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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 연방 초대 국방장관 레프 트로츠키 Lev Trotsk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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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Лев Дави́дович Бронште́йн) | ||||||||||
출생 | 1879년 11월 7일 | ||||||||||
러시아 제국 헤르손 (現 우크라이나 SRR 트로츠키) | |||||||||||
사망 | 1956년 12월 25일 (향년 77세) | ||||||||||
우크라이나 SRR 트로츠키 | |||||||||||
국적 | 러시아 제국 → 라트 연방 ( 우크라이나 SRR) | ||||||||||
묘지 | 베를린 영웅묘지 | ||||||||||
재임기간 | 독일 평의회 공화국 초대 국방장관 | ||||||||||
1919년 2월 1일 ~ 1924년 12월 29일 | |||||||||||
라트 연방 제2대 내무장관 | |||||||||||
1926년 7월 10일 ~ 1927년 5월 15일 | |||||||||||
라트 연방 제4대 외무장관 | |||||||||||
1927년 5월 16일 ~ 1934년 11월 30일 | |||||||||||
라트 연방 제4대 국가과학연구장관 | |||||||||||
1934년 12월 1일 ~ 1939년 10월 19일 | |||||||||||
라트 연방 제7대 국무장관 | |||||||||||
1939년 10월 20일 ~ 1945년 9월 31일 | |||||||||||
서명 | |||||||||||
별명 | 페로 (Перо) 안티트 오토 (Антид От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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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라트 연방의 혁명가, 정치인. 내무장관, 국무장관, 외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영구혁명 이론으로 알려져있다.
생애
1879년 헤르손에서 유대인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레이바 다비노비치 브론시테인으로, 러시아어로는 "레프 브론스타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9살에 그를 독일계 루터 학교로 보냈으며 트로츠키는 여기서 독일어를 포함한 많은 언어와 문화를 학습하고 국제주의자로 각성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국제주의적 학생운동을 전개했으며, 차르정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처음에는 나로드니키였으나 이후 공산주의자로 전향했고, 러시아의 사회주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1900년, 공산주의 활동을 이유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형무소로 유배되었다. 1902년 시베리아에서 탈출한 브론스타인은 간수의 이름을 딴 트로츠키라는 가명을 쓰게 되었다. 그는 탈출 후 망명생활 도중 화려한 언변과 필력으로 주목받았는데, 사회민주당의 기관지 <불꽃> (Искра, 이른바 "이스크라")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할뻔 했다.[1]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연합하여 율리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와 대항하는 볼셰비키를 구성했다. 처음에는 트로츠키도 멘셰비키에 속했으나, 혁명 직전의 순간에 볼셰비키에 참여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반전 운동을 벌인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미국으로 추방당했고, 1917년 5월이 되어서야 러시아로 귀국할 수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은 부르주아의 혁명이었지만 케렌스키 정부는 군부와의 연합을 바탕으로 점차 전제적인 정치를 펼쳤다. 트로츠키는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자는 급진적 혁명파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옛동지 플레하노프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배반으로 11월의 혁명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블라디미르 레닌도 암살당했다. 결국 트로츠키는 조국을 등지고 독일로 밀입국했다.
1918년, 독일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사회민주당 급진파를 구성해 곧바로 연속혁명으로 나아가자는 입장에 섰다. 1919년 1월 일어난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은 성공적이었다. 트로츠키는 초대 군사위원장으로서 흑적내전의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독일어에 능숙했던 그는 일선 장교들을 선동하는 역할을 맡았고, 정치장교라는 직책을 만들어냈다. 그는 군사위원장으로서 매우 잔혹하기로 악명높았는데 배신자가 나오는 부대에서는 20명 중 1명을 무작위 처형했고 농작물을 무단 징발하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로 농민들의 공적이 되었다. 또 비밀국가경찰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페우카를 창설했다. 하지만 그는 유능한 지휘관이었고, 흑적내전에서 적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혁명이 끝난 후인 1926년, 그는 프란츠 메링을 이어 약 2년간 제2대 내무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내무장관으로서 비밀국가경찰의 권한을 강화하고 "반동"을 축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당 내에서 반대파가 다수 존재했기 때문에 내무장관으로서 평가는 좋지 못했고, 불과 2년만에 장관 직위를 내려놓아야했다. 1928년 룩셈부르크는 그를 외무장관 직위로 옮겼다. 당시 외무장관은 공식 명칭으로 외무인민위원 겸 대외위원장으로서 통상적 외무 업무만큼이나 국제혁명 수출에 신경을 써야하는 직책이었다. 그는 외무장관으로서 전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혁명을 수출하는 업무를 맡았고, 이따금 베르사유 조약의 처리 문제로 독일에 입국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제3세계에 있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영구혁명론"을 창안하였다.
영구혁명론은 단 하나의 국가로만은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수 없으며, 국제적 외교에서 포위되어있는 라트 연방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전세계를 사회주의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론이다. 즉, 프랑스와 영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공산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에서 혁명을 추동하여 제국주의를 감싸는 피식민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의 동맹을 통하여 영구혁명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이는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 등과는 대립했다. 더구나, 1934년 프랑스에서의 사회주의 봉기가 실패하고 샤를 모라스의 파시즘당이 집권하자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그는 1934년 외무장관 직위에서 사실상 해임되었고, 한직인 국가과학연구인민위원으로 좌천당한다. 다만 한직으로 밀려난 덕에 대테러의 광풍을 피할 수 있었다.
트로츠키와는 하등 상관 없는 직책이었지만 그는 여기서도 열성적으로 활동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 유명한 과학자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는 라트 연방의 핵개발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남극 탐험과 펭귄 연구에 공을 들였다. 트로츠키는 1937년 남극 탐험대를 보낸 후 남극 지역에 "노이슈바벤란트"를 선포하기도 했다. 해당 지역은 현재 트로츠키를 기리는 의미에서 브론슈타인란트라고 개칭되어있다.
1939년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급하게 국무장관으로 선임되었다. 국무장관은 당의 인사를 총괄하는 직책으로서, 당시에는 당 내 서열 3위에 해당했다.[2] 그는 전쟁에 필요한 인사들과 배제해야할 인사를 골라내어 적재적소에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도왔고, 그의 도움으로 1945년 라트 연방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꺾고 전쟁에서 승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국이었던 러시아를 공격한 사실로 인하여 매국노로 매도당하기도 하였다.[3]
그는 1949년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사망했을 때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트로츠키는 이미 70세의 노인이었다. 그는 당에 은퇴 사실을 전한 후, 우크라이나 헤르손에 위치한 작은 저택에서 집필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56년 사망했다. 그는 말년에 영구혁명론을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나아가 다당제와 서기장 직선제를 전제로 한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때의 모든 저작들은 그의 사후 30년 후인 1986년 "트로츠키 전집"으로 출간되었다.
평가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과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 그리고 비밀경찰의 아버지로서 잘 알려져있다.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함께 공산주의 행정의 대부로도 평가받으며, 지나치게 가혹한 엘리트주의라는 평과 꺼지지 않는 당의 불꽃이라는 평이 공존한다.
고향 우크라이나에서는 평이 아주 좋다. 러시아의 압제로부터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킨 고향 사람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그의 고향인 헤르손은 그의 사후 도시 이름이 "트로츠키"로 개칭되었고, 시청 앞에 트로츠키의 동상이 세워졌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평가가 박하다. 러시아인이면서도 조국을 배반하고 독일을 도와 러시아를 공격했다는 이유에서다.
서구권에서는 토니 클리프가 트로츠키의 후계자로 알려져있지만, 실제 성향은 트로츠키와 차이가 있다. 조선의 군소정당 중 하나인 다함께당은 클리프의 노선을 따르는 당이다.
소속 정당
여담
-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정체성을 갖지 않았다. 종교도 유대교가 아니었고 시오니즘에 극렬히 반대한 인물이었다.
- ↑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반대로 편집위원이 되지는 못했다.
- ↑ 현재도 5위에 해당하는 높은 직책이다.
- ↑ 다만 그의 고향인 우크라이나 지방은 러시아를 싫어하는 친사회주의 성향 시민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고로 그는 그의 고향에서 매우 존경받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해방자"로 칭송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