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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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합중국 제40대 대통령 프레드 트럼프 Fred Trum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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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프레더릭 크라이스트 트럼프 시니어 Frederick Christ Trump Sr. |
| 출생 | 1905년 10월 11일 |
| 미국 뉴욕 주 뉴욕시 브롱스 | |
| 사망 | 1999년 6월 25일 (향년 93세) |
| 미국 뉴욕주 뉴 하이드 파크 | |
| 재임기간 | 제33대 대통령 |
| 1977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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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역사상 최고령 취임 미국 대통령이자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한 대통령이었다.
생애
유년기
1905년 10월 11일 뉴욕 브롱스에서 바이에른 출신 독일계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프레드릭 트럼프는 트럼프가 13세이던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부친의 이른 죽음으로 트럼프는 어린 나이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데, 근처 목수 밑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며 목공 기술을 익혔고, 야간 학교와 통신 강좌로 제도와 건축을 독학했으며 이후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건축 관리와 공학을 수학했다.
192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첫 번째 주택을 직접 지었으며, 1926년까지 퀸즈에만 20채 이상의 건물을 완공했다. 이 당시 어머니 엘리자베스와 공동으로 E. 트럼프 앤 선(E. Trump & Son)을 설립했다. 트럼프가 미성년자였던 탓에 어머니가 공식 업무를 처리했으나 실질적인 사업 운영은 트럼프가 주도했다.
1927년 퀸즈에서 열린 KKK 집회 현장에서 해산 명령 불응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혐의는 이후 기각되었다. 그러나 수십 년 후 대선 당시 트럼프가 정계에 진출했을 때 언론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논란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사업가로서의 성장
경제대공황으로 많은 뉴욕 사업가들을 파산으로 몰아넣었으나, 트럼프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공터를 싸게 사들이고 식료품점에 투자하는 한편 파산한 독일계 금융 그룹 하우스 오브 레런크라우스의 자산을 매입해 브루클린 부동산 시장에 진입했다.
우드헤이번에 식료품점인 트럼프 마켓을 운영했으며, 이후 킹 쿨른 체인에 매각했다. 이때부터 트럼프의 사업 방식이 확립되기 시작했는데, 빌린 돈을 극도로 꺼렸으며, 건설 현장을 직접 돌며 바닥에 떨어진 못을 주워 목수들에게 다시 쓰게 할 만큼 철저한 절약가였다. 자체 청소 용액을 직접 조제하고 건물을 최대한 저렴하게 지었다는 일화는 뉴욕 건설업계에서 전설처럼 전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군 복무 대신 징병 유예를 받아 사업을 확장했다. 전후 주택난을 정확히 간파한 트럼프는 참전 귀환 군인과 중산층 가족을 위한 대형 아파트 단지 건설에 집중했는데, 연방주택청의 보증을 활용한 저금리 대출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식이었다. 1947년부터 1949년 사이 벤슨허스트에 완공된 쇼어 헤이븐 아파트, 코니아일랜드의 비치 헤이븐 아파트 등 대형 프로젝트를 연달아 성공시켰다.
1954년 미국 상원 위원회가 공공 계약 이윤 착취 혐의로 트럼프를 조사했다. 정부 저금리 대출을 받기 전 임대료를 170만 달러 초과 징수한 것이 확인되었으며, 트럼프는 상원 위원회에서 정부 프로그램 조작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서류상 합법이었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고 수사 결과 혐의가 드러나지 않아 기소되지 않았다.
정계 진출 준비
트럼프는 브루클린 민주당의 저명한 당원이었다. 정부 보조금을 받는 아파트 건설 사업을 수십 년간 운영하면서 뉴욕의 시·주 정치인들과 광범위한 인맥을 구축했다. 정치적 후원와 연줄을 적극 활용해 각종 정부 프로그램과 규제를 유리하게 활용하는 방식이 트럼프 사업 모델의 핵심이었다.
1960년대 말 아들 도널드가 트럼프 매니지먼트에 합류하면서 사업의 일상적 운영을 점차 아들에게 이전하기 시작했다. 1971년 도널드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겨주면서 더 많은 시간을 정치 활동에 쏟게 되었다.
1976년 대통령 선거
민주당은 경선에서 뚜렷한 구심점을 찾지 못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트럼프였는데, 정치 경력이 전무한 부동산 재벌 출신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노린다는 것 자체가 당시 언론의 조롱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뉴욕 타임스는 트럼프의 출마 선언 다음 날 칼럼에서 "부동산 업자가 대통령을?"이라는 제목으로 냉소적인 논평을 실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뉴욕 브루클린, 퀸즈 노동계층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예상을 뒤집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뉴딜 이후 정치인들로부터 약속만 받고 실질적 혜택을 체감하지 못했다는 불만이 쌓인 블루칼라 민주당원들에게 트럼프의 아웃사이더이자 사업가 이미지가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민주당 기득권 인사들은 트럼프를 무시했으나 초반 예비선거에서 예상 외의 선전이 이어지면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1973년 법무부 인종차별 소송 전력이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파헤쳐졌으나 트럼프는 이를 "워싱턴 관료들의 박해"로 역프레이밍하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기득권 언론과 민주당 지도부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공격받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의 아웃사이더 이미지를 강화했다.
트럼프가 대세론을 이끌며 전당대회에서 다수 대의원을 확보한 트럼프가 결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당내 기득권과 진보파의 강한 반발 속에서도 노동계층, 블루칼라 민주당원들의 압도적 지지가 결정적이었다. 러닝메이트로는 메인주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를 지명했다.
본선 상대는 현직 대통령인 존 코널리였다. 닉슨의 부통령으로 스캔들 여파를 안고 있는 코널리에 맞서 트럼프는 닉슨 스캔들로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유권자들의 심리를 정확히 파고드며 코널리에 맞서기 시작한다.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2000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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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키 52인 (14.9%) ✔ (85.1%) 452인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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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일시 | 1940년 11월 5일 | |||||||
| 투표율 | 62.5% ▲ 5.6%p | |||||||
| 선거 결과 | ||||||||
| 후보 | 민주당 |
공화당 | ||||||
| 홈스테이트 | 윌키 뉴욕 바클리 켄터키 |
쿠퍼 몬태나 반덴버그 미시간 | ||||||
| 승리 주 | 8 | 42 + D.C. | ||||||
| 선거인단 | ||||||||
| 79인 | 452인 | |||||||
| 전국 득표 | ||||||||
| 19,329,606 38.7% |
30,332,082 60.8% | |||||||
| 당선자 | ||||||||
| 공화당 게리 쿠퍼 | ||||||||
개요
1940년 11월 5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게리 쿠퍼와 부통령 후보 아서 반덴버그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웬델 윌키와 부통령 앨번 W. 바클리를 꺾고 미국의 제33대 대통령과 제33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다시 8년만에 공화당 정권이 들어선 선거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와 맞물려 세계 대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배경
경선
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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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경선은 민주당과 달리 시작 전부터 사실상 승부가 정해져 있었다. 현직 대통령인 댄 퀘일이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당내 뚜렷한 대항마가 없는 상태에서 사실상 단독 후보로 경선에 임했다.
일부 당내 인사들 사이에서 퀘일의 재지명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존재했으나, 현지 대통령에 맞서 당내 경선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수반하는 선택이었기에, 결국 이렇다 할 도전자 없이 퀘일이 압도적인 대의원 수를 확보하며 재지명되었다.
퀘일은 1996년 대선에 이어 제임스 스톡데일 부통령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다만 그가 매우 고령이라는 점이 지속해서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전쟁 영웅이자 명예훈장 수훈자로서 상당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만, 정치에서의 대중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대해서는 재임 4년 내내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당 일각에서는 새로운 얼굴로의 교체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퀘일은 그냥 무시하고 지명을 선택했다.
민주당
| Tomorrow Begins Today 미래는 오늘 시작된다 2000 케네디-브로 티켓 슬로건 |
퀘일 행정부의 낮은 지지율로 민주당은 이번 대선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선거라고 보았다. 민주당 내에서는 일찍부터 후보군에 대한 하마평이 무성했는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부상한 인물이 존 F. 케네디 주니어였다.
케네디는 1994년 뉴욕주 상원의원 당선 직후 부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압도적인 이름값과 대중적 인지도, 그리고 젊고 호감형인 이미지로 인해 당선 직후부터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어 왔다.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전국 순회 강연, 지역 당 조직과의 교류 등을 통해 민주당 내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다.
케네디에 맞선 주요 경쟁자로는 뉴저지주 상원의원 빌 브래들리, 코네티컷주 상원의원 조 리버만, 그리고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이자,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인 마이클 듀카키스가 있었다.
케네디는 아이오와 코커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를 포함한 초반 경선 일정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하며 사실상 경선을 조기에 종결시켰다. 슈퍼 화요일 이후 브래들리와 리버만은 잇따라 경선 중단을 선언했으며, 듀카키스 역시 뒤이어 완주를 포기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케네디는 사실상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
케니디는 부통령 후보로 루이지애나주 연방 상원의원인 존 브로를 지명했다. 뉴욕 상원의원이자 북동부, 도심 지역 기반의 진보적 이미지가 강한 케네디와 달리, 브로는 딥사우스 출신의 중도실용주의 협상가로서 오랜 상원 경력을 통해 초당적 조정 능력을 인정받아온 인물이다. 이 지명은 케네디의 상대적 약점으로 지적되던 남부 지역 기반과 국정 경험 부족을 동시에 보완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