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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1917년부터 1938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정당.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역사창당20세기 초, 사회주의 성향의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추원에서 노동자협회라는 이름의 교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노동자의 처우 개선, 근로기준법 제정, 노조 활동 방해 금지 등을 요구하였다. 노동자협회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운동을 벌였으나 별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에 노동자협회 지도부와 회원들은 조직화된 정당의 필요성을 느꼈고 1917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초대 의장으로는 노동자협회 회원 중 대중인지도가 가장 높은 이동휘가 추대되었다. 성장과 집권급속도로 진행되는 산업화에 도시 노동자들의 수 역시 급속도로 늘었고, 사회당은 이들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했다. 1927년, 공장 관리진 측의 부당한 대우에 원산 노동자연합회가 전면적 파업을 일으킨 원산 총파업 당시 당 지도부가 총출동하여 파업을 지원하며 그 세력이 급속도로 불었다. 1929년 이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한국의 경제가 깊은 침체에 빠지자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후 1930년 총선에서 과반의 집권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제3당으로 굴어떨어지고 한인사회당이 대한국민회를 제치고 중추원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민주적으로 집권한 첫 사례였다.[2] 총리로 선출된 이는 사회당 온건파의 거두 양기탁이었다. 양기탁 내각은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하고 노조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하지만 양기탁 내각은 농촌 문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3] 경제 정책 역시 이전 수권 정당들에 비해 상당히 투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동열, 김안산[4], 박헌영 등 사회당 급진파는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요구했고 대한국민회와 대한민주당, 그리고 자유당은 한인사회당이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집권 축하 편지를 받은 것을 문제삼아 사회당을 소련의 프락치 정당이라는 주장을 하며 파상공세를 가했다. 안팎의 압박에 결국 양기탁은 총리직에서 사퇴했고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을 중재하던 이동휘가 당 의장에 추대되어 총리직에 취임했다. 분열과 쇠퇴
이동휘는 당내외의 걱정을 뒤엎고 상당히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1934년에 치루어진 13회 총선에서 한인사회당은 원내 1당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의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극우 민족단결연맹의 약진으로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이 연립하여도 한인사회당의 의석수보다 적었기에 한인사회당은 내각구성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당만의 단독 소수내각을 꾸리기에는 국정운영의 차질이 불가피해 보였기에 이동휘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자유당과의 연정을 시도하였고 교섭 끝에 연정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35년 이동휘가 급사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급진파와 온건파 양측의 인정을 받던 이동휘가 사라지면서 한인사회당은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총리 대행을 맡았던 신채호와 당 부의장 김립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었지만,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 급진파와 온건파 양쪽 모두로부터 불호를 받았기에, 김립은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인해 당 내에서 큰 힘을 쓸 수 없었고 결국 온건파와 급진파를 중재하는 데에 실패했다. 유일한 중재자가 사라지면서, 급진파와 온건파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맞붙게 되었다. 양측은 차기 의장을 뽑을 전당대회에 사활을 걸었는데, 1935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치루어진 임시 전당대회에서 급진파의 지지를 받은 유동열이 온건파의 지지를 받은 조용은을 아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의장에 선출되면서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취임 직후 유동열이 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 추진을 선언하자 이에 자유당이 반발해 연정 탈퇴를 선언하였다. 총리 선출 직후 민족단결연맹에 의해 발의된 내각불신임안이 민단련,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에 사회당 온건파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총리 유동열에게 코민테른 가입 추진 선언을 철회해 타 정당들을 안심시킬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시에는 탈당하겠다고 급진파를 압박했으나 사회당 급진파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조용은, 안공근 등 온건파 인사들을 해당행위를 이유로 제명했고 이에 반발한 온건파는 집단 탈당 후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몰락
유동열은 국무총리 사퇴를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렇게 하여 치러진 선거가 1935년 제14회 총선이다. 14회 총선에서 국민회와 민주당은 선거연대를 꾸려 집권에 성공한 반면 사회주의 진영은 지지율도 낮아진 상황에서 한인사회당과 사회민주당으로 분열된 상태였던지라 표가 분산되어 한인사회당은 의석을 절반 이상 잃으며 실권했다. 14회 총선에서의 참패 이후 의장 유동열의 리더십이 흔들렸다. 이미 온건파는 탈당해 다른 살림을 꾸린 상태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박헌영계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성향인 유동열계에 도전해왔다. 결국 유동열은 박헌영계의 압박에 총선 패배와 분열의 책임을 지고 1935년 11월 의장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또다시 열린 임시전당대회에서 박헌영이 의장에 당선되면서 당은 더욱 좌경화되었다. 박헌영은 당명을 대한공산당으로 바꾸고 더욱 좌경화된 당 강령과 노선을 제정하였다. 성향초중기
초기에서 중기까지의 한인사회당은 극좌 레닌주의자부터 중도에 가까운 개혁주의자까지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인사들이 모인 정당이었다.
위에 나온 3대 정파 외에도 수많은 군소정파들이 사회당 내에 존재했다. 이렇게 지나치게 넓은 스펙트럼은 사회당 분당과 쇠퇴의 단초가 되었다. 말기유동열이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 구조개혁주의를 주장하던 당내 온건파가 사회민주당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 남은 한인사회당은 급격히 좌경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사회당 내에는 다시 두 거지 정파가 대두되었다. 하나는 유동열로 대표되는 좌익민족주의 계열이었도 또다른 하나는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친소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이었다. 유동열이 의장이었던 시기에는 좌익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고 레닌주의 계열이 그들을 견제하는 모양새였지만 박헌영이 당권을 잡은 후에는 레닌주의 계열이 당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당가
창당과 함께 채택된 당가. 인터내셔널가를 한국어로 개사해 사용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김안산이 개사하였다. 사회당 온건파는 가사가 너무 급진적이라고 불만이었다고 하는데, 이동휘, 신채호 등 당 내 중립적인 인사들이 그냥 쓰자(...)고 해서[6] 채택되었다고 한다. 인터내셔널가는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대한공산당, 국민사회당, 자주인연맹 등에서 사용되었으나 인터내셔널가를 불호하던 사회당 온건파가 창당한 사회민주당은 독자적인 당가를 작곡해 쓴다. 역대 지도부
한인사회당은 의장이 당의 대표였다. 의장의 임기는 2년으로, 중임이 가능했다. 의장은 2년에 한 번 치러지는 전당대회에서 선출되었는데,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상위 후보 4명을 뽑아 2차 투표를, 2차 투표에서도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그중애서 상위 후보 2명을 뽑아 3차 투표를 치러 선출하였다.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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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e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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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1884년부터 1920년까지 존재했던 조선, 대한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정당. 역사태동개화당의 기원은 19세기 중후반 고종이 실시한 개화정책과 함께하였다고 평가받는다. 개화 정책에 찬성하는 이들 중 급진적인 개파를 급진개화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서양의 기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사회제도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명개화론을 지지하며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조선 고유의 제도와 사상을 유지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지지하는 온건개화파와 대립했다. 이들의 리더는 김옥균이었으며,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이완용, 서재필, 윤치호 등이 핵심멤버였다. 갑신혁명과 창당
고종의 개화가 지나치게 느리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한 급진개화파는 장변을 통해 훨씬 더 급진적인 개화를 이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공사관이 공사관 경비대를 동원해 정변을 지원하겠다는 의향을 밝혔으나 급진개화파는 민심 이반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다.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는 갑신혁명을 일으켰다. 정변은 성공적이었다. 급진개화파는 인명 피해를 최소화함과 동시에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고 한성(경성)의 국가 주요 기관들을 모조리 장악했다. 속전속결이었다. 한성에 주둔하던 청군은 지일 성향의 급진개화파를 견제하고 있었으나, 워낙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급진개화파는 조련국 사관장[12] 서재필 등이 이끄는 조련국 생도부대를 동원해 군권까지 장악하였고 지방조직을 통해 지방행정까지 통제하면서 청군은 개입일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 급진개화파는 고종의 입을 빌려 새 인사와 개혁정강을 발표를 단행하였다. 이 인사로 급진개화파 리더였던 김옥균은 총리서리에 임명되었으며 급진개화파 주요 인사들과 급진개화파에 협조적이었던 일부 온건개화파 인사들도 요직에 배치되었다. 주요 멤버들도 동시에 청군 철수도 요구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한성에서의 외국 세력 간 균형 유지를 위해[13] 보류되었다.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했던 급진개화파는 갑신혁명의 성공 이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정당이 필요하다 판단하였고 이로 인해 만들어진 정당이 바로 개화당이다. 총재에는 급진개화파의 리더인 김옥균이 추대되었다. 집권과 실권
갑심혁명 이후 9년만인 1893년, 역사적인 첫 총선이 치러졌다. 총선에서 개화당은 온건개화파의 보수당과 위정척사파의 보국당을 누르고 중추원 내 단독 과반을 확보, 내각을 구성했다. 총리대신에는 기존 총리이자 개화당 총재였던 김옥균이 취임했다. 1895년, 실권 없는 얼굴마담이던 고종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러시아와 모의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였다. 비록 고종 아관파천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일국의 군주가 국민의 지지로 구성된 정부를 외세의 힘을 빌려 전복하려 했던 쿠데타였기에 이 사태는 일대의 정치격변을 몰고 왔다. 이 사태를 계기로 개화당은 헌군주의 지지에서 공화주의 지지로 전향하였고 보수당과 함께 군주정을 폐지, 민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896년, 김옥균이 아관파천 사태에 대한책임을 지는 모양새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재무부장관이었던 이완용이 당 총재로 추대되어 총리직에 취임했다. 1898년, 영국의 자원을 얻어내기 위해 김옥균 내각이 제주도를 영국에 조차지로 양도하자 대규모의 만심 이반이 발생하였고 개화당은 집권 14년만에 정권을 온건개화파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재집권과 1차 세계대전1906년 총선에서 개롸당은 재집권에 성공했고 박영효를 국무총리로 하는 박영효 내각이 출범했다. 자유당으로당 강령개혁개화선언 (改革開放宣言)
현재 조선은 크나큰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세계 열강들은 호시탐탐 이 조선을 종속하려 하고 있으며 내부로는 탐관오리의 부패와 오랜 쇄국정책으로 썩어들어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조선의 4천년 독립의 불꽃이 결국 꺼져버릴 것이 자명하다. 당가
성향역대 지도부
개화당은 34년의 기간 동안 총 6명이 총쟈의 자리를 거쳐갔는데 그 중 서광범을 제외한 5명이 총리를 역임했다. 본부당보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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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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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1918년부터 19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 역사
성향대한국민회는 보수주의 빅텐트 정당이었다. 좌로는 보수자유주의자부터 우로는 국민보수주의자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정치인들이 분포해 있었으며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대한민주당과 함께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을 대표했다. 국민회는 애국심 강조, 사회 체제의 안정 추구, 급진적 반공정책 실시 등 보수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나 여성 인권 신장과 취업훈련 지원을 주장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들도 일부 지지했다. 일민주의대한국민회는 일민주의(一民主義/Ilminism)라는 이념을 당 강령에 명시해두었다. 일민주의는 1918년 이승만이 8회 총선 직전에 창시한 이념으로, 대한국민회가 대한민주당과 합당해 신한국당을 창당할 때꺼지 당의 공식 이념이었다. 일민주의는 (시민)민족주의에 사회자본주의를 결합시킨 이념으로, 하나의 국민(一民)은 모두가 인간적인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상이었다. 주로 이승만의 기독교 인본주의적 사상에서 기원했다고 평가받는다. 일민주의는 1920년대까지는 경제적으로 중도좌파적인 사상이었으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의 등장으로 다소 우경화되어 1930년대부터는 중도적인 이념이 되었다. 그와 별개로 일민주의는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익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역대 지도부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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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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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균's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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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대 대한민국 국무원 내각 (개화)
개요1918년 11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약 7년 1개월간 이어진,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대한국민회의 첫 내각이었다. 상세정치외교·국방내정각주 | ||||||||||||||||||||||||||||||||||||||||
싱먼's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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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대 대한민국 국무원 내각 (개화)
개요1918년 11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약 7년 1개월간 이어진,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대한국민회의 첫 내각이었다. 상세정치외교·국방내정각주 | ||||||||||||||||||||||||||||||||||||||||||||
- ↑ 해산 당시 기준
- ↑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집권정당은 1924년 집권한 몽골 인민혁명당. 다만 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하지 않았다.
- ↑ 한인사회당의 주 지지기반이 도시 노동자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인사회당 인사들은 농촌문제에는 무지했고 관심도 별로 없었다.
- ↑ 러시아어 이름은 김알렉산드라.
- ↑ 검은바지 콧수염이 이동휘. 앞줄 맨 오른쪽이 부의장 김립
- ↑ 실제로는 가사가 뭐 어때서 그러냐고 했다고 한다.
- ↑ 입헌군주제
- ↑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공식적으로 공화주의를 명시했다.
- ↑ 당명 변경 당시 기준
- ↑ 1910년대 초반까지는 특별한 정당색이 없었으나 1918년 총선 직전 하늘색을 당색으로 채택했다.
- ↑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 ↑ 현재와 비교하자면 육군사관학교장
- ↑ 당시 한성에는 청군과 일본군이 공사관 경비를 명분으로 주둔해있었다.
- ↑ 민족주의+사회자본주의
- ↑ 해산 당시 기준
- ↑ 오른쪽 열 한 번째가 이승만.
- ↑ 17.0 17.1 17.2 17.3 17.4 17.5 대한민주당과 선거연대
- ↑ 입헌군주제
- ↑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공식적으로 공화주의를 명시했다.
- ↑ 해산 당시 기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