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Kenne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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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unist 1972, 2023 |
미합중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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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맥거번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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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유엔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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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7대 대통령 조지 스탠리 맥거번 George Stanley McGovern | |
199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
출생 | 1922년 7월 19일 |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 에이번 | |
사망 | 2012년 10월 22일 (향년 90세) |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 수폴스 | |
재임기간 | 제37대 대통령 |
1973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 |
제9대 유엔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 |
1992년 4월 1일 ~ 1997년 4월 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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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미국 대통령 취임사 (1973) |
Come Home, America!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슬로건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1973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재직하였다.
미국 진보좌파 진영을 대표하는 인사중 하나이자, 미국 민주당 좌파의 직계 조상으로 꼽히는 전설적인 정치인이다. 본격적인 정계 입문 이전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평화를 위한 식량" 총책임자로 근무했으며, 상원의원으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전 운동에 나섰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재선을 저지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대통령으로서 베트남 전쟁 즉각 철수, 연 1,000달러 기본소득제, 낙태 전면 합법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퇴임 이후에는 세계식량계획과 관련되어 여러 업무에서 일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퇴임 후 노벨평화상을 수여받았다.
약력
- 1957. 제85대 하원의원 (민주당 / 사우스다코타 광역구)
- 1959. 제86대 하원의원 (민주당 / 사우스다코타 광역구)
- 1961. 평화를 위한 식량 총책임자
- 1963. 제88대 상원의원 (민주당 / 사우스다코타)
- 1969. 제91대 상원의원 (민주당 / 사우스다코타)
- 1973. 1. 제37대 미국 대통령 (임기 1기, 초선)
- 1977. 1. 제37대 미국 대통령 (임기 2기, 재선)[2]
- 1989. 주UN 식량 및 농업 위원회 대사
- 1992. 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1997)
- 1999. 노벨평화상 수상
- 2012.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서훈
생애
정계 입문 이전
조지 맥거번은 사우스다코타의 시골 마을에서 가톨릭 목회자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주 가난하게 살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갈고 닦은 웅변 실력으로 지역 대학교에 입학해 웅변 장학금을 받았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이탈리아 전선에서 폭격기 조종사로 복무하며 많은 전공을 쌓았다. 그는 공군 훈장을 4회 수훈받았고 1945년 제대했는데, 이는 그가 1972년 대선에서 당선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또 이때 구호물품을 조달했던 경험이 정치 입문 이후 빈곤 퇴치 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는 바탕이 된다.
제대 이후 다코타 웨즐리안 대학교로 돌아가 1946년에 학사 학위를 따고 잠시 신학교로 진학했지만, 이내 싫증을 느끼고 1949년에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역사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모교인 다코타 웨즐리안 대학교로 돌아가 역사 교수로 부임하던 도중 박사 논문 집필을 병행하여 1953년에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종신직 교수직을 제의받기까지 한다. 1940년대 내내 그는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후보 헨리 A. 월리스를 지지하기 위해 진보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1952년, 그는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선거운동을 보고 감명을 받아 민주당에 입당해 교수직을 때려 치고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케네디 정부에서
1956년, 조지 맥거번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우세 지역구이자 자신의 고향이었던 사우스다코타 주의 연방 하원의원 선거구에 출마했다. 처음에는 낙선이 예상되었지만, 놀랍게도 유권자 하나 하나에 다가가는 전략으로 예상을 뒤엎고 당선되었다. 이후 1958년에도 재선되었다. 그는 하원의원 시절 민주당의 소장파 의원으로 빈곤 퇴치 운동과 농촌 진흥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1960년 선거에서 낙선하게 된다.
1960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조지 맥거번의 활동을 유심히 보았는지, 그를 "평화를 위한 식량 (Food for Peace)" 프로그램의 첫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제3세계 국가들로 향하는 인도적 지원을 대폭 확대시켜 미국 외교의 큰 축으로 만드는 정책을 시행중이었는데, 이 계획의 식량 관련 임무를 하원 내 농업 및 식량복지 관련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던 맥거번에게 맡긴 것이다.
맥거번은 단 1년 반만에 미국의 잉여 농산품을 전세계의 총 3천5백만명에게 공급하는 활약을 펼친다. 이 공로로 맥거번은 요한 23세 교황을 알현하는 등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훗날 노벨평화상을 타게 되는 유엔세계식량계획의 창설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편 고향인 사우스다코타에서도 처리하기 곤란해서 썩혀버리던 수확을 정부가 좋은 취지로 후한 값을 쳐줘서 사주니 아쉬울 것 없었다.
베트남 전쟁의 반대자
1962년 그는 체급을 높여 사우스다코타 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는데, 케네디 대통령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597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상원 활동 초창기에는 하원 경력과 비슷하게 농민들의 권리를 적극 대변하며 농업 정책 전문가로 평가받았다. 동료 초선의원이자 대통령의 동생이었던 테드 케네디도 농업 관련 법안에는 적극적으로 맥거번의 조언을 구했다. 한편 핵전쟁 시대의 국방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겨 지속적으로 국방예산의 감축을 제안하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소극적인 반대 자세를 취했다. 그는 케네디 행정부 시기, 케네디를 지지하는 소장파 의원인 케네디 키드(Kennedy Kids)의 일원으로 이름을 떨쳤고 민주당 내 좌파 의원으로 꼽혔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맥거번은 자신의 동료 진보파 의원이었던 로버트 F. 케네디 의원을 지지하였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자, 그는 비슷한 성향의 유진 매카시를 지지했다. 유진 매카시는 케네디파의 지지를 얻으며 경선에서 승리했지만, 정작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당권파와 린든 B. 존슨 상원 원내대표의 지지를 받은 휴버트 험프리가 후보로 결정되었다. 맥거번은 분개하며 지지 거부를 선언했지만 존 F. 케네디의 간곡한 요청 끝에 입장을 철회하고 험프리 당선을 위해 뛰었다. 그러나 결국 험프리는 근소한 차이로 닉슨에 밀려 낙선한다.
"이 방에 있는 모든 상원의원들이 너무 일찍 묻힌 미국 청년 50,000명을 파병한데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이 방에서 피비린내가 납니다. 다리가 없거나, 팔이 없거나, 성기가 없거나, 얼굴이 없거나, 희망이 없는 청년들의 피비린내가." Every senator in this chamber is partly responsible for sending 50,000 young Americans to an early grave. This chamber reeks of blood. Every Senator here is partly responsible for that human wreckage at Walter Reed and Bethesda Naval and all across our land—young men without legs, or arms, or genitals, or faces or hopes. 맥거번-햇필드 수정안 투표 전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의 연설. |
1968년 4월 북베트남의 기습 공격으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가운데, 조지 맥거번은 소극적인 반대파에 속했다. 물론 북베트남이 먼저 공격한 것이므로 남베트남을 도와야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남베트남 방문 도중, 남베트남 정치인들의 각종 부패 행각과 미군의 전쟁범죄를 목격한 후 극렬한 베트남 전쟁의 반대파가 되었다. 맥거번은 닉슨의 베트남 정책을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비판한 상원의원이 되었고, 평화적인 반전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얼굴을 보였다. 그의 반전 행보는 1970년 국방예산안에 "1년 이내 미군의 베트남 완전 철수"를 추가할 것을 건의한 '맥거번-햇필드 수정안'으로 절정을 찍는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와 지상파 TV 토론 방송 자금을 마련하는 등 맥거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이 수정안은 미국민들의 지지를 얻지만 결국 부결되었다. 하지만 민주당 보수파는 물론 심지어 공화당 내 온건파인 넬슨 록펠러 뉴욕주지사의 공식적인 지지까지 받은 끝에 49대 51로 간발의 차로 부결되었으며 맥거번의 판정승리였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때부터 맥거번은 민주당의 대권주자로 발돋움하게 된다.
한편, 조지 맥거번은 베트남 전쟁 외에도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우선 그는 경선과정을 전폭적으로 바꾸는 특별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직접선거인 프라이머리 방식을 확대 추진하고 흑인, 여성 및 청년 할당제를 신설하는 그의 개혁안은 현재도 거대양당이 모두 따르고 있다. 한편 상원에서는 국내 빈곤을 다루는 영양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닉슨 정부와 푸드 스탬프 제도를 놓고 대립각을 세운다.
제37대 미국 대통령
임기 1기
내정
외교
임기 2기
내정
외교
조지 맥거번 행정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맥거번 후보가 승리하여 성립된 행정부로, 1973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존속했다. 부통령은 월터 먼데일(1973.01.20 ~ 1981.01.20)이었다.