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의 괴뢰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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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사오이 정권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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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中華民國 | Republic of Chin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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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괴뢰국 | |||||||||||||||||||||||||||||||||
국기 | 국새 | ||||||||||||||||||||||||||||||||
新民主義 신민주의[1] | |||||||||||||||||||||||||||||||||
1940년 ~ 1945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중화민국 임시정부 | 중화민국 국민정부 | ||||||||||||||||||||||||||||||||
중화민국 유신정부 | |||||||||||||||||||||||||||||||||
국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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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중화민국 난징 민국정부(中華民國南京民國政府) 또는 탕사오이 정권(唐紹儀政權)은 북양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탕사오이가 일본측의 공작에 따라 포섭된 이후, 1940년 3월 30일 기존 자신이 수반으로 있던 중화민국 유신정부와 화북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몽강연합자치정부를 병합하여 건국한 괴뢰국이다. 그 후 탕사오이는 스스로 주석이 되어 일본 제국과의 화친과 민주, 반공을 내세웠다. 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불리해지자 자연스럽게 탕사오이 정부 역시 쇠퇴하였고, 탕사오이의 사망 이후에도 간신히 유지되었으나 1945년 1n월 nn일 해군부장 런위안다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충칭 국민정부에 복종을 선언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사
정치
탕사오이 정권은 훈정을 표방하며 당국 체제하에 일당 독재가 시행되던 충칭 국민정부와 대비되는 다당제 민주정부를 표방하였다. 이는 충칭 국민정부의 독재정과 대조되는 민주정을 채택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탕사오이 그 자신이 호법운동과 국민당 반장파에 참여한 전적이 있는 친 민주 인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탕사오이 정권은 자신들이 국민정부와 달리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신해혁명으로 성립된 중화민국의 적통이라고 선전하며 쑹칭링, 황옌페이, 장란, 선쥔루, 후스 등의 명망높은 민주파 인사들을 포섭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민주정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탕사오이 정권은 실질적으로는 과두정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정권의 수장인 탕사오이 본인은 일관되게 민주정을 주장하였으나 실상은 정권의 실권을 쥔 지나 파견군과 일본인 고문들 그리고 군정부장으로서 군권을 장악한 국민군[6] 출신 스여우싼과 화북정무위원회 및 남방계 금융인들이 끊임없이 알력 다툼을 이어가며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탕사오이가 군벌시대 실권자의 필수요소인 군권과 금권, 파벌 이 셋 중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일본군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였기 때문이었다. 전신인 유신정부 성립년도인 1938년 기준 2년 전인 1926년부터 탕사오이는 정계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회 원로의 위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기에 그는 필연적으로 여러 세력에 의해 휘둘리며 정부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난징 민국정부 설립 당시 탕사오이는 전국 총선거까지는 아니더라도 행정권이 미친다고 판단되는 화북과 화동 지역에 대해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의회를 구성하고 그 의회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몽강을 통제하는 북지나방면군과 화북 정권은 이 구상을 극렬히 반대하였으며 결국 그는 화북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자신의 기반인 유신정부, 그리고 몽강의 왕공족들이 각각 1/3씩 지분을 가진 회의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이마저도 화북 임정은 화북정무위원회로, 몽강국은 몽골 자치방(蒙古自治邦)으로 따로노는 되다만 국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시작부터가 이모양 이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리는 만무했다. 탕사오이 정권은 본래 북양정부의 적통을 자처하며 초기 북양정부처럼 집정을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하고 국무총리가 실권을 쥔 내각제 국가로 기획되었으며 국무총리는 참의원(상원)과 중의원(하원)으로 구성된 의회의 신임을 받아 내각의 각 부처를 통할하게 할 예정이었다. 또한 사법부 역시 보통의 삼권분립 민주국가처럼 독립된 상태로 존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파벌 다툼과 악재가 겹치며 내각과 총리에 정통성을 부여해줄 중참 양원의 구성이 불가해지자 내각제 구상은 틀어지게 되었고 결국 주석이 실권을 쥔 대통령제 국가 비슷한 체제가 되어버렸다. 또한 의회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의회에 의해 선출될 내각과 헌법, 법률 역시 존재 할 수 있을리가 없었고 결국 주석이 그 성원들을 임명하는, 입법부와 행정부를 결합한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중앙정치위원회의 정령으로 통치되는, 오히려 국민정부보다도 더욱 기형적인[7] 독재국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또한
군사
경찰
76호실
외교 및 이념
주요 인사
참고문헌
매체에서
여담
- ↑ 1.0 1.1 중국국민당의 삼민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일본 제국에서 중국의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만든 새로운 이념.
- ↑ 탕사오이 정권이라고도 하지만 이건 한국에서의 주 사용명칭이고, 중국에서는 탕사오이 민국정부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 ↑ 정부 직할 영역.
- ↑ 화북정무위원회 영역.
- ↑ 몽골 자치방 영역
- ↑ 펑위샹계 서북군벌.
- ↑ 국민정부 역시 정식 헌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인 일당 독재 국가였으나 최소한 헌법의 역할을 하는 중화민국훈정시기약법(中華民國訓政時期約法)에 의한 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명목상이라고 해도 입법 행정 사법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