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네메트



라트 연방 최고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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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인민위원장
로자 룩셈부르크
2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그레고어 슈트라서
3대
중앙위원회 의장
파울 요제프 괴벨스
4대
서기장 대행
발터 셸
5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6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헤르베르트 프람
7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
8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보이트케 야루첼스키
9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니콜라스 네메트
10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그레고어 기지
11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게르하르트 슈뢰더
12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앙겔라 메르켈
13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자라 바겐크네히트
프랑크 · 동프랑크 · 신성 로마 · 라인 동맹 · 독일 연방 · 북독일 연방 · 독일 제국 · 바이마르

최고 지도자 · 의장 (국가원수) · 서기장 (정부수반) · 당대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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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중앙서기국 서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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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라트 연방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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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개국 100주년을 맞아 지상파 방송사 ARR이 전체 언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라트 연방의 인물’을 선정.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투표가 진행됐으며 라트 연방 인구 3억 5,000만 명 중 2억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1919년 이전에 활동한 인물의 경우 후보에서 배제되었다.
상위 10인
1위 2위 3위 4위 5위
로자 룩셈부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게오르크 루카치 발터 벤야민 안드레이 사하로프
6위 7위 8위 9위 10위
카렐 코지크 아돌프 히틀러 헤르베르트 프람 에르빈 롬멜 클라라 체트킨
11위 ~ 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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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위대한 독일인 (ZDF)

라트 연방 제9대 최고 지도자
니콜라스 네메트
Nikolas Németh
헝가리어 이름
네메트 미클로시
(Németh Miklós)
출생 1948년 1월 24일 (76세)
헝가리 SRR 보르쇼드어버우이젬플렌 모노크
사저 헝가리 SRR 부다페스트
국적 라트 연방 ( 헝가리 SRR)
재임기간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제17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1992년 5월 1일 ~ 2000년 4월 30일
서명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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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라트 연방의 경제학자, 정치가. 집권 당시 불과 44세로 라트 연방 역사상 최연소 최고지도자였다. 라트 연방의 정치가로서는 드물게 부르주아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상당한 우파 성향을 띄었다. 개혁파의 대표격인 인물로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니콜라스는 독일어 이름으로, 헝가리어 이름은 미클로시(Miklós)이다. 성 네메트는 독일인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니콜라스 도이처(Nikolas Deutscher)라고 직역하기도 하는데 잘 쓰이지는 않고 그를 싫어하는 헝가리 좌파들이 멸칭으로 자주 사용한다.

생애

젊은 경제학자

1948년, 가난한 가톨릭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따라서 네메트도 어린 시절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다. 네메트는 후일 자신의 부모님이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라고 회고했다.

1968년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기독교가 심하게 공격받자, 그는 학문으로 도피해 경제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집권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비록 그 자신이 사회주의 경제학자이긴 했으나 다양한 학파의 경제학을 공부해야한다는 명목으로 부르주아 경제학 강의의 신설을 추진했다. 이에따라 니콜라스 네메트는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부다페스트 캠퍼스에서 개강된 부르주아 경제학의 첫번째 수강생이 되었다. 당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대학교 내에서 삼반오반운동, 반우파 투쟁이 거셌을 때라 부르주아 경제학을 들었던 학생이 자신을 포함해 3명 뿐이었다고 한다.

니콜라스 네메트는 학생 운동권 사이에서 부르주아지라고 비난받으며 따돌림당했으나, 학업 성취가 우수해 하버드 대학교로 유학을 갈 기회를 얻었다. 그는 50년만에 라트 연방에서 나온 미국 유학생이었다. 그곳에서 네메트는 의사 결정 이론, 비용-편익 분석을 공부해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7년 귀국한 네메트는 국가계획사무소에서 일하는 한편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부다페스트 캠퍼스에서 한 명 뿐인 부르주아 경제학 전담 교수가 되었다. 1979년, 그는 정식으로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었다.

헝가리 재무장관

최연소 서기장

개혁에 박차를 가하다

1992년 집권한 네메트 서기장은 네메트 개혁이라는 대규모 정치, 사회, 경제적 개혁을 추구했다. 이는 라트 연방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개혁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성공한 개혁을 따지자면 전국적으로 컴퓨터를 보급했고 경제 전산화를 마무리했다. 또 에너지 전환 정책에 따라 신재생 에너지가 빠르게 도입되었다. 슈타지의 권한은 축소되었고, 언론 보도지침도 폐지되었다.

네메트는 과거사 청산 계획의 일환으로 안드레이 사하로프에게 영웅훈장을 수훈하고, 핀란드 북극지대 수용소를 폐소하고 대테러를 추모하는 박물관을 건설했다. 이러한 결정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반면 실패한 개혁도 많았다. 대 라트 합중국이나 다당제 및 서기장 직선제 개헌 등이 그 예시다.

인기 하락과 퇴진

퇴임 이후

2000년 퇴임한 후, 그는 부다페스트와 베를린을 오가며 경제 고문으로 활동했고, 당의 원로로서 이따금 목소리를 내는 것을 제외하면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2004년, 그는 사회민주당 내에서 다시 정치를 시작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지만 단념했다고 한다.

2010년, 그는 요제프 라칭거(이른바 베네딕트 16세)와 만남을 가진 후, 공개적으로 그가 천주교 신자로 복귀했음을 밝혔다. 이 결정에 대해 평가는 엇갈렸으며 이로서 그는 라트 연방 역대 최고 지도자 중에서 유일하게 종교를 가진 인물이 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