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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농병학은 굳게 단결하라! 인민의 고혈을 착취하며 연명하는 구세태를 무산계급의 혁명으로 징벌할 때가 왔다!
력사를 퇴보시키는 인민의 원쑤 자본계급 반동파를 타도하고 철저히 청산하자!
만주인민공화국
만주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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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
- 혁명전사 (1927~1931)
주로 중국공산당의 동북지역 조직. 또다른 뿌리로는 조선인의 고려공산청년회, 항일유격대. 코민테른의 국제혁명 노선(파벨 미프), 러시아 볼셰비키의 개입과 러시아인들 (보이틴스키, 콘스탄틴 로진스키[7])
주활동 : 철도, 광산, 농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초기 노동운동 중심의 운동, 중국공산당, 코뮌테른과의 접촉
혁명의 중심과제 : 계급혁명, 토지혁명 (토호렬신에게서의 독립), 인민계몽
- 만주사변과 제국주의 침략 (1931)
혁명의 중심과제 : 각종 사회개혁적 혁명과업 -> 항일투쟁
이시기 항일유격대(1932~1935)의 조직. - 양정우 (楊靖宇, 1905~1940) - 남만 항일투쟁 - 주보중 (周保中) - 동만 항일투쟁 - 리조린 (李兆麟) - 북만 항일투쟁
동북항일연군으로의 통합 (1936) 제1로군 남만 양정우 (楊靖宇, 1905~1940) 제2로군 동만 주보중 (周保中) 제3로군 북만 리조린 (李兆麟)
만주 혁명 제1세대, 1940~1942년경 큰 피해로 소련 망명. 이시기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며 중국공산당과 역사와 가치관 공유
- 소련 진공작전(1945)
중국혁명의 중심세력인 팔로군과 당중앙에서 동북으로 대거 파견, 가오강을 중심으로 한 팔로군과 동북의 정신적 역사 공유, 소련의 진주
모스크바 유학파(28인의 볼셰비키 계열) 가오강을 중심으로 한 친소 실무파 동북항일연군 출신 혁명가
인물들은 스탈린의 결단에 의해 만주의 소련 위성국 건국에 참여. 가오강은 소련의 제1극동방면군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과 접촉,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키릴 메레츠코프와 하바롭스크에서 비밀리에 회담을 가짐. 당시 볼셰비키 계열과 마오의 당중앙은 이미 당중앙측의 절대우위가 되었고, 이에 불만이 있던 일부와 가오강의 권력욕, 스탈린의 동북 점령의 필요성 (주된 목적은 아직 부족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다른 대안인 만주 철도 이용)을 기반으로 국가설치 의도.
이에 동북국의 불순한 의도를 파악한 당중앙은 묵덴으로 진운(陳雲)과 팽진(彭真)을 파견, 표면적으로는 산업과 행정을 점검하지만, 실제 임무는 가오강의 충성도와 소련의 의도를 확인해 옌안에 보고함. 동북에서 독자적인 권력형성을 부분적으로 발견했으나 결정적 증거는 발견하지 못함. 지나친 소련과의 접촉을 질타당함. 동북국은 곧 개편되어 동북인민정부가 되나, 중국공산당측 간부를 중책이 아닌 연락대표에 임명하며 영향력 축소.
중국의 지나친 강대화를 우려한 스탈린과 동아시아 방면 담당자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모택동에 대한 노선 의심은 동북인민정부를 경제원조와 군사지원을 통해 중앙이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친소파 인물을 침투시킴으로 동북과 중앙을 느슨히 만들고, 시간순서로 '동북국과 소군정(1945~1946)->지방인민대표회의 개최, 만주인민행정위원회(1946년 말~1947년)->만주인민정부(1947)' 순으로 단계를 올림.
계속해서 중국에 자원과 인력을 제공하며 밀접하게 지원하나, 이후 중국 화북상황에 따라 1947~1948 건국.
연표
| 연도 | 사건 | 주요 인물 | 의의 |
|---|---|---|---|
| 1927 | 난창혁명 이후 중국공산당 동북조직 확대 | 중국공산당 동북지방조직 | 만주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 |
| 1927~1931 | 혁명전사 | 중국공산당 동북조직, 고려공산청년회, 코민테른, 볼셰비키 | 계급혁명·토지혁명·노동운동 |
| 1931 | 만주사변 | 일본 관동군 | 혁명의 중심이 항일투쟁으로 전환 |
| 1932~1935 | 항일유격대 조직 | 양정우, 주보중, 리조린 | 지역별 항일유격전 전개 |
| 1936 | 동북항일연군 창설 | 양정우, 주보중, 리조린 | 항일세력 통합 |
| 1940~1942 | 항일연군의 붕괴와 소련 철수 | 주보중, 리조린 등 | 만주 혁명 제1세대 형성 |
| 1945년 8월 | 소련의 만주 진공 | 스탈린, 바실렙스키, 메레츠코프 | 대체역사의 분기점 |
| 1945년 | 팔로군·동북항일연군 세력 결집 | 가오강, 주보중, 리조린 | 혁명 제2세대 형성 |
| 1945년 | 하바롭스크 비밀회담 | 가오강, 바실렙스키, 메레츠코프 | 만주 독립 구상 시작 |
| 1945년 말 | 진운·팽진 동북 파견 | 진운, 팽진 | 중앙의 동북 감찰 |
| 1945~1946 | 동북국과 소련군정 | 가오강 | 독립 준비 1단계 |
| 1946년 말~1947년 | 만주인민행정위원회 설치 | 가오강 | 예비정부 수립 |
| 1947 | 만주인민정부 출범 | 가오강 | 사실상 독립정부 |
| 1947~1948 | 만주인민공화국 건국 | 가오강, 주보중 | 소련 위성국 성립 |
건국후 역사
정책
- 사회주의인민경제건설노선 (토지개혁 & 생산증강운동)
고강시대, 핵심 정책으로 경제의 재건 및 토지개혁이 골자다.
- 사회주의문화건설 제1차 통국인민평의회 결정안 (인민식자운동)
고강시대, 고숭민을 위원장으로 조직된 운동으로 인민의 식자율을 증강시키는 운동이다.
- 트로쯔끼당 사건
고강시대, 당내 수정주의자 축출
- 사회주의문화건설 제2차 통국인민평의회 결정안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
고강시대, 전국적으로 식인풍습, 노예, 매음굴 등 각종 반사회적이거나 봉건잔재에 해당하는 것들을 몰아내는 운동이었다. 정치적 목적보다는 혼란한 사회를 이용한 범죄자들을 몰아내는데 일조했고, 이때 잡힌 유명한 산적이 바로 니탕개. 인육을 공급하던 산적으로 사형 후 효시되었다.
- 프룬제 사건
주보중 시대, 프룬제 군관학교를 유학한 군장교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숙청사건. 원래 정치군관과 야전군관이 확실히 나누어지고, 정치군관인 총정치사령이 통수권과 군령권을, 그외의 군정권을 총참모장이 행사하고 있었으나 인사권에 간섭하려는 조직적 움직임이 보이자 이들을 축출한다.
- 사회주의문화건설 제2차 통국인민평의회 결정안 (고등교육육성운동)
고숭민 시대의 사업, 고등교육과 중등교육을 강화하는 것으로 고등교육의 육성을 추구했다. 이는 그의 명치대학 경험이 시발이 되어 전국의 3대 도시에 각각 3대 대학이 건설되었다. 주로 대도시에 건설된 이유는 정책적 효용성과 더불어 파괴된 기존 대학등을 재건하여 활용하는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각각의 특성화된 대학을 건설하고(할빈리공대학, 창춘법정대학, 뤼다해사대학), 중앙 묵덴의 종합대학(묵덴인민대학)으로 구성하였다.
- 사회주의문화건설 제n차 당중앙결정안 (아편퇴치운동)
고숭민 중후기에 시작하여 리립삼때까지 이어진 운동. 아편을 퇴치한다는 명목 하에 시작하여으나 리립삼 시기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의 후속 운동으로 반체제인사색출과 범죄자 색출을 목적으로 한 사업이었다.
- 사회주의문화건설 제n차 당중앙결정안 (도서혁명화사업)
리립삼 시대의 통제, 사상검열 정책. 이후 그가 인텔리 좌파 지식인들의 집단지도체제인 만주의 정치를 독선주의로 반역하려는 혐의로 책잡히는 계기가 된다. 이는 지식인들의 대규모 반발을 사며 그의 말년을 피곤하게 했다.
- 사회주의인민경제총공노선 (급진적 공업화, 도시화 추진)
리립삼 시대의 주된 노선으로, 스탈린주의를 모방하여 급격한 경제성장과 공업화를 추구하였다. 실제로 일정한 성공은 거두었으나 심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리립삼시대엔 자신이 노동상으로 근무할떄 형성한 노동정책을 완성했으나 경공업의 부족함으로 소비재의 미비, 노동통제로 인한 사회적 피로가 누적된다.
- 사회주의인민경제개조총노선 (실용주의 경제노선)
림풍시대에 시작하여 풍중운시대까지 이어진 경제노선으로, 급격한 중공업 후유증을 완화하고 생활수준의 일정보장을 위해 경공업에도 투자하며 균형을 맞추려 로력했다. 중공업의 투자비율을 조정한 정도이다.
- 맹동주의 종파 사건
풍중운시대, 리립삼 노선의 폐기 및 사상적 축출, 계열인물 숙청.
- 소-만 핵미사일 배치 협약 (1978)
풍중운 시대의 소련과의 밀착. 계획경제의 전성기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의 깊은 유대를 과시하며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굉장한 충격을 준다.
- ㅇㅇ
백학림 시대의 무리한 경제발전사업, 기울어가는 공산권에서 계획경제와 배급경제를 유지하려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이양반이 유능한것도 아니라서 잘 안됬을듯.
- 글라스노스뜨(공개성 강화)와 뻬레스트로이까(개혁과 구조조정)
백학림 말년, 1989년 시위대의 요구에 이끌려 제기되던 정책으로 랑경춘이 이를 추진하였다.
- 1991년 데모끄라찌체스까야 레볼류찌야 (민주혁명)
뉴후루 아이싱고브가 만주민주공화국을 건국하며 사회주의 체제의 종말을 알렸다.
인공시대 주석
만주 인민 공화국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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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인물 설명은 챗지피티로 요약작성함.
혁명세대~ (건국, 체제형성)
초대 : 가오강 (1947-59, 12년)
만왕. 1905년 산시성(陝西省) 출생.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산시 혁명근거지와 장정을 거친 뒤 항일전쟁 시기 중국공산당의 서북 및 동북 공작을 담당하였다. 1945년 소련군의 만주 진주 이후 동북국의 최고책임자로 부임하여 소련군과 협력해 만주의 행정과 군대를 장악하였다. 1947년 만주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초대 국가주석으로 취임하였으며, 토지개혁·국유화·중공업 육성을 추진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만주혁명의 지도자'로 평가된다.
2대 : 주보중 (59-63, 4년)
1902년 윈난성 출생. 중국공산당 입당 후 동북으로 파견되어 항일유격대와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총지휘를 맡았으며, 일본군에 맞선 대표적인 항일혁명가로 이름을 알렸다. 전쟁 후에는 만주군 창설과 군사체계 정비를 담당하였으며, 가오강 사후 혁명 원로들의 추대로 국가주석에 선출되었다. 혁명 정통성 계승과 군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재임 기간은 비교적 짧았지만 건국세대의 마지막 지도자로 평가된다.
3대 : 고숭민 (1891, 高崇民, 63-68, 5년)[8]
1891년 랴오닝성 카이위안(開原) 출생의 만주족 정치인. 청말과 중화민국 시기 교육계와 애국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동북 지역의 민주인사로 활동하였다. 일본 패망 이후 만주의 자치와 사회개혁을 지지하며 만주 정부에 참여하였고, 비공산계 애국세력과 혁명세력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국가주석 재임 중에는 행정제도 정비와 산업기반 확충을 추진하며 혁명정부를 제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친소원로 (프라하의 봄, 소련의 간섭)
4대 : 리립삼 (1899, 李立三, 68-71 3년)
1899년 후난성 출생. 프랑스 근공검학 운동에 참가한 뒤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부에 합류하였으며, 코민테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대표적인 국제공산주의 계열 인물이었다. 당내 권력투쟁에서 실각한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가오강 정권의 정치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국가주석 재임 중에는 소련과의 군사·경제 협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의 대외정책에 적극 보조를 맞추었다. 말년에는 보수적 계획경제를 유지하는 데 집중하였다.
~행정관료 (그나마 존재하는 공산주의 국가로써의 전성시대)
5대 : 림풍 (1906, 林枫, 71-74, 3년)
1906년 헤이룽장성 출생. 초기부터 중국공산당 동북조직에서 활동하였으며,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동북 행정기관과 지방당 조직을 이끌었다. 건국 이후에는 지방행정과 경제계획을 담당하는 실무관료로 성장하였으며, 혁명 원로에서 기술관료 중심 체제로의 전환을 주도하였다. 재임 기간에는 산업관리의 효율화를 추진하고 국가행정기구를 정비하였다. 사실상의 마지막 혁명원로로, 행정관료 출신으로 정치력은 부족했으나 리립삼이 후퇴시켰던 교육과 경공업을 재건할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풍중운의 무대를 깔아주는 역할에 그치며 물러나며 제2의 만왕시대가 시작된다.
6대 : 풍중운 (74-84, 10년)
제2의 만왕. 1908년 헤이룽장성 출생. 중국공산당 북만 조직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항일유격대와 동북항일연군의 정치공작을 담당한 혁명 원로였다. 건국 이후에는 지방행정과 경제개발을 이끌며 만주 북부의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국가주석으로 취임한 뒤 철도망과 중공업 단지를 대대적으로 확충하여 만주인민공화국의 경제적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동시에 교육과 과학기술 육성에도 많은 투자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말기에는 경제 침체와 소련 경제의 둔화가 국가 운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몰락기 (민국을 향하여)
7대 : 백학림 (84-89, 5년)[9]
1918년 함경북도 출생의 조선인 혁명가. 만주에서 항일유격대에 참가한 뒤 소련 제88독립보병여단에서 복무하였으며, 일본 패망 이후에는 만주 정부의 치안 및 국가보안기관 창설에 참여하였다. 이후 국가안전부장과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하며 국가안전 체계를 확립하였고, 1984년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재임 중에는 경제 침체와 민주화 요구에 대응하여 사회질서 유지와 제한적 경제개혁을 병행하려 했으나, 소련의 쇠퇴와 사회주의권 위기 속에서 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사실 이 인물은 당대 소련의 지도자인 고르바초프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이미 취임할때부터도 인지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의혹이 있었고, 때지난 스탈린주의를 아직도 옹호하는 등 이미 늙을대로 늙어 새로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인물이었기에 고르바초프는 개혁압력을 넣으면서도 퇴임을 압박했지만 끝내 자리를 지키는걸 보고 기대를 접었다, 이후 1989년 민주화시위가 불길같이 번지며 사임한다.
8대 : 랑경춘 (89-91, 2년)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의 여파와 1989년 민주화 시위, 사회주의권 붕괴의 여파 속에서 국가주석에 선출되었다. 재임 기간에는 일당체제의 점진적 해체와 시장경제 도입을 추진하였으며,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에도 힘썼다. 1991년 만주인민공화국을 해체하고 민국을 건설한다.
| 시기 | 만주인민공화국 | 소련 | 시대적 특징 |
|---|---|---|---|
| 1947~1953 | 제1대 가오강 | 이오시프 스탈린 | 건국, 사회주의 체제 구축,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 |
| 1953~1959 | 제1대 가오강 | 니키타 흐루쇼프 | 탈스탈린화 초기, 만주는 친소 노선 유지 |
| 1959~1963 | 제2대 주보중 | 니키타 흐루쇼프 | 혁명 원로 체제, 군과 당의 안정 |
| 1963~1964 | 제3대 고숭민 | 니키타 흐루쇼프 | 행정 제도화와 산업기반 확충 |
| 1964~1968 | 제3대 고숭민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브레즈네프 체제 출범, 친소 노선 강화 |
| 1968~1971 | 제4대 리립삼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권 결속 강화 |
| 1971~1974 | 제5대 림풍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기술관료 중심 행정체제 |
| 1974~1982 | 제6대 풍중운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산업화 완성, 계획경제 전성기 |
| 1982~1984 | 제6대 풍중운 | 유리 안드로포프 | 경제 침체, 개혁 논의 시작 |
| 1984~1985 | 제7대 백학림 | 콘스탄틴 체르넨코 | 노령 지도부의 마지막 시기 |
| 1985~1989 | 제7대 백학림 | 미하일 고르바초프 |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영향, 개혁 압력 증대 |
| 1989~1991 | 제8대 랑경춘 | 미하일 고르바초프 | 민주화와 체제 전환, 사회주의 체제 종말 |
위대하신 만주의 령도자 고 강 동지를 따르자!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 ||||
| 직위개설 | → | 초대 고숭덕 |
→ | 제2대 주보중 |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초대 주석 고강 Гао Ган | 高岗 | ||||||||||||||||||||||||||||||||||||||||||||||||||||||||||||||||||||
|---|---|---|---|---|---|---|---|---|---|---|---|---|---|---|---|---|---|---|---|---|---|---|---|---|---|---|---|---|---|---|---|---|---|---|---|---|---|---|---|---|---|---|---|---|---|---|---|---|---|---|---|---|---|---|---|---|---|---|---|---|---|---|---|---|---|---|---|---|
| 본명 | 고숭덕 (高崇德) | |||||||||||||||||||||||||||||||||||||||||||||||||||||||||||||||||||
| 출생 | 1905년 10월 25일 | |||||||||||||||||||||||||||||||||||||||||||||||||||||||||||||||||||
| 청나라 섬서성 미지현 | ||||||||||||||||||||||||||||||||||||||||||||||||||||||||||||||||||||
| 사망 | 1966년 8월 17일 (향년 61세) | |||||||||||||||||||||||||||||||||||||||||||||||||||||||||||||||||||
| 만주 인민 공화국 묵덴 직할시 주석궁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 ||||||||||||||||||||||||||||||||||||||||||||||||||||||||||||||||||||
| 재임기간 | 1947 - 1959 | |||||||||||||||||||||||||||||||||||||||||||||||||||||||||||||||||||
| 전임: 직위개설 후임:주보중 | ||||||||||||||||||||||||||||||||||||||||||||||||||||||||||||||||||||
| 재임기간 | 만주 인민 공화국 초대 국가주석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만주공산당 초대 서기장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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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상화[11] | |
|---|---|
개요
| 통국인민평의회의 초대 주석으로 부임하는 고강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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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독재자. 만주를 12년간 통치하였다.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섬서성과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혁명가로, 초기 투쟁노선인 노동·농민·학생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무장투쟁노선에 따라 섬서·감숙성 지역의 무장 유격대 활동을 지도하였으며, 이후 1936에 내몽골지역의 중국공산당 몽골 공산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10월엔 섬서·감숙성 소수민족 공산위원회 부서기를, 12월에는 서기를 맡았다.
항일투쟁이 시작된 후, 1937년 11에 팔로군 기병대 사령관을 맡았으며 1941년엔 중국 공산당 서북중앙국 서기를 맡았고 1945년 6월 중앙정치국의 위원으로 위촉받았다. 1945년 10월 말 동북지역으로 파견되어 근거지를 건설 후 하얼빈 전선 야전 사령관을 지냈다. 당해 하바롭스크에서 소련과 비밀회담을 진행하였고, 1946년 6월에 동북인민연합군 정치부위원과 중국공산당 동북국 서기를 맡았다. 이후 동북인민행정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이후 동북국 제1서기, 만주인민정부 주석으로 차례로 취임하며 만주를 통치하였다.
이후 소련의 승인과 함께 만주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고, 통국인민평의회에서 초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그는 만주공산당의 서기장을 겸임하며 최고지도자이자 권력자로 통치했으며, 통치시기를 일컫어 중국측에선 그를 만왕(滿王) 이라 칭했다. 통치시기 만주의 재건, 공업화와 토지개혁 사업을 지도했다. 그는 1959년까지 12년을 통치하며 독재를 계속하다가, 주석궁에서 의문의 이유로 사망했다. 대외적으로 과로로 인한 사망이라 알려졌다.
인민해방의 어버이 주 보 중 동지를 따르라.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 ||||
| 초대 고강 |
→ | 제2대 주보중 |
→ | 제3대 고숭민 |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2대 주석 주보중 Чжоу Баочжун | 周保中 | |||||||||||||||||||||||||||||||||||||||||||||||||||||||||||||||||||
|---|---|---|---|---|---|---|---|---|---|---|---|---|---|---|---|---|---|---|---|---|---|---|---|---|---|---|---|---|---|---|---|---|---|---|---|---|---|---|---|---|---|---|---|---|---|---|---|---|---|---|---|---|---|---|---|---|---|---|---|---|---|---|---|---|---|---|---|
| 본명 | 해리원(奚李元) | ||||||||||||||||||||||||||||||||||||||||||||||||||||||||||||||||||
| 출생 | 1902년 2월 7일 | ||||||||||||||||||||||||||||||||||||||||||||||||||||||||||||||||||
| 청나라 운남성 다리현 | |||||||||||||||||||||||||||||||||||||||||||||||||||||||||||||||||||
| 사망 | 1964년 4월 22일 (향년 62세) | ||||||||||||||||||||||||||||||||||||||||||||||||||||||||||||||||||
| 만주 인민 공화국 창춘 독립시 창춘백구은병원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 |||||||||||||||||||||||||||||||||||||||||||||||||||||||||||||||||||
| 재임기간 | 1959 - 1963 | ||||||||||||||||||||||||||||||||||||||||||||||||||||||||||||||||||
| 전임: 고강 후임:고숭민 | |||||||||||||||||||||||||||||||||||||||||||||||||||||||||||||||||||
| 재임기간 | 만주 인민 공화국 2대 주석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만주공산당 n대 정치총사령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서명 | 파일:주보중 서명.sv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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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2대 주석, 만주 무장투쟁을 이끈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지휘하였다. 동북에서의 항일투쟁에서의 전쟁영웅이다. 본관은 중국 운남의 대리현으로, 바이족(白族) 출신이다.
+ 사진편집이 잘못된게 아니라 진짜 저렇게 생겼다.

만주인민의 스승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 ||||
| 제2대 주보중 |
→ | 제3대 고숭민 |
→ | 제4대 리립삼 |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3대 주석 고숭민 Гао Чонгмин | 高崇民 | |
|---|---|
| 본명 | 고은준 (高恩浚) |
| 출생 | 1891년 11월 14일 |
| 청나라 봉천성 개원현 | |
| 사망 | 1971년 7월 29일 (향년 80세) |
| 만주 인민 공화국 봉천주 개원현[13]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 |
| 재임기간 | 1963 - 1968 |
| 전임: 주보중 후임: 리립삼 | |
| 재임기간 | 만주 인민 공화국 3대 주석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국무원 n대 수상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동북인민정부 초대 부주석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서명 | 파일:고숭민 자필 서명.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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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3대 주석, 만주에서 활동한 민주인사로 만주 양백기(鑲白旗) 계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메이지대학에서 유학하며 근대의 지식인이 되었고 귀국 후에는 언론인과 교육자로 활동한다. 이어 동북민치구진회(東北民治俱進會) 활동을 통해 동북의 지방자치와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다.이후 1926년 장학량의 비서가 되었고 만주사변 이후 북경으로 망명, 중국공산당과 접촉한다. 이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서 항일 통일전선의 인물로 활동하였다.
1945년 동북해방 이후 중국공산당은 그를 동북인민정부의 부주석으로 임명하며 파견하였고, 동북의 재건을 위하여 힘쓰게 된다. 이후 고강의 12년 통치시기 만주의 식자율 증진을 위해 노력했으며, 특별한 당파를 가지지도 않았고, 정통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나, 당시 당내 국가원수로써 포용력과 집단지도체제가 강조되며 통국인민평의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만주의 정치체제가 정립되었으며, 고숭덕의 령도체제, 주보중의 군정체제에서 집단지도체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고숭민이란 인물 자체에 대해서도 당파, 심지어 공산당과 국민당을 막론하고도 많은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초대나 2대처럼 실권자는 아니었으나 상징적 국가원수가 되는것에 대해선 불만은 적었다.[14]
이 시기 소련계 활동가들인 풍중운과 랑경춘(뉴후루 아이싱고브)과 노선의 마찰을 빚었다. 이후 문맹퇴치운동은 효과를 얻었으나 이후 프라하의 봄 사태로 인한 소련의 적극적 개입은 만주의 다소 독자노선과 지역주의적 노선을 견지하며 정통한 공산주의 계통 인사가 아니었던 고숭민을 견제하였고, 이후 자발적으로 은퇴하였다. 이후 고향인 개원현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노환(자연사)이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루어졌다.
좌경모험주의가 좌익소아병이란 털난 변절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가? 근데 난창봉기는 실패한게 맞음ㅋ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 ||||
| 제3대 고숭민 |
→ | 제4대 리립삼 |
→ | 제5대 림풍 |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4대 주석 리립삼 Ли Лисань | 李立三 | |
|---|---|
| 본명 | 리륭질 (李隆郅) |
| 출생 | 1899년 11월 18일 |
| 청나라 호남성 예릉현 | |
| 사망 | 1971년 7월 29일 (향년 72세) |
| 만주 인민 공화국 묵덴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 |
| 재임기간 | 1968 - 1971 |
| 전임: 리립삼 후임: 림풍 | |
| 재임기간 | 만주 인민 공화국 4대 주석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만주공산당 n대 서기장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국무원 노동상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국무원 선전상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서명 | 파일:리립삼 서명.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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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4대 주석. 만주의 가장 철저한 친소파였다. 중국공산당의 초기 지도자로, 난창 봉기의 실패 이후 실각하여 소련에서 생활하였다. 1945년 이후 중국으로 입국하였고, 소련의 지시로 화북에서 만주로 이동하여 만주인민정부와 만주공산당의 전신인 중국공산당 동북국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중국의 특사들의 활동을 은밀히 방해하는 공작업무를 맡았고 고강과 협력하여 비모택동 노선의 공산주의 국가를 계획한다.
건국 이후엔 만주공산당에서 당이론을 조직하는 책무를 맡으며 리론가로 활동하였고, 국무원의 노동상, 선전상을 거치며 중책을 맡다가 고강의 죽음 이후 고숭민 시대에 서기장에 오르며 자신의 입지를 확립하였다. 이후 집단지도체제에서 당의 우두머리격으로 활동하였으며, 아편퇴치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여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의 후속 운동으로 발전시키며 사상범들을 색출하고 중국의 간첩들을 체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프라하의 봄 사건 후에 소련의 압박으로 고숭민이 물러나며 통국인민평의회에서 4대 주석으로 위촉된다.
이후 약 3년간 통치하며 사회주의인민경제총공노선, 도서혁명화사업 등을 진행하며 소련식 공업경제로의 조급한 경제정책을 폈다. 이시기 당내 갈등이 잦자 도서혁명화사업으로 사상검열을 강화하였고 이후 의문의 이유로 집무실에서 사망하였다. 사인은 과로로 인한 사망이라고 알려졌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르어졌다.
범부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 ||||
| 제4대 리립삼 |
→ | 제5대 림풍 |
→ | 제6대 풍중운 |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4대 주석 림풍 Ли Лисань | 林楓 | |
|---|---|
| 본명 | 정영효 (郑永孝) |
| 출생 | [][1906년]] 9월 30일 |
| 청나라 흑룡강성 왕꾸이현 | |
| 사망 | 1977년 9월 29일 (향년 세) |
| 만주 인민 공화국 묵덴 중앙인민대학병원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 |
| 재임기간 | 1971 - 1974 |
| 전임: 리립삼 후임: 풍중운 | |
| 재임기간 | 만주 인민 공화국 5대 주석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국무원 상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국무원 상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서명 | 파일:림풍 서명.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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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5대 주석.
얼마 해보지도 못하고 때려치워야했다.
두번째 만왕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 ||||
| 제5대 림풍 |
→ | 제6대 풍중운 |
→ | 제7대 백학림 |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6대 주석 풍중운 Фэн Чжунюнь | 冯仲云 | |
|---|---|
| 본명 | 풍사상 (冯仕祥) |
| 출생 | 1908년 3월 18일 |
| 청나라 강소성 상주 | |
| 사망 | 1984년 7월 27일 (향년 76세) |
| 만주 인민 공화국 묵덴 직할시 중앙인민대학병원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 |
| 재임기간 | 1974 - 1984 |
| 전임: 림ᅠ풍 후임:백학림 | |
| 재임기간 | 만주 인민 공화국 6대 주석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만주공산당 n대 서기장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국무원 n대 수상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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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6대 주석, 10년간 만주를 다스렸던 인물로 만왕2세라고 불렸다. 만주인민공화국의 전성기, 즉 공산권의 가장 전성기 시대에 다스렸던 인물이다. 소련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말기의 국가엔 항상 꽉막힌 노친네가 앉아있는 법이지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 ||||
| 제6대 풍중운 |
→ | 제7대 백학림 |
→ | 제8대 랑경춘 |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7대 주석 백학림 Пэк Хаклим | 白鶴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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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18년 10월 17일 | |||||||||||||||||||||||||||||||||||||||||||||||||||||||||||||||
| 일본제국령 조선 평안남도 평원 | ||||||||||||||||||||||||||||||||||||||||||||||||||||||||||||||||
| 사망 | 2006년 10월 5일 (향년 87세) | |||||||||||||||||||||||||||||||||||||||||||||||||||||||||||||||
| 만주 인민 공화국 창춘 독립시 창춘백구은병원 | ||||||||||||||||||||||||||||||||||||||||||||||||||||||||||||||||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 ||||||||||||||||||||||||||||||||||||||||||||||||||||||||||||||||
| 재임기간 | 1984 - 1989 | |||||||||||||||||||||||||||||||||||||||||||||||||||||||||||||||
| 전임: 백학림 후임:랑경춘 | ||||||||||||||||||||||||||||||||||||||||||||||||||||||||||||||||
| 재임기간 | 만주 인민 공화국 7대 주석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공농적위군 n대 총참모장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국무원 n대 내무상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서명 | 파일:백학림 서명.sv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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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7대 주석. 평안남도 평원 출신으로,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김일성을 따라 한반도 이북으로 이동하였으나 김일성의 전향, 박상희의 대구에서의 시위사건 이후 사망으로 조선지역의 국내파 조직이 와해되고, 설상가상 조선해방전쟁에서의 패배와 박헌영의 사망으로 완전히 패배하며 압록강을 월경하여 만주로 피신했다. 망명자에 대해 관대할 뿐더러, 혁명전쟁을 치르고 온 그는 자신이 이끈 46연대 및 패잔병 세력을 이끌고가 공농적위군에 편입되었고, 조선인으로 구성된 제12연대의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사단장을 거치며 자리를 잡았고, 군사정진위원으로 선출되며 군-정의 정치체계에 편입된다.
이후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의 실무자로 활동하며 정치보안의 전문성을 인정받았고, 내무상으로 취임하며 국내 정치세력에 대한 감시와 검열업무를 맡았다. 이때 남춘봉의 제11사단과 백학림의 12사단[17], 내무국의 보안사령부 특작부대가 연합하여 무단강주에서 토벌작전을 개시해 니탕개를 붙잡아 묵던으로 압송을 성공한 전공이 있다. 압송당시 백학림이 책임지고 보안을 맡았는데, 니탕개와 관련된 흑룡강주의 조직적 범죄집단인 흑패(黑牌)에서 구출하려 습격했으나, 이를 막아내었다. 이후 창춘에서 처형을 집행했다.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을 주도적으로 집행하여 명성을 얻은 이후 국무원의 사회안전관련에서 근무하다가 1980년 총참모장으로 임명되며 제복군인으로써 최고의 자리를 얻었고, 이후 풍중운의 급사 이후 마지막 혁명원로[18]로써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사회질서 유지와 제한적 경제개혁을 병행하려 했으나 소련의 쇠퇴와 사회주의권 위기 속에서 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여 소련과 불화를 겪었고, 내부적으로도 시대착오적 정책과 인지능력의 의심이 제기되며 결국 1989년 민주화시위가 벌어지며 사임해야 했다. 사실 1983년 시기에 이미 노망이 들어 맛이 갔다는 소리가 돌았으며, 같은 말 하고 또 하고 몇분 간단히 말한다고 해놓고 몇시간을 헛소리를 하는 등 맛이 가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꼴을 보았던 남춘봉의 《추산기록》에서 회고하기를 "치매노인을 데려다가 앉히는 꼴이 참 어느나라 노인네가 꼴에 왕이랍시고 기어가듯 앉는꼴과 비슷했다" 라며 "저사람 집무실은 묵덴이 아닌 백구은병원이어야 했었다." 라고 회고했다. 그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정치군관으로 정치사령이었던 복철재는 그의 취임을 반대하며 "아침에 뭐 먹었는지도 모르는 노친네가 쏘련 서기장 이름이라도 기억하겠냐" 라고 말했던 기록이 속기록에 있다.
민국
만주민주공화국의 대총통 | ||||
| 직위개설 | → | 초대 뉴후루 아이싱고브 |
→ | 제2대 남춘봉 |
|---|---|---|---|---|
| 만주민주공화국의 초대 대총통 뉴후루 아이싱고브 Ниархуру Айсингов | 钮祜禄 爱星阿 | |||
|---|---|---|---|
| 본명 | 랑경춘(狼庆春)[19] | ||
| 출생 | 1922년 11월 2일 | ||
| 중화민국 흑룡강성 | |||
| 사망 | 2010년 1월 11일 (향년 82세) | ||
| 만주민주공화국 묵던 수도시 국립 묵던대학교병원 | |||
만주 민주 공화국 초대 대총통 | |||
| 재임기간 | 1994 - 1998 | ||
| 전임: 직위개설 후임:남춘봉 | |||
| 재임기간 | 만주 인민 공화국 8대 주석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만주공산당 제20대 서기장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국무원 n대 부수상 | |||
| 년 월 일 - 년 월 일 | |||
| 서명 | 파일:뉴후루 아이싱고브 서명.sv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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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식 초상화 | |
|---|---|
개요
만주민주공화국의 초대 대총통, 만주인민공화국의 마지막 주석.
- ↑ 주 국어 위치
- ↑ 고숭덕시대 이후 병용 공용어 위치
- ↑ 할빈, 창춘, 뤼다 3개 시
- ↑ 후기 다당제가 승인되었던 1달 남짓까지도 계속 집권정당이었다.
- ↑ 중국 동시가입
- ↑ 쏘련의 모스크바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유학해 적기합창단의 작곡가를 맡았던 인물로, 로어로 리웨이짜이(Ли Вэйцай)라고 불렸다.
- ↑ 가상의 하얼빈 철도조합 활동 볼셰비키로 설정.
- ↑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공산주의자, 독립성과 친소련의 노선을 저울질하다가 프라하의 봄을 목격한 소련의 압박으로 경질.
- ↑ 증언에 따르면 현실에서도 85년 즈음에 역임한 사회안전부장때 이미 맛이 간 상태였다 하니 몰락하는 공산국가를 상징할 수 있음.
- ↑ 혁명가들이 흔히 쓰는 가명으로 쓴 이름으로, 사실상의 이름이다.
- ↑ 말년의 모습이다. 이 사진을 촬영하고 나서 1년 뒤 의문사한다.
- ↑ 운남군 입대
- ↑ 은퇴 후 고향에서 사망했다.
- ↑ 대표적으로 반대한 리립삼은 그의 사상적인 이유로 반대했지, 다른 면에 있어선 지도자의 품격과 자격이 있는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이후 그가 자발적으로 은퇴한 이후 사소한 소외는 이루어졌지만 타국에서 벌어지던 본격적인 정치보복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 ↑ 본명은 엘리자베타 파블로브나 키슈리나(Елизавета Павловна Кишкина)이며, 리샤(Ли Ша)는 결혼 후의 러시아어 애칭이자, 동아시아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 ↑ 특별한 교육기관에 속하는게 아니었고, 근공(勤工) 일하며 검학(俭学) 공부하는 유학 운동이었다.
- ↑ 당시 사단장은 리두익이다. 백학림과 매우 친분이 두터운 인물이라 사실상 백학림의 지시를 따랐다.
- ↑ 당시 혁명원로들은 매우 고령이 되어 거동이 불가할 정도인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활동이 가능한 사람중 로어화자는 거의 없었다.
- ↑ 중어식 이름이다.
- ↑ 그를 거두어준 신부가 그를 가르키며 "경사스러운 봄이다."라고 한것에서 착안한 것이라 한다. 이후 그의 중어식 이름에서 쓰였다.
- ↑ 21.0 21.1 자와 호를 겸하여 사용하였다, 필명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