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상을 해석하는데 몰두해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대한 제11번 테제≫ |
| 우리에게 카를 마르크스는 도덕적, 정신적 생활의 거장이지 지팡이를 휘두르는 목자는 아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게으른 자들을 때려 깨우는 이이며, 반쯤 잠들어 있기에 선의의 전투를 위해 자각돼야 할 훌륭한 에너지들을 깨워 일으키는 자이다. 그는, 관념들의 저 선명함과 통합성을 달성하기 위해, 그리고 만일 우리가 추상들에 대해 헛되이 이야기를 늘어놓길 원치 않을 경우 필요한 저 건실한 문화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강렬하고 끈질긴 성격의 작업에 대한 한 사례이다. 그는 의식적이며 사색적인 인간[이라는 건축물]의 한 벽돌 조각이다. 말하면서 자신의 혀를 살피거나 심장의 떨림을 느끼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거나 하지 않으며 현실을 그 본질에서부터 포괄함으로써 이를 지배하는, 즉 민중의 심성에 침투하여 편견의 생장을 분쇄하고 관념들을 일정하게 명징화하며 도덕적 성격을 강화하는, 견고한 논법(syllogism)을 건설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 ≪우리의 마르크스≫ (1918) 中 |
| 각각의 특별한 사건들의 결과물인 이 작품들은, 모두 같은 시대와 같은 역사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나름대로 마르크스주의적 방식으로 사유하려 노력했던 우리 세대 모든 철학자들이 목도해야했던 독특한 경험들: 즉 역사가 우리에게 가하고 있는 이론적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좋든 싫든 마주해야했던 마르크스의 철학적 사상의 소개에 대한 증인들이다. 역사 - 그것은 인민전선과 스페인 내전을 통해 우리의 청춘을 빼앗았고, 제2차 세계 대전은 우리에게 끔찍한 파시즘적 행위를 각인시키는 교육 효과를 불어왔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진입" 했을 때 우리를 놀라게 했다. 소부르주아지 출신의 학생들을, 계급적인 존재, 계급 투쟁과 목표를 탐색하는 투쟁가로 바꾸어놓았다. 그것이 우리 철학자들에게 부여한 각종 증거들에서, 우리들은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을 도출해냈고, 그 결론에 따라 노동계급의 정치 조직인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제 막 끝났을 뿐이다. 우리는 잔인하게도, 당의 거대한 정치-이데올로기적 진지전에 투입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마르크스주의 철학 탐색에 부응하고, 그것에 대한 결과마저도 감수해야했다.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Pour Marx, 1965), 서문 "오늘" 中 |
| 마르크스를 독해하고, 재독해하지 않은 상태로 마르크스에 토론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러한 행동은 점점 더 많은 이론적, 철학적, 정치적 잘못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교리 기계와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장치(국가, 정당, 노동조합 및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가 사라지는 과정에 있을 때, 우리는 변명할 수 없으며 책임을 외면할 수 있는 알리바이만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가 없는 미래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 없이는 미래도 없고, 마르크스에 대한 기억과 유산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 마르크스가 없는 것은 가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편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Spectres de Marx, 1993), 제1장 中 |
| 지금 시점에서 나는 완전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에는 언제나 비판이, 그리고 급진적인 비판이 존재한다. 나는 니체를 독해할 때 마르크스를 함께 독해하며, 이 둘은 언제나 좋은 페어링이다. 물론 내 저작에서 다루어진 철학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마르크스주의적이다. 나는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마르크스가 이제는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는 해결해야할 시급할 과제들이 산적해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세계 시장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끊임 없이 탐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면, 결국에는 마르크스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질 들뢰즈, ≪나는 기억한다≫ (Je me souviens, 1993) 中 |
| 마르크스가 단순히 혁명가였다면, 유토피아에 대한 그의 끊임 없는 반대 의식은 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한다.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정치의 요소로 인식하고, 모든 실증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맥락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오류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유토피아에 반대한다. 그는 현재주의자이다. 그는 현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조건을 이론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한 인물이다. 마르크스는 미래와 현재 사이의, 정치와 철학 사이의 빼놓을 수 없는 중계자의 역할을 수백년간 우리에게 해오고 있는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La philosophie de Marx, 1994) 中 |
공산1968의 세계관.
상세
러시아에서 혁명이 실패하고, 독일에서 혁명이 성공해 독일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된 것이 컨셉이다. 독일에서는 막대한 출혈 속에 사회민주당이 기존 입장을 뒤집고 반전 여론이 대두되어, 급진파가 온건파를 몰아내고 당권을 장악한다. 이들은 독일 11월 혁명 직후 사회주의 쿠데타를 기도, 독일 1월 혁명을 일으켜 1919년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라트 연방을 성립시킨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2월 혁명만이 성공하고, 케렌스키 정부의 즉각 휴전 협정 선언과 독일 정부의 레닌 입국 불허 등으로 10월 혁명 자체가 발생하지 않아, 러시아는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의 영토를 보유한 중립 의회민주정 국가인 러시아 연방으로 재탄생한다.
전후 협정에 따라 라트 연방은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며 바이마르 공화국과 비슷한 영토만을 보유하게 된다. 라트 연방은 룩셈부르크주의 원칙에 따라 강력한 경제 개발 정책을 시행, 전후 경제난을 극복하려 하였다. 룩셈부르크의 사후 정권을 잡은 급진파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고, 개발 독재를 추구한다. 원래의 역사대로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발발하고, 프랑스 내에서는 장 프랑수아 드라로크가 이끄는 프랑스 사회당이 집권하여 파시즘화가 진행되었다. 대공황의 타격으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프랑스는 기존 영일동맹과 조약을 체결해, 라트 연방을 유럽 내에서 고립시켜나갔다. 라트 연방은 러시아 연방과 안보 조약을 체결하며 상호 호혜 협정을 맺는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영국과 일본, 프랑스 동맹이 일으킨 전쟁으로, 결과적으로 일본과 영국이 패전하였으며 프랑스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공산화되고, 영국은 식민지를 모두 잃고 일본은 남북으로 분단된다. 한편 러시아의 철도를 통해 암묵적인 러시아 정부와 라트 연방의 지지를 받은 중국 공산당은 원 역사대로 국공내전에서 승기를 잡으며, 실제보다는 2년 늦은 1951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시켰다.
러시아와 라트 연방은 1950년대 결별하며, 1950년대 이후 라트 연방 내에서도 주류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이데올로기적 해빙 무드가 조성되며 라트 연방의 사회도 점차 변화한다. 결국 1968년, 전 유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투쟁인 68혁명을 통해 라트 연방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개발 독재 원칙을 포기한다. 라트 연방은 1972년 냉전 체제의 종말을 선언, 미국과의 상호 동맹 관계인 데탕트 체제를 성립시켰으며, 제3인터내셔널을 해체한 후 파리 조약기구를 새로이 설치한다. 한편 러시아와 독일의 결별로 인해 라트 연방과의 연결 고리를 잃은 중인공은 라트 연방과는 다른 마오주의의 원칙을 강화하였으나, 1976년과 1989년의 두차례 천안문 항쟁을 통해 강경파가 실각하고 온건파가 집권해 연방공화국으로 체제를 개편시키게 된다.
1990년대 이후로도 건재한 유럽 사회주의 정권은 경제 개혁과 정치 개혁을 통해 착실하게 성장해나갔으며, 21세기 이후로는 남아메리카 주요 국가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이 대두되며 마르크스주의는 21세기에도 주류의 이데올로기로 존속하였다. 북한의 경우, 1948년 김두봉과 연안파 중심으로 조선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으나 1989년 천안문 사태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되어 1990년 남한에 의하여 흡수 통일되었다는 설정이다.
국가 목록
여담
- 작가가 제멋대로 쓰다보니 고증이나 개연성이 개판인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