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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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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 朝鮮人民軍 Korean People's Arm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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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조선 |
소속 | 조선로동당, 민족보위성 |
통수권자 | 최고사령관, 중앙군사위원장 |
현임 | 최룡해 |
지휘·감독권자 | 민족보위부장 |
현임 | 김승겸 |
군령권자 | 총참모장 |
현임 | 리영길 |
군정권자 | 총정치국장 |
현임 | ○○○ |
병력(평시) | 410,000여 명 (2023년 1월 기준) |
예비병력 | 7,620,000여 명 (2023년 1월 기준) |
병역제도 | 징병제 |
육군력 | |
병력 | 205,000여 명 |
전차 | 1,880대 |
장갑차 | 17,500여 대 |
야포/다련장 | 6,480여 문 |
유도탄 | 80여 기 |
헬기 | |
해군력 | |
병력 | 98,400여 명 |
전투함정 | |
상륙함정 | |
기뢰전함정 | |
지원함정 | |
잠수함정 | 31척 |
항공기 | |
공군력 | |
병력 | 106,600여 명 |
전투임무기 | |
공중기동기 | |
감시통제기 | |
훈련기 | |
헬기 | |
지대공 미사일 | |
예산 | |
국방비 | 3,931,838,231,663원 (2024년 본예산) |
개요
조선인민군은 항일혁명투쟁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한 조선로동당의 혁명적무장력이다. 조선인민군은 모든 군사정치활동을 당의 령도하에 진행한다.
조선인민군은 조선의 국군이자 조선로동당의 당군이다. 육군과 해군, 공군, 내무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줄여서 조선군, 인민군이라고도 한다.
역사
창건
조선인민군 창건 기념 열병식[1] |
북조선 지역 내에 있는 무장단체를 해산하고 무기와 탄약 등 군용물자를 소련군에게 반납하여야 하고, 평민 중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규정된 인원수의 '보안대'를 조직할 것을 허락한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
조선인민군의 시초는 왜정시대 일제에 대항하던 조직적 빨치산과 의병들로 왜정시대 말에 들어서면서 더욱 거대해지고 체계적으로 변한 의병 중 좌익 계열의 의병이 현 조선인민군의 기반이 되는 조직들이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0월 12일, 조선반도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제25군 사령부의 명령 하에 기존 조선 내에 있던 의병 조직은 모두 해산되었으며 이들은 진남포에서 보안대(保安隊)라는 하나의 조직으로 동년 10월 21일에 통합, 창설되었다.
1946년 1월 11엔 철도 관련 업무만을 관장하기 위한 집단으로 철도보안대(鐵道保安隊)를 창설하였으며 기존 보안대의 철도 관련 업무는 전부 이곳으로 이관되었다. 이들은 46년 7월 기존 도에 설치되어 있던 철도보안대를 통합하여 철도경비대(鐵道警備隊)라는 조직으로 새롭게 개편되었으며 이들은 8월 15일 보안간부훈련대대부(保安幹部訓練大隊部)로 예속된다.[2] 1946년 2월과 6월엔 군사 및 사상 교육과 장교 양성을 위해 평양학원(平壤學院)과 보안간부훈련소(保安幹部訓練所)가 설립되었으며 이들은 곧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北朝鮮中央保安幹部學校)라는 하나의 기관으로 통합되어 조선인민군 초기 군 장교 양성을 위한 중요한 교육 시설이 된다.
1948년 2월 4일엔 현 민족보위부의 전신 기관인 민족보위국(民族保衛局)이 창설되었다. 마침내 4일 후면서 건국 7개월 전인 1948년 2월 8일엔 조선인민군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3] 1949년 7월에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출신 병력이었던 중국 인민해방군 166사단과 164사단이 조선인민군에 합류, 각각 6사단과 5사단으로 개명하여 2만의 병력이 합류하였으며 1950년 4월에는 156사단이 합류, 12사단으로 개명하여 1만 4000의 병력이 추가로 합류하였다. 이들은 이후 조선전쟁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게 된다.
조선전쟁 시기
조선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은 압도적인 병력[4], 소련으로부터 지원 받은 T-34 전차 부대, 중일전쟁과 만주 빨치산 시기 활약했던 명장들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대한민국 국군은 전쟁 개전 당시,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어느 면에서 조선인민군보다 우위를 점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잃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직후 이어지는 춘천-홍천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해당 전투에서 승리한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충청, 경기 북부로 우회하여 수원에서 전선을 구축하던 대한민국 국군을 포위하는 꼴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해당 전투에서 제2군단도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어 수원에서 빠르게 후퇴하던 대한민국 국군을 간발의 차로 가로막지 못하여 이들의 주요 병력을 섬멸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5]
그러나 이들은 무주공산과도 같았던 호남 지대를 단숨에 점령하여 호남의 넓은 곡창지대를 통해 보급을 정상화했으며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영남까지 전속력으로 전진하여 마산 전투, 다부동 전투, 영천-신녕 전투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이를 통해 조선인민군은 대구를 서, 남, 북으로 포위하여 협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구 전투 과정에서 조선인민군은 대구를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하여 당시 대구에 위치해 있던 대구 공군기지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당시 그나마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의 항공 전력을 상당 부분 무력화시킨다.
결국 미군과 유엔은 더 이상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만을 이끌고 피난민 수십 만과 함께 제주도로 피신하여 임시정부를 차리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국부천제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는 경상남도의 거제도와 전라남도의 일부 부속도서, 제주도를 제외한 조선반도에서의 모든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당시 최고사령관 김일성이 조선인민군 점령 하의 부산에서 전쟁의 승리를 선언하게 되어 결국 조선전쟁은 조선의 승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냉전 시기
조선전쟁 이후에도 조선인민군은 여러 차례의 실전을 겪으면서 그 내실을 길러온다. 1951년부터 1952년, 1957년까지 두 차례의 거제 상륙작전을 펼쳤으며 1958년에는 진도 포격전을 벌였다. 국외로 나가면 이들은 '지원군' 명목으로 베트남 전쟁에 소련, 중국과 같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 함께 개입하여 북베트남군과 함께 남베트남군과 미군을 상대로 전투하였다. 특히 조선은 중국 다음가는 규모의 지원을 하였는데 이 중에서 특히 전투기 조종사들을 많이 파견하였으며 이렇게 파견된 조종사들은 MiG-21에 올라타 미 공군과 싸우며 북베트남군을 지원하였다.
현재
수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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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1월 기준 |
편성
해체된 부대
전쟁 및 참전 경력
조선의 대내외 전쟁·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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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계급
군관 계급
수관급
장성급
좌관급
위관급
사관 계급
병사 계급
병과
교육 및 훈련
양성교육
보수교육
복제(服制)
정복을 착용한 조선인민군의 모습 |
인민군의 역대 군복들은 1948년 건군 이래 현재까지도 소련군의 복식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건군 초기에는 키텔(Китель) 튜닉 형태의 정복과 프랑스의 케피(Képi)식 전투모가 배급되었다. 전방부 전투부대에게는 소련제 철갑모도 보급되었으나 대부분의 군부대에는 케피식 전투모가 배급되었으며 그 이미지가 유엔군을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크나큰 인상을 주게 되어 조선전쟁을 다루는 각종 매체에서 출현하는 인민군은 주로 갈색의 키텔 튜닉 전투복과 케피식 전투모를 쓴 차림으로 나온다. 여기에 소위 '따발총'이라고 불리는 49식 기관단총까지 쥐어주면 금상첨화.
1958년 전투복 디자인이 한 번 변경되었다. 상시 착용하던 견장은 열병식과 같은 행사에서만 착용하도록 바뀌었으며 평시에는 목깃에 다는 금장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이전에는 군관들이 착용하던 스탠딩 카라가 폐지되고 병사와 군관 모두 셔츠형 카라로 통일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소련에서 활용하던 덧옷 형식의 덕 헌터 패턴 위장복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그 이전에는 상의에 달린 줄에 나뭇가지나 풀 등을 달아 위장을 했다.
특징
전력
조선인민군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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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출신 인물
비판 및 문제점
사건·사고
기타
해외에서의 인식
매체에서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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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가 제정 이전에 사용되었던 올드 랭 사인 애국가가 나온다.
- ↑ 이 보안간부훈련대대부는 1947년 5월 17일 북조선인민집단군총사령부(北朝鮮人民集團軍總司令部)로 개편되어 현 조선인민군 참모조직의 전신이 된다.
- ↑ 현 조선은 조선인민군이 창설된 2월 8일을 조선인민군 창건일, 일명 건군절이라 하여 공휴일로 기념하고 있다.
- ↑ 1950년 개전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병력 수는 64,697명이었으나 조선인민군의 병력 수는 135,438명으로 2배 이상의 압도적 병력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 ↑ 그러나 이는 후일 미군이 조선인민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다'고 오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후일 다부동 전투를 비롯한 낙동강 방어전에서 조선인민군에게 대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