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 순황제 (플레이백)

솔피 (토론 | 기여)님의 2026년 5월 26일 (화) 23:4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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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は昨夜のあなたのセリフ
이건 어젯밤 당신이 했던 말
強がりばかり言ってたけれど
강한 척 하며 말은 했지만
本当はとても淋しがり屋よ
사실은 굉장히 외로움을 잘타는 사람이에요
坊や、いったい何を教わってきたの
꼬마야, 대체 뭘 배워 온 거니
私やっぱり、私やっぱり、帰るわね
나 그냥 역시, 나 그냥 역시, 돌아갈테니
あなたのもとへ
당신의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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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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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초대 황제
고조 순황제 | 高祖 純皇帝
재록(載錄) → 재면(載冕) → 희(𤏴)
출생 1845년 7월 20일
한성부 정선방 구름재동 흥선군저
(現 황성 한성부 종로구 운현궁)
붕어 1912년 9월 9일 (향년 67세)
황성 한성부 중구 경운궁
재위기간 조선 제25대 국왕
1872년 7월 28일 ~ 1895년 1월 12일 (22년)
대한제국 초대 황제
1895년 1월 12일 ~ 1912년 9월 9일 (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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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생부 흥선헌의대원왕
생모 여흥순목대원비

양부 문조 익황제
양모 신정익황후
형제자매 3남 3녀 중 장남
황후 문성왕후 김씨
자녀 장남 목종 헌황제
차남 완친왕
종교 유교 (성리학)
무경(武卿)
우석(又石)
묘호 고조(高祖)
봉호 완흥군(完興君)
존호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
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
(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
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
(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
시호 문헌무장인익정효순황제
(文憲武章仁翼貞孝純皇帝)
연호 건원(建元, 1912)
계급 대원수

개요

대한제국의 초대 대황제.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순황제(純皇帝), 휘는 재면(載冕)이었으나 왕이 된 후 피휘 문제로 개명했다. 헌조의 뒤를이어 조선의 근대화 시기 군주로 군림하며 독립을 유지하는 업적을 세웠다. 고조 재위 기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성장하였고 영토는 나날이 팽창하며 건원지치라 불리며 숭상되고 있다.

생애

즉위 이전

1845년(헌종 11) 음력 7월 20일 한성부 중부 정선방 돈녕부상계 니동(現 황성 한성부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에서 흥선군(훗날의 흥선대원왕)과 현부인 여흥 민씨(훗날의 여흥부대부인) 사이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잠깐 둘째 큰아버지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출계하여 완흥군의 봉호를 받는 등 평범한 왕족의 삶을 살았다.

지존이 되다

그러던 1872년 헌조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완흥군의 운명이 급변한다. 왕위 계승의 법칙 상, 후임 왕은 반드시 선왕의 아랫대나 최소한 같은 항렬에서 나와야 했고, 덕평군이나 흥선군과 같은 향렬은 왕이 될 수 없었다.

헌종이 사망할 당시 왕손들은 모두 족보상 사도세자의 후손들이었으며, 정확히는 사도세자의 서자 3명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후손들이었다. 철종의 조카뻘 왕손들은 은언군 계열인 재덕(덕안군), 재성(경은군), 은신군 계열인 재원(완림군), 재긍(완영군), 재면(고조), 재황(완순군), 재선(완은군), 은전군 계열인 재근(인양군)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혈통상 가장 근친은 재성과 덕평군, 완평군이었으나, 재성은 서출에 영조의 5대손으로써 왕족의 지위가 아니었고, 둘은 향렬이 역행하여 왕이 될 수 없었다.

이렇듯 효종 계통이 실질적으로 계승에 무리가 있고, 사도세자의 후손들 모두 양자인 상황에서, 혈통 상 가장 서열이 높은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적장손을 옹립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이렇게 되자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인 은신군 - 남연군의 후손들 중에서 다음 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연군의 후손들은 많았고, 그 중에서 재면이 국왕으로 선택된 것은 전적으로 흥선군의 정치적 로비 덕분이었다. 흥선군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종법상의 서열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들 재면을 왕으로 세우는 방안을 택했다.

그렇다면, 흥선군은 왜 차남 재황이 아닌 장남 재면을 내세웠던 것일까. 종법제 하에서 적자가 한 명만 있을 경우, 입양시키지 않고, 차자가 입양되는 관습이 있었지만,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었으며, 새로 입적하는 집안이 본가보다 서열이 더 높다면, 적통 아들이나 심지어 차기 종손이 입적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흥선군의 자식인 재면, 재황, 재선 모두 성인으로써 흥선군이나 조대비가 섭정으로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되자 흥선군은 세 자식중 가장 유약하고 무능하여 자신이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장남 재면을 추대하게 되었다는 것이 제일 유력하다.

결국, 혈통 문제와 흥선군의 정치적 사전 작업으로 인해 재면은 제25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재위 초기

고조는 재위 기간 별 다른 정치적 여파를 끼치지 못했다. 다만,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는 성격 덕에 개화당은 고조의 휘광을 등에 업고 적극적인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이 시기부터 조선은 본격적인 근대화에 돌입하여 사회, 군사, 중앙행정기관의 개편과 함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의 주요 행정관제를 개편하고, 독일 군사고문단 초빙, 러시아식 내각 체제 도입,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양반중 일부를 공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새롭게 공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승선부의 지배 하에 두어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등이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개화정책의 추진은 조선을 험난한 국제정세속에서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었다. 이러한 성조의 근대화 정책을 현대 한국에서는 어일신(御一新)이라고 칭한다.

두 전쟁

고조 시기 2차례의 큰 전쟁이 있었는데, 각각 1차 동아전쟁과 2차 동아전쟁으로 불리곤 한다.

간도에서의 분쟁을 기점으로 발생한 조일 연합군과 청나라가 맞붙은 1차 동아전쟁은 부패하고 전근대적인 청군에 맞선 조일연합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청은 강화 협상을 진행하여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고, 요동 반도, 대만과 부속 도서, 펑후를 일본에 할양하고 남만주를 조선에 넘기며 조선 정부 고평은 2억 냥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조일 양국을 최혜국으로 대우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해진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조일 양국에 대대적인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당시 친러정책을 피던 조선은 뤼순을 완전하게 토해낸 일본과 달리 간도를 제외한 남만주 일부만을 토해내는 결말을 맞이하였다. 이는 양국간의 신뢰관계 붕괴로 이어지며, 훗날 제2차 동아대전의 계기가 되었다.

조일 양국관계가 파탄 나는 와중에도 제1차 동아대전의 승리 이후 전국적으로 칭제건원에 대한 열망이 성조되었다. 이에 고조 원구단을 축조하고 연호를 건원(建元)으로 정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의 자격으로 고유제를 거행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천자국 대한제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제국으로 변하듯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또한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의화단 반란으로 한러 양국이 만주를 남북으로 분할하자 긴장이 고조되었고, 제2차 동아대전이 발발한다. 기습적인 일본군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무수한 피의 산을 쌓았으나 결국 한러 연합군의 신승으로 막을 내린다. 이 전쟁으로 일본은 동양국가의 한계를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으며 철저히 영미에게 외면받으며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고, 러시아 또한 승리라고는 하지만, 발트함대의 궤멸과 극동군의 손실을 입으며 양국을 대신하여 한국이 새로운 동아시아의 패자로써 등극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말년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한러 양국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중화민국을 최초로 승인한 대신 한족의 중화민국과 만주족의 청나라를 분리하자는 제안을 성사시키며 청나라는 한러 양국의 공동 보호국 정도의 지위로 격하되었고 남만주는 이제 확고한 한국의 영역으로 국제사회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고조 시대 마지막 영토 확장이었고, 더불어 고조의 마지막 치적이기도 하였다.

1912년 9월 9일 고조는 조용히 붕어하였다. 사후 대규모 추모객이 황성에 집결하여 한 시대를 군림한 지존의 마지막을 지켰다. 이후 고조라는 묘호와 순황제라는 시호를 받고 홍릉에 안장된다.

평가

고조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로서, 강한 정치적 의지나 독자적인 개혁 철학보다는 주변 세력의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는 유약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은 오히려 당시 급격한 개화와 제도 개혁을 추진하던 개화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오히려 과거나 지금이나 고조는 집권 세력의 뜻대로 우상화되었고, 현재까지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숭상받고 있다.

여담

가계

대중 매체에서

상훈(賞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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