네커는 라트 연방 측에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1944년 라트 연방군이 호네커가 수감된 형무소를 해방시켰을 때 그는 이미 라트 연방에서 가장 유명한 청년 사회민주주의자 중 한명이 되어있었다.

종전 후, 그는 베를린 중앙당에서 사회민주당의 당무를 맡았으며, 사회민주당 청년 조직의 수장을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약 10년간 지내며 차기 지도자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보수적인 파벌에 속해있었고, 당내 개혁주의의 반대파로 명성을 얻었다.

1968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관료 투쟁 당시, 호네커는 괴벨스의 편을 들어 시위를 비판하고 개혁주의를 배격해야한다는 입장을 냈지만, 이는 청년당원 사이에서 심하게 인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중년 당원이 되어있던 호네커는 보수파의 대표격인 인사로 찍혀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정권과 헤르베르트 프람의 정권에서 중책을 맡지 못했고, 연방 건설부 장관 등의 한직을 전전해야했다.

정권을 잡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정권을 잡은 헤르베르트 프람의 정권은 라트 연방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좌파적인 개혁을 여럿 내놓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과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정권의 지지도는 점차 하락했다. 더구나 프람의 개인 비서관 중 한명이 MI5의 요원이라는 사실이 발각된 권터 기욤 사건이 터지면서, 프람은 내부적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었다. 결국 1980년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제24차 대회에서 프람은 서기장 3선을 포기했다. 호네커는 보수파의 거두로서 자연스럽게 차기 서기장 주자로 주목받았으며 내부 표결에서 잡음 없이 개혁파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좌파의 울리케 마인호프를 누르고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최고 지도자로서 정책

내부 정책

제국주의와 맞서다

서기장 퇴임 이후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소속 정당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